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픽, 어디서 듣기는 했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는데,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다가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fan fiction. 그런 장르를 생각해 낸다는 것도, 그런 조어를 만들고 또 줄여서 쓴다는 것도 내게는 신기하기만 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대학원에서 논문을 준비하는 둘째의 말에는 영어 단어가 점점 많아진다. 어떤 때는 조사 정도만 우리말을 쓰는 것 같기도 해서, 나는 자주 인상을 찌푸렸다.
세미나나 수업의 대부분이 영어로 진행이 된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영어 사용이 익숙해서 가끔씩 오는 집에서도 영어가 튀어나온다고 나름 변명을 했다.
어쨌든 나는 종종 아이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 활자로 보면 아는 단어임에도 아이의 입에서 우리말과 뒤섞여 자연스럽게 나오면 생소하게 느껴졌다.
고 또래들이 쓰는 말은 더욱 알아들을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스포’ 같은 것.
지금은 다행히 그 의미를 알았지만, 팬픽이나 스포를 알지 못했던 때 그 말을 들었다면 나는 내 상식선에서 적당히 의미를 짐작했을 것이다. 내가 짐작한 의미가 실제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을 것은 분명하다. 스포를 어쩌면 스포츠의 줄임말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스포라는 어휘를 스포츠의 줄임말로 알고 사용한다면, 스포일러의 줄임말로 스포를 사용하는 사람과는 소통이 되지 않을 게 분명하다. 두 단어는 우연히 소리값이 같을 뿐이니.
소리값은 같지만 이렇게 의미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관계가 있다.
친구라면 말이 안 통하는 사이일 테고, 가족이라면 불화가 많은 집이다.
그 대상이 조물주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내가 한 일 중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이유가 한 가지일 수 없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언어의 다름이었다. 하나님의 언어와 내 언어는 달랐다. 지독히 달랐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고, 몰이해에서 오는 갈등은 수렁처럼 이어졌다.
구세주를 보내주신다고 하신 하나님은 약속대로 구세주를 보내주셨다. 그 사회, 을 중의 을로 말이다. 당시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에서 백성들이 정치적으로 강력한 구세주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불행히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세주는 서로 다른 의미였다.
나는 어쩌자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공감이 가는 걸까...
뭘 믿으라는 건가?
믿음은 기독교에서 가장 큰 선이지만, 믿음이 거론되는 상황이 늘 같지는 않았다. 현실에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죽으면 천국 갈 것을 믿으라는 건가? 내 기도를 다 들어주실 것을 믿으라는 건가? 믿음은 현실 앞에서 너무 초라했다.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전적으로 믿음의 부족인가? 부족하지 않은 믿음의 크기는 얼마쯤인가? 그건 또 어떻게 아나? 너무 불공정했다.
하나님만 유리한 게임이었다.
하나의 신이 있는데, 그는 악마다-는 철학자의 책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그 책을 덮었다. 하나님이 악마일 수는 없었다. 그건 내 믿음이었다.
간절히 원했지만, 결국 갖지 못했다.
만약 내 아이가 내가 줄 수 있는 어떤 것을 간절히 원한다면 나는 주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과 생각을 존중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그가 싫다는 것을 굳이 강요하지 않는 것이 내게는 사랑이었다. 사랑은 회개를 강요하거나 상대방의 전적인 굴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키에르케고르에게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나님의 사랑과 나의 사랑은 그저 소리값이 같을 뿐 완전히 다른 언어였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그 어려운 사랑 앞에 절망은 당연히 나의 몫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는 않으셨지만, 복은 주시겠지. 주신다고 했으니...
나에게 복은 성취였고 성공이었다. 절대자의 복이라면 인생에서의 성공쯤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 또한 오해였다. 내가 원하는 것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 앞에서 하찮았다.
나는 늘 하찮은 것만 원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넓고 커서 그 따위 하찮은 것들을 허락하실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다른 것을 주셨다.
상처와 고통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애통함과 하나님만을 향한 간절함, 피조물이 있어야 하고 지켜야 할 자리에 대한 자각을 주셨다. 하나님의 복은 그런 것이었다.
언어가 이토록 다른 데 하나님과의 동행이 결코 쉬울 리 없다. 이건가 하면 저거고 저건가 하면 이거였던 적이 많다. 이성과 합리성을 기준으로 내린 결정들이 후에 보면 회개의 제목이 되었던 적은 부지기수다.
나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니 도달하게 되었다가 맞다.
나의 언어를 버리기.
‘나는 그들(유대인)이 왜 하나님을 부정하고 신앙을 버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 전쟁에, 이 아우슈비츠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결과지 하나님이 하신 게 아니다’
저자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었다.
히틀러치하와 특히 아우슈비츠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부정하며 신앙을 버린 유대인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저자는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고 담담히 말한다.
저자의 말이 책을 읽을 당시에는 너무 충격이었지만, 어느덧 이해가 되었다. 그것은 사람의 언어를 버리고 하나님의 언어를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의 자연스러운 고백이었다.
코로나 19는 언제쯤 사라지려나? 대다수 기독교인에게는 언제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와 동의어다. 한쪽에서는 제삼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예배를 닫아야 한다 하고 다른 쪽에서 강제로 예배를 닫는 건 종교탄압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뿐인 생명을 위해 예배를 닫지만, 그 예배를 위해 생명을 기꺼이 버린 이들도 있다.
사람의 언어로는 예배드리는 것이 악이 되어버린 잿빛 시간, 이 잿빛을 깨뜨리는 건 결국 하나님의 언어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