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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탄 Apr 26. 2023

마지막 관객 (2/2)

베트남 민간인학살 생존자 ‘故 팜 티 호아 할머니’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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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관객 (1/2) : 1968년 베트남 하미(Hà My) 마을에서 있었던 일]



2013년 4월, 뜨거운 공기에 숨이 막힐듯한 베트남 중부의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하미 마을의 위령비 참배 일정에는 베트남 다낭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베트남 학생들이 함께 했다. 대부분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던 근처 중부지역 출신들이고, 하미 마을과는 고작 30분 거리의 다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한국군에 대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모르고 있던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나마 집안 어른들이나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한국군이 어딘가에서 학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학생은 절반도 채 안되었다. 1번 국도에서 조금 들어간 너른 풀밭 사이, 마을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듯 다져진 길 하나를 따라 여전히 연꽃 대리석으로 덮여있는 위령비를 찾았다. 위령비의 앞면에는 0세부터 80세까지 총 135명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아직 이름이 지어지기도 전인 3명의 갓난아기에겐 ‘보 자인(Vô Danh, 무명)’이라는 글씨가 새겨졌다. 우리는 그 억울한 죽음 앞에 향과 꽃을 바쳤다. 다시 위령비를 나와 위령비 문 앞 풀밭에 30여 명의 양국 학생들이 모여 앉았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반쪽자리 나무 그늘마저도 그저 귀한 더위였다. 상대 나라의 또래 친구들을 만난 반가움도 잠시,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모두의 표정이 굳어만 갔다. 한국 문화를 좋아하고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베트남 학생들과 과거의 진실을 만나러 베트남에 온 한국 학생들은 차곡차곡 더해지는 끔찍한 진실 앞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까, 옷자락이 닿을까 그저 바닥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연신 땀을 훔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서먹한 만큼의 간격을 둔 채 일렬로 논두렁 길을 지나 ‘팜 티 호아’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45년 전 젊고 어린 한국 군인들이 무거운 군화를 신고 걸었던 그 길이었다.


‘팜 티 호아’ 할머니는 하미 마을을 찾아온 수많은 한국 사람들을 만나 주시고 온몸에 새겨진 학살과 전쟁의 역사를 들려주시는 ‘증언자’였다. 매번 학살 당시의 일을 꺼내놓을 때마다 억울함과 분노에 치를 떨기도 하셨지만 그것이 혹 여나 한국 친구들에게 상처가 될까 싶어 헤어질 때는 먼저 농담을 건네면서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 주시곤 했다. 충격적인 학살 이야기를 듣고 어린 학생들이 눈물을 흘릴 때면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했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여기까지 데려왔냐? 불쌍한 것들, 가여운 것들……’ 그러나 우리가 할머니를 찾았을 땐 그런 말을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기력이 쇠해서 계속 침대에만 누워 계셨던 할머니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아이들이 왔다는 말에 부축을 받아 겨우겨우 거실로 나왔다. 그리곤 혼미한 정신 속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큰 아들을 향해 작은 목소리를 뱉었다.


"아이들이 왔으니 먹을 거라도 줘야 하는데 집에 아무것도 없으니 어쩌냐? 얘야, 뭐 라도 좀 찾아봐라, 아이들이 집에 왔는데......"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하늘색 벽으로 둘러 쌓인 좁은 거실에서 우리는 갈색의 타일 바닥 위에 모여 앉았다. 우리는 옆 사람과 끈적이는 팔을 맞대며, 불편한 숨소리를 나누며 서로의 존재를 의식했다. 나무 의자에 간신히 걸터앉은 할머니는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말을 하기 어려운 할머니 대신 할머니의 앙상한 어깨를 감싸고 있던 이들이 이 가족이 겪었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두 발이 없는 할머니는 오른쪽 다리 무릎 아래로 나무 의족을 하고 있었는데, 그 끝에 얇은 철판이 덧대어져 있었다. 미리 이야기를 들었고, 사진으로 본 적도 있지만 무척이나 낯설었다.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철로 만든 그 투박한 의족 받침이 시리도록 차가워 보였다. 할머니의 두 발목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군 아이들에게서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들이 타일바닥 위로 뚝뚝 떨어졌다. 영상 촬영을 하고 있던 아이가 힘들어하는 것이 보였다. 자리가 없어 문 밖에 걸쳐 서있던 내가 카메라를 건네받았다. 더 많이 기억하고,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모두의 침묵 속에 쏟아져 나온 엄청난 이야기들은 내 귀를 지나쳐 허공으로 흩어져버렸다. 대신 ‘나 여기가 아파. 요즘은 여기도 아파.’라고 힘없이 반복하는 할머니의 작은 목소리만이 내 귀에 쏙쏙 꽂혔다.


거실에 있던 모두가 일어나 한 명씩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아이들은 할머니의 작고 가녀린 몸이 부서지기라도 할까 의자에 앉아있는 할머니의 어깨를 살포시 안아드렸다. 그러나 할머니는 당신 집에 찾아온 한 명 한 명의 눈을 깊게 바라봐 주시며 마른 나뭇가지 같은 두 팔로 아이들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셨다. 연약하지만 실은 무엇보다 강인하고 뜨거웠던 할머니의 품을 기억하며 우리는 다시 논두렁 길을 걸었다.


