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동 일기37
어릴 적부터 헌혈이 무서웠다.
언젠가부터, 한번 쯤은 헌혈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군대에 있을 땐 거의 반강제적으로 헌혈을 하는 분위기였지만, 잠시 채혈 순서를 기다리는 사이 헌혈차에서 그냥 내린 적도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헌혈에 대한 공포가 더욱 내면화되고 학습되어, 헌혈을 해야한다는 의무감도 희미해졌다.
한번은 제주도에 사는 제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 동료의 어린 딸이 백혈병에 걸렸다면서 헌혈증이 있으면 좀 보내달라는 거였다.
내가 학교에 근무하니까 아이들한테서 헌혈증을 모아 보내달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수선한 연말이어서인지 아이들은 헌혈증을 잘 가져오지 않았다.
당시 운영하던 홈페이지 초기 화면에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얼마 후, 아이들이 모아준 몇 장의 헌혈증을 보내려는 찰나, 나의 홈페이지를 보고 편지 한 통을 보내온 사람이 있었다.
거기엔 몇 장의 헌혈증이 담겨 있었는데, 그 중엔 보낸 사람의 헌혈증도 포함돼 있었다.
편지엔, 그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헌혈을 해 봤다고 쓰여 있었다...
나는 당황하였다. 제자에게 연락을 받고 학교 아이들에게 헌혈증을 모으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헌혈을 했다. 혼자서 헌혈의 집을 찾아갔다. 그만큼의 용기조차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생 두려웠던 헌혈이었는데 막상 그날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자발적인 결심은 두려움을 희미하게 해 준다는 드문 경험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헌혈을 하러 왔다고 했더니, 간호사가 “용기를 내셨군요.”라며 웃었다.
그 말이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조금 뿌듯하기도 했다.
우람한 생각으로 타인을 위한 행동을 어렵지 않게 해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작은 행동에도 여러 번 생각하고, 고민하고, 두려워하고, 뭐 그런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한가지 분명한 건,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니고, 그저 일반적인 불편함과 귀찮음을 무릅쓴 한 사람의 정성어린 행동이,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줄뿐만 아니라, 어떤 실천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떤 논리나 설득이나 설교나 강압이 아니라, 이윤을 생각지 않는 작은 사랑과 정성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오랜만에 홈페이지의 공지를 보고 헌혈증을 모아주었던 단 한 사람, 그가 궁금해졌다.
주소도 없이 편지 몇 줄과 헌혈증 몇 장이 들어있던 그 편지봉투도.
그리고 그때 헌혈증을 모아준 아이들에게 깊이 감사하지 못하고 당연한 것처럼 여겼던 것을 반성한다.
고마웠어, 얘들아, 그건 너희들의 피같은 피였는데.
#인생에세이#헌혈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