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들이 또 가스통이라도 들고 나타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했다.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2010년 ‘베트남전 참전 고엽제 전우회’ 할아버지들이 천안함 사태와 관련해서 참여연대 앞에서 가스통을 들고 위협 시위를 했던 그 일 말이다. 누군가의 평범한 아버지였던, 혹은 힘없고 외로운 할아버지였던 그 무리의 언행 하나하나가 유독 신경 쓰였던 것은 비인가 대안학교에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이야기를 전면으로 내세운 청소년 행사를 준비 중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비인가 대안학교인 ‘늦봄 문익환 학교’가 여러 언론으로부터 ‘종북 씨앗을 키우는 학교’라는 왜곡된 낙인을 찍혀 공격을 받고 있었고, ‘학업중단학생 교육지원사업’ 시도별 평가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하고도 탈락해서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지원이 끊기기까지 했던 때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를 노래하던 그 옛날이 아니라 2013년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학교의 입장에서는 행사에 참여하는 모두의 안전과 함께 행여나 행사 이후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피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모든 관객들에게 사전 신청을 받고 누구의 지인인지, 어떤 경로로 행사를 알게 되었는지 등의 추가 정보를 모았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와 유가족들을 직접 만나고 온 이야기를 담은 베트남 여행 다큐멘터리는 이번에 상영하지 않는 것으로 최종 결정했다. 일 년 내내 영상 작업을 붙잡고 있던 아이도 그 곁을 지켜보던 나도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이 졸업작품으로 준비한 ‘청소년 베트남 축제’의 날이 다가왔다. 며칠째 들락거렸던 홍대 앞의 한 소극장으로 모두 모였다. 스텝 역할을 맡은 아이들이 지하 계단으로 내려가는 건물 입구 근처에 테이블을 펴 놓고 찾아온 사람들의 이름을 사전 신청 명단에서 확인했다. 나는 멀리서 입장하는 사람 한 명 한 명을 조심스레 지켜봤다. 여기저기 손님을 맞이하는 반가운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지만 나는 명단에 있는 모든 이들의 이름이 지워질 때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사전 신청자들의 입장이 거의 마무리되고, 신청자들이 데리고 온 사람들까지 더해져 어느새 소극장 안은 아이들 포함 백 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복도와 대기실 등의 공간에서 아이들의 베트남 여행 사진과 그림 전시를 관람하고, 여행 이야기를 담아 아이들이 직접 만든 수공예품과 베트남에서 만나고 온 사회적 기업들의 공정무역 제품들을 구매했다. 곧이어 2부 무대 공연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여기저기서 도움을 주었던 선후배 아이들도 모두 공연장 안으로 들어왔고, 1층과 2층의 관객석은 물론 통로 계단까지 좌석이 채워졌다. 암전이 된 공연장 안에서 빛이라고는 무대 위의 스크린뿐이었다. 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공연장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문인 두꺼운 철문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꽉 쥐어 잡고는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닫았다. 철커덩! 안과 밖을 나누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초대손님인 베트남 유학생이 무대에 올라 거문고와 비슷한 베트남 현악기 단짱(Đàn tranh)을 연주하며 2부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직접 만든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여주지 못하게 된 아이가 베트남 친구와 함께 무대에 올라 각자의 언어로 베트남 작가의 시를 낭송했다.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마이크를 쥐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직접 보고 만난 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해 미안하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이어서 오늘의 메인 공연인 뮤지컬 <우리 이야기>의 막이 올랐다. 아이들이 한 달간의 베트남 여행에서 만났던 ‘하미(Hà My) 학살’ 생존자 ‘팜 티 호아(Phạm Thị Hoa)’ 할머니의 이야기를 각색해서 만들고 열심히 연습해 온 창작 뮤지컬이었다.
1968년 2월 22일 이른 아침, 베트남 중부 꽝남(Quảng Nam) 성의 하미(Hà My) 마을에 한국군 청룡부대 3개 소대의 병사들이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은 부대원들을 기억할 정도로 관계가 좋았고, 불과 며칠 전에는 한국군에게 빵까지 받았었다. 주민들은 큰 저항 없이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마을의 세 군데에 나눠 모였다. 몇 명 병사들이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누어 주었고, 장교는 길고 장황한 연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연설을 끝낸 장교의 손짓과 함께 수풀 속에 숨어 있던 M60 기관총과 M79 유탄발사기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불과 2시간 만에 모여 있던 30 가구 135명이 죽임을 당하고 모든 집이 불타버렸다. 그 135명 가운데 59명은 10살 미만의 어린이였고, 절반이 넘는 98명은 여성이었다. 총을 들 만한 나이의 남성은 세 명에 불과했다.