하미 마을 @한베평화재단


참배 일정이 끝나고 우리는 서로의 소감을 나누었다. 감정을 추스른 베트남 학생들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에 처음엔 너무 충격적이었고 화가 났지만, 이렇게 한국 학생들과 같이 이야기를 듣게 되어 오히려 다행인 것 같습니다.”

“역사를 잘 몰랐던 제가 부끄럽습니다. 여러분도 부디 한국에 가서 더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세요.”

“저는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한국과의 과거도 잘 모르고 그저 한국 문화만 좋아했었는데, 이렇게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 알게 된 내용들이 너무 놀라서 이번에는 여러분과 친해지지 못했지만 다음에는 조금 더 편한 자리에서 만나 즐거운 시간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꺼내는 베트남 학생들의 눈빛도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한국 아이들의 눈빛도 묘하게 빛이 났다. 느닷없이 해가 사라지더니 바람이 불었다. 여전히 약간의 간격을 둔 채 떨어져 서 있는 그 사이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오고 갔다. 뜨겁게 흘렸던 땀과 눈물들이 바람에 식어갔다. 마음 나누기가 다 끝날 무렵, 이번엔 갑자기 먹구름과 함께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1번 국도 변에 세워둔 버스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뜨거운 태양을 피할 용으로 몇 명이 들고 있던 우산을 나누어 쓰며 어깨가 닿고, 팔이 닿고, 얼굴을 마주 봤다. 모두의 간격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로부터 2개월 뒤 베트남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에서 우리는 할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하미 학살이 있은 지 45년 만이었고, 할머니는 향년 87세였다. 할머니의 소원대로 그 해 3월에 있던 하미 학살 45주년 위령제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참배단’이 찾아온 걸 본 후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한데 모인 자식들에게 당부를 하셨다. ‘과거의 원한은 내가 다 짊어지고 갈 거야. 그러니 나 없어도 한국 친구들이 찾아오거든 잘 대해줘. 마을 사람들에게도 이제 그만 미워하라고 해. 그 불쌍한 것들……’ 결국 이 말은 할머니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할머니는 연꽃 대리석이 걷히고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끝내 보지 못하셨지만, 그간 할머니의 품에 안기고 갔던 많은 한국 사람들이 할머니의 가시는 길에 뜻을 함께했다. 그렇게 우리는 할머니 품에 안긴 마지막 한국사람이 되었다.




툭툭, 누군가 내 등을 두드렸다. 모두의 긴장과 기대 속에 뮤지컬의 막이 올랐고 늦은 입장을 포함한 모든 사전 신청자들도 스텝들도 공연장 안으로 입장을 한 후였다. 입구를 지키고 서있던 내 등 바로 뒤에는 공연장용 암막 커튼이 있었고 그 커튼 뒤에는 무거운 철문이 닫혀 있었다. 커튼을 조심스레 열어보니 철문과 커튼 사이 사람 한 명이면 꽉 찰 작은 공간은 어둠뿐이었다. 혹시 누가 문 밖에 있나 하는 생각으로 공연이 방해가 되지 않게 문을 살짝 열어봤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 내 등을 두 번 두드린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는데....


'청소년 베트남 축제'에서 선보인 뮤지컬 <우리 이야기>


무대에선 아이들의 열연과 함께 공연이 무르익어 갔다. 베트남 여행을 하던 어린 두 주인공이 베트남 전쟁을 겪은 작가인 ‘응옥 타잉’을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슬픈 전쟁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또한 그녀의 언니 ‘팜 티 호아’와 함께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게 되고, 마지막에 두 주인공은 ‘좋은 전쟁은 나쁜 평화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바오닌 작가의 말을 떠올리며 전쟁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는 내용의 창작 뮤지컬. 공연은 크고 작은 감동과 함께 성황리에 막이 내렸다. 어두웠던 공연장에 조명이 켜지자 눈이 빨개지도록 숨죽여 울던 관객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보였다. 하루 종일, 아니 몇 달간 쌓였던 긴장이 녹아내렸고 나는 다시 좀 전의 촉감이 떠올랐다. 내가 선명하게 느낄 수 있도록 등을 두드린 건 누구였을까? 혹시 한 명 한 명 껴안아주셨던 아이들을 만나러, 혹은 무대 위의 당신을 보러, 혹은 당신을 만나러 온 사람들을 맞이하러 '팜 티 호아 할머니'가 다녀가신 게 아니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말처럼 내가 베트남어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선생이어서, 게다가 다시 베트남에 살러 갈 사람이어서 할머니가 나에게 말을 전해달라 찾아온 것이었을까? 마지막 관객으로 찾아온 할머니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을까?


“이 ‘팜 티 호아’ 할머니를 아니, 베트남의 수많은 ‘팜 티 호아’들을 오래오래 기억해 주세요!”



2023년 2월 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 68 단독 재판부는 베트남전 피해자 응우옌티탄(63)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에게 3천만 100원과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응우옌티탄은 8살이었던 1968년 2월 한국군 청룡부대가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안구 퐁니 마을에서 민간인 70여 명을 사살해 가족을 잃고 자신도 중상을 입었다며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는 베트남전 희생자에 대해 한국정부의 법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1심 판결에 불복한다며 항소했다. 이와 관련해 국방부는 “실체적 진실에 기초한 항소심 판결을 받기 위해 관련기관과의 지속적인 협의를 하면서 법적 절차에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등은 이 판결에 대해 “대한민국의 국격을 훼손하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저하한 판결”이라고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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