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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시현 Jan 02. 2024

가야 할 때.

  작년 연말에는 미안한 마음이 없었다.

  올해, 겨우 한 살 더 먹었을 뿐인데 채용공고를 올렸으니 지원서를 내라는 지도사 선생님의 톡을 보자 갑자기,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 감정은 낯설고 불편하고 거북했다. 거기에는 어쩔 수 없이 슬픔의 빛깔도 묻어 있었다. 더 먹은 나이 한 살과 느껴지는 미안함의 무게는 전혀 비례적이지 않아 부당할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미안한 마음이 덜어지지는 않았다.   


  연말이면 통과의례처럼 치러지는 강사채용은 공공재에 해당하는 기관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라고 했다. 1년에 한 번씩 내야 하는 지원서나 면접은 강사에게도 기관에도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노트북을 켜고 센터 홈페이지로 들어가자 작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공고문과 지원서 양식이 올라와 있었다. 지원서를 열었지만 키보드 위로 쉽게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그래프로 표현한다면 안타까운 교차점이다.  

   미안할 게 전혀 없는 나이 한가운데 전성기라는 게 있었다, 마치 가득 찬 보름달처럼. 하지만 그때는 일에 대한 가치나 소중함을 잘 알지 못했다. 보름이 지나면 하현달로 가는 것처럼 전성기는 지나갔고 나를 원하는 세상의 부름은 어느새 우하향 선을 그렸다. 삶이란 늘 그렇게 엇갈리고 때를 맞추지 못하는 것인지, 그동안 잘 깨닫지 못했던 일에 대한 소중함과 간절함은 어느새 우상향이다. ‘가야 할 때’는 전혀 비례적이지 않은 두 선이 교차하는 지점, 어디쯤일 것이다.

  ‘가야 할 때’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작은 문화센터에 지원하는 젊은 강사들의, 엄청나다 못해 어이없을 지경인 학력을 봤을 때, 코로나 팬데믹을 지날 때, 동료 강사들이 밀려나는 것을 봤을 때, ‘그때’가 멀지 않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테두리 안에 이 ‘미안함’은 없었다.      


  쫓겨나지 않고 ‘가야 할 때’를 알고 가는 사람은 멋지더라. 정말 멋져서 시인은 그 뒷모습에 감탄한 것 같다. 내가 일하는 분야가 아니더라도 ‘가야 할 때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더라. 그런 이에게 결별은 축복에 싸여있고, 청춘은 꽃답게 죽을지라도 그 죽음은 '무성한 녹음과 머지않아 열매 맺을 가을'을 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슬픈 눈을 하고 있는 영혼... 마지막 구절이 마음 아프다.      

  생선과 손님은 사흘만 지나면 악취가 난다. 탈무드의 격언이다. 이형기 시인의 ‘낙화’도 탈무도도 모두 가야 할 때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러 곳에서 가야 할 때를 말함은 때에 맞춰 가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는 것’은 변화시킬 수 없는 사실이다.

  낡은 것은 새로운 것으로 쉼 없이 대체되어야 한다. 세상이 늘 변화와 혁신을 원하는 것은 이 세계의 지속성을 위한 본능이다. 답이 쉽다. ‘가는 것’은 이 세계에 대한 배려고 지속성을 위한 헌신이다. 나도 물러난 누군가의 자리를 받은 것이고, 이 자리를 받는 누군가도 때가 되면 다시 물려주어야 한다. 그 사이 이 자리는 더 풍성해질 것이고 더 많은 선한 결과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교과서 같은 정답을 부인할 도리는 없다.      


  그런데

  언제 가야 할까? 그것은 주관적일 수도 있지만, 마냥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손님은 사흘 안에 가야 한다. 하루 만에 갈 수도 이틀 만에 갈 수도 있지만, 사흘을 넘기면 안 된다. 시한을 넘기게 되면 그때부터는 악취가 나고 사람들의 질시를 받아야 한다. 세상은 인정사정없이 야멸차다.      


  그래서

  ‘지금' 가야 한다. 아직 능력이 있다고 인정받을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이 아쉬워할 여지가 남아 있을 때, 아직은 아니라고 말할 때... ‘지금’

  물러남은 완성이 아님으로 항거할 수 없는 세상과 소멸해 가는 자신에 대한 인정, 소중하고 아까운 것들을 내려놓는 마음의 험한 공사가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지금’은 변할 수 없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런 마음을 이야기했을 때 그들의 말은 하나 같았다. 무슨 소리야? 쫓아낼 때까지 버텨야지... 그럴 수 없었다. 때를 놓쳐 쫓겨난다는 것은 왠지 이곳에 들인 12년 세월에 대한 욕지거리 같았기 때문이다.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야 할 때 가는 것이다. 나는 가기로 했다...


  이곳에서 삶이 버거운 아이들을 가장 가까이 만났었다. 방송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가진 아이들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이제 다문화시대에 산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고, 다문화 뒤에 숨어있는 음지와 양지를 보았다. 어떤 경우, 부모나 피붙이보다 나라가 더 고마울 수 있다는 것도 이곳에서 알았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자치단체장 상을 내게 수여한 곳이기도 했다.   나는 여기서 알곡 같은 서사를 많이 받았다. 내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선물 같은 그 고마움에 아무런 생채기를 내지 않고 마무리 인사를 할 것이다. 내 삶의 한 장도 접힌다...      

 


  뜻밖의 행운, 나는 2024년 수업을 하기로 했다. 센터에서 원하는 조건을 갖춘 강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외의 수업일뿐 ‘때’가 변한 것은 아니다. 행운으로 얻은 1년, 마음이 설렌다. 마치 처음 하는 수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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