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동 일기36
산비탈로 이어지는 허름한 아파트에 산 적이 있다.
인근에 양계장이 있는지, 뒷길엔 닭을 가득 실은 트럭이 한 두 대 정차해 있곤 했다.
그늘 한 뼘 없는 아스팔트 길 위에서 닭들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본래부터 열이 많은 닭들은 그 창살 사이로 목을 내밀고 구원을 청해 보지만, 지독한 복사열이 목을 핥고 지나갈 뿐 어디에도 구원은 없었다.
창살 밖으로 목을 내미는 놈들은 그래도 아직 생기가 있는 놈들이고, 대다수 닭들은 작게 제작된 창살 속에서 등을 굽힌 채 실신 직전의 삶을 살았다.
성질 급한 놈들은 목부위의 털들을 스스로 뽑아 버리며 열을 식혔다.
닭이나 돼지, 소들을 태우고 지나는 트럭들을 볼 때마다, 창살의 크기를 조금만 더 크게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결국 인간의 먹이가 되기 위해 마지막 죽음의 여행을 하는 중인데, 죽음 이전까지는 그들의 생명도 조금 존중되어야 할 것 같다.
칼바람 부는 추운 겨울이나 폭염이 내리쬐는 한 여름에도, 그 비좁은 창살 속에서 미동도 하지 못하고 붙박은 듯 사진처럼 서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혹자는 치킨이나 삼겹살을 맛있게 먹으면서 모순된 동정을 한다고 나무랄지도 모르겠다.
맞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먹이들에게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네가 죽어 내가 산다는 금언이 마음 깊이 사무친다.
우주의 모든 생명체들이 먹고 먹히며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지만, 그것은 먹이에 대한 존중감을 가져야 할 이유가 될 지언정 함부로 혹사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창살의 높이가 닭의 키를 한 뼘 쯤은 능가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창살의 넓이가 닭이 편히 엎드리고 일어서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간에겐 먹을 권리만 있는 게 아니라, 먹이를 존중해야 할 의무도 있다.
실제 우리는 요리된 닭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며 더러운 곳에 방치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먹이에 대한 감사함이 깊어지면서, 나도 결국은 미생물들의 먹이가 된다는 사실을 부담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수없이 많은 삼겹살을 먹었으므로, 죽은 뒤 내 몸은 돼지들에게 던져줘도 괜찮다고 억지를 부려본다.
닭아, 돼지야, 소야, 낙지야, 고등어야, 갈치야, 사과야, 포도야...모두모두 정말 고맙고 미안해.
네가 죽어 내가 산다.
#동물권#인생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