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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업번역가 Mar 18. 2022

저는 그런 말 안 쓰는데요

번역이 바뀌어 억울한 번역가

좋은 자막 번역이란 어떤 것일까. 당연히 오역이 없어야 할 테고, 등장인물의 발화에 맞춰 적당히 읽을 수 있는 시간 동안 표시되는 기술적인 면도 고려되어야 할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맛’이 살아있는 쫀득한 자막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


영상 번역에는 암묵적인 룰과 업체의 규정은 있지만, 법적으로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건 없다. 그래서 번역가는 각자 세운 기준에 맞추어 번역을 한다. 몇 편의 영상물을 보면서 자막을 유심히 살피면 금방 번역가의 습관을 눈치챌 수 있다. - 이게 은근히 재미있는 한편, 거슬리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거슬린다 - 어떤 번역가는 조사를 분리하지 않는다. ‘우리는’이라는 대사가 있다면 늘 ‘우린’이라고 쓴다. ‘그 애를’을 ‘걔’로 줄이고 ‘걜’이라고 쓴다. 어떤 번역가는 구어에 가까운 번역을 맞춤법보다 우선한다. ‘멍청이야’라는 대사는 ‘멍청아’라고 쓰고, ‘~하는구먼’ 대신 ‘~하는 구만’을 쓴다. 어떤 번역가는 굉장히 짧은 글자 수도 과감하게 줄 나눔을 한다. 번역가마다 습관은 다양하다. 대부분은 긴 문장을 가급적 짧은 글자 수 안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전달하기 위해 신경 쓰다 보니 붙어버린 습관이다.


나 역시 습관이 있다. 어디선가 자막을 보면서 ‘거야’ ‘거예요’가 지나치게 많이 나온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아마 내 번역일지도 모른다. 거야 거야 잘할 거야. 본용언에 보조용언을 더한 말도 많이 쓴다. ‘~해’가 아니라 ‘~해 봐’, ‘먹었어?’가 아니라 ‘먹어봤어?’라고 쓰는 식이다. 평소의 언어 습관과도 다르고 오히려 글자 수를 늘리는 번역인데 매번 번역을 해 놓고 나면 이렇더라. 그래서 가끔은 최종 납품 전에 살짝 몇 군데를 고치기도 한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습관이 아닌, 어딘가 꺼려져 손가락을 멈칫하고 마는 습관도 있다. 그래도 마케터로 살아온 기간이 있어서 그런지, 영화 업계에서 일하며 귀동냥한 사건 사고가 많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언어 감수성에 나름 예민하다. ‘나름’인 이유는 유행어를 마음껏 쓰다가 뒤늦게 언어 감수성에 반하는 유행어라는 걸 알면 안 쓰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청불 등급 영화에서는 ‘년’ 욕을 써도 된다지만 ‘놈’도 쓰기 싫다. 성별을 지칭하는 말은 가급적 피한다. 소수자를 지칭하는 말도 피한다. 내가 보기에 불쾌할 수 있는 단어는 자막에 넣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외래어 표기법은 지키고 싶다. 여러분은 그걸 보며 넷플릭스 당했다,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오랜만에 내가 했던 번역 작품을 찾아보다가 후기에서 놀라운 단어를 발견하고 만 것이다. 그것은 바로 ‘OO녀’. 아니, 자자자잠깐만요? OO녀요? 그러니까, 지금 내 번역에, OO녀가 들어간 거예요? ‘O린이’라는 말도 쓰지 않는 바로 이 나의 번역에? 


당연히 내가 한 번역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사와 1:1로 거래하지 않는 한 이런 일은 항상 일어난다. 가끔은 영화사와 1:1로 거래해도 이런 일은 일어난다. 내 번역을 누군가가 고친 거다. 번역을 고치거나 다른 의견을 받는 것에 대해 예민한 번역가도 있지만 나는 상대가 제시한 게 오역이 아닌 이상 그냥 다 수긍하는 편이다. 어차피 다 영화 잘 되라고 하는 일 아니겠어요? 하지만 OO녀는 너무나 충격이었다. 나는 저런 말 안 쓴단 말이야. 엉엉.


한참도 더 전에 납품한 파일을 뒤져 다시 문맥을 찾아봤다. 가슴과 엉덩이가 참 많이 나오는 영화였다. 내일이 없는 10대들이 술과 약을 즐기며 이야기하는 대사에서 저 단어는 등장한다. 나는 ‘~하는 여자’라고 번역했는데, 실제 자막은 깔끔하게 세 글자로 ‘OO녀’가 되어 올라갔다. 자기 잘난 맛에 빠진, 불량한 척하는 10대들이 말하는 모습에는 ‘~하는 여자’보다 ‘OO녀’가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번역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됐다.


영화를 보다가 나의 감수성에 맞지 않은 단어를 발견하는 건 참 불쾌한 경험이다. 어떤 영화는 조연의 대사 중 한 단어가 너무 거슬려서, 지금도 그 영화를 생각하면 그 단어부터 떠오른다. 그런 단어를 어휘 풀에 갖고 있는 번역가에 대한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어휘의 수준이 곧 번역가의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영문 대본을 한글로 바꿀 땐 당연히 내 머릿속 어휘 풀을 사용한다. 그런데, 관객들이 영화를 볼 때도 그럴까? 관객들이 마주하게 되는 건 스크린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이다. 시대에 따라, 등장인물의 성격과 연령에 따라 어미를 맞추어 번역하는 건 당연한 거다. 그렇다면 단어는? 이런, 지금까지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의 기준을 앞세운 나머지, 정말 적절한 번역은 무시해 버린 건 아닐까. ‘말맛’으로만 평가한다면 내 번역은 별 네 개짜리다. 차마 하나라고는 하고 싶지 않은 건 자존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속어 빼면 나름 유머러스한 건 잘 살린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번역을 할 때 언어 감수성을 지키려고 한다. 내가 고결하고 잘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특정 사상을 몰래 내 자막에 심어 관객을 개조하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다. 그냥... 말맛을 위해 ‘젠장’과 ‘맙소사’와 ‘빌어먹을’을 더 적나라한 욕으로 바꾸는 요즘이라지만, 그럼에도 ‘병신’은 쓰지 않잖아. 그런 거다. 등장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불쾌한 단어를 쓰기도 하겠지만, 언어는 계속 바뀌고, 언어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감수성도 계속 바뀐다. 많은 잡음이 있지만 우리 사회의 언어 감수성은 점점 올라가고 있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했던 비속어 뒤에서 상처받는 사람들을 신경 쓸 줄 알게 됐다. 언어를 이용해 일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회의 흐름을 따라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말맛과 언어 감수성 사이에서 계속 고민하고, 유머러스한 자막을 위해 사용한 단어가 혹시 시대에 뒤처진 말은 아니었는지를 검토하는 건 번역가의 숙제다.


그러니까 자막을 보면서 아무리 막장인 등장인물이라도 이런 말은 안 쓸 거 같다,라고 생각된다면 솔직하게 의견을 남겨주시라. 지금 당장의 자막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결국엔 점점 더 다수가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바뀔 테니까. 그리고 진짜 너무 억울해서 다시 한번 말하는데, OO녀는 내가 쓴 번역이 아니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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