하미 마을에서 학살이 있기 몇 주 전, 북쪽의 북 베트남 인민군과 남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남쪽의 베트남 공화국, 미국과 그 동맹국인 한국 군대에 맞서 ‘뗏(Tết Mậu Thân, 구정) 대공세’를 개시했다. 주민들에게 우호적이기까지 했던 한국군이 왜 갑자기 학살을 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뗏 대공세’로 인해 한국군을 비롯한 남쪽 진영이 큰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반격인 '괴룡 1호 작전'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많은 이들의 추측이 있다.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다른 마을들처럼 베트콩 게릴라에 대한 보복이었을까? 그토록 다정했던 한국 청년들이 왜 갑자기 무섭게 변해버렸는지 진실은 총을 겨누었던 그 군인들만이 알 수 있다.
‘팜 티 호아’ 할머니는 자기 쪽으로 날아오는 수류탄을 보고 아이들의 몸을 감싸며 땅 위로 바싹 엎드렸다. 첫 번째 수류탄은 할머니의 허리를 맞고 튕겨 나갔고 두 번째 수류탄이 할머니 발 밑에서 터졌다. 할머니의 잘린 두 발에 구더기가 하얗게 슬어 가슴까지 꼬물꼬물 기어올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할머니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전신에 총상과 파편상, 화상까지 입은 어린 딸의 신음소리였다. 할머니는 결국 다섯 살배기 딸과 열 살배기 아들, 그리고 한집에 살던 사촌 올케와 뱃속의 아기, 아직 어미젖을 떼지 못한 젖먹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까지 세 명의 종질을 잃었다. 만삭이던 사촌 올케는 한국군에게 강간을 당한 뒤 끝내 죽임을 당했는데 발견 당시 배가 갈라져 태아와 창자가 밖으로 쏟아져 나와 있었다.
학살이 끝난 날 밤 살아남은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와 시신을 수습했다. 아침에 받은 사탕을 물고 있는 아이의 시신도 있었다. 생존자들은 이웃 마을 사람들이 가져다준 돗자리로 시신을 둘둘 말아 얕게 판 구덩이에 묻고 작은 돌멩이나 막대기로 표시를 했다. 수습이 되지 못할 정도로 훼손이 심한 시신들은 한꺼번에 모아 묻었다. 그러나 그다음 날 한국군은 D-7 불도저 두 대를 가지고 돌아와 간신히 만들어진 무덤과 미처 묻지 못한 시신을 다시 밀어버렸다. 이 두 번째 학살로 뭉개진 육신들이 흙 속에 뒤엉켜졌다. 한국군이 떠나자 생존자들이 하나둘씩 모여 커다란 대나무 채반과 긴 나무젓가락을 들고 흩어진 뼛조각과 살점을 줍기 시작했다.
할머니처럼 부상당한 생존자들은 다낭 항에 정박 중인 독일 의료 선으로 보내져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나머지 생존자들은 남 베트남 민족해방 전선이 장악한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른 난민촌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학살 당시 마을을 떠나 다낭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14살 큰 아들과 호이안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둘째 아들은 화를 면했다. 할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다낭의 친척집으로 갔다. 전쟁 중 친척 집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할머니는 두 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발 없는 다리로 뛰어다니며 동냥을 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군인들은 돈이 없었으니 미군 부대나 한국군 부대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동냥 주머니 두 개를 챙겨 다니며 한국군에게서 받은 돈을 따로 모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선 굳은 표정으로 한국군에게 받은 지폐를 한 장 한 장 빳빳하게 다렸다. ‘이건 죽은 딸아이의 목숨 값, 이건 죽은 아들아이의 목숨 값이야’ 할머니는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살아남은 두 아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얼마 후 전쟁은 끝났지만 가난에 진저리를 치던 둘째 아들은 보트피플이 되어 조국을 떠났다. 할머니는 큰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황무지로 버려진 땅을 개간하던 아들은 불발탄에 두 눈을 잃었다. 학살과 전쟁은 끊임없이 할머니의 삶을 짓밟고 또 짓밟았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전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은 듯했다.
마을에 학살이 있은 지 33년이 지난 2000년 12월, 한국의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3만 달러를 기부하며 하미 마을에 위령비를 짓게 되었다. 그러나 ‘학살당한 135명의 동포를 기리다.... 1968년 이른 봄 음력 1월 26일 청룡병사들이 와서 미친 듯이 양민을 학살했다. 하미 마을 30 가구 중에 135명이 죽었다’는 내용이 비문에 적히는 것을 알게 된 월남참전전우복지회는 준공식 하루 전날 준공을 반대했다. 그들은 위령비 건립의 목적이 '한국군에 의한 학살 인정’이 아니라, '하미 마을 희생자와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5천 명의 한국군에 대한 위로’라는 이유로 비문의 내용을 지우기를 요구했다. 할머니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있었던 사실을 지울 수 없다’고 하며 대신 연꽃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대리석으로 비문을 가렸다. 그리고 언젠가는 연꽃이 거둬지고 진실이 드러나기를 절실히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