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이 되고 싶었던 나의 지난날 이야기
얼마 전 남편이 내게 말했다.
"자기는 '버터 칼'로 태어났는데 그걸로 고기를 썰고 싶어 하니까 그렇지.
'버터 칼'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거기에서도 행복이 있는 거야. “
뭐? 내가 버터 칼이라고??
그렇다. 난 언제나 버터칼로 태어나서 고기를 썰고 싶어 했고, 푸들로 태어나서 도베르만을 꿈꿨다.
경차로 태어나서 람보르기니의 속도를 쫓겠다고 모터에 불이 나는 줄도 모르고 달렸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행복하고, 뱁새는 뱁새로 살아야 행복한데… 내 주변에는 온통 갈잎뿐이었고, 같은 뱁새는 없고 황새들만 가득했다. 그러니 뭐 어쩐담. 짧은 다리로 부지런히 뛰어야 낙오가 안 되는걸.
주변 사람들은 언제나 나를 보고 이렇게들 말한다.
"뭘 그렇게까지 잘하려 그래~ 적당히 해~"
언뜻 듣기엔 꽤나 일을 잘 해내는 독하디 독한 완벽주의자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나의 실상은 완벽주의자가 아닌
"지독한 평균주의자"였다.
너 뭐 돼? 아니. 나는 그냥 평균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잘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이라도 가려면 그렇게 달려야 하는 사람이 있는 거다.
이를 증명하듯 딱히 대단한 성과를 낸 건 없었다. 그저 평범하고 고만고만하게 해 왔다. 남들은 스테이크를 두어 번의 칼질로 금방 써는 일들을 나는 수십 번의 칼질로 고기에 자국만 내는 그 정도의 성과. 하지만 그게 나에겐 나름 최선을 다 한 결과였다.
버터칼로 스테이크 한번 썰어보겠다고 고군분투하던 2~30대. 덕분에 나름 안정적인 직장과 주렁주렁 긴 가방 끈, 똑똑하고 멋진 친구들을 얻었다.
하지만 못 오를 나무를 한참 쳐다보다가 더 낮아진 자존감과 습관적 자기 비하, 끊임없이 주변과 나 자신을 비교하다가 깊어진 만성 우울증은 나를 오랜 시간 갉아먹었다.
정신 상태와 경쟁이라도 하듯 허약한 몸뚱이도 자주 내 발목을 잡았다. 바짝 달려야 할 때 조금만 무리하면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몸이 축났다. 하지만 피곤해도 일에서 손을 놓지를 못했던 이유는 적어도 남들이 욕하지 않을 정도로 하고 싶어서였다.
정확히는 내가 그렇게 아등바등 기를 쓰고 한 결과가 이만큼밖에 안 된다는 것을 감추고 싶어서였다. 혼자 텅 빈 연구실에서 밤샘 작업을 해도 친구들에게 집에 들어간 척하기도 하고, 엄청 오랜 시간을 공들여서 문서를 작성했음에도 근무시간 안에 빠르게 작성한 문서인 것처럼 시치미를 뗀 적도 있다.
그 덕에 사회적으로 나는 일 잘하고 똑 부러지는 사람으로 이미지 메이킹이 되었다. 대신 몸은 계속 고장 나고 내 정신은 약으로도 우울감이 제어가 안 될 만큼 지하 땅굴로 들어갔다.
결국 몸이 계속 고장 나면서 강제적으로 멈추게 되는 시간들이 찾아왔다. 잠깐 멈춰 서니 그제야 ‘내가 그렇게 도달하려고 했던 그 평균이라는 것이 뭘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 평균이라는 것은 누가 정한 것일까? 나는 어떤 기준의 잣대에 나를 맞추려고 기를 쓴 것일까? 겉보기엔 안정적으로 보여도 속은 텅 비어있는 이런 인생을 언제까지 계속 살 수 있을까?
문제는 나였다. 끊임없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하고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함을 모르는 것. 어떤 척을 하느라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 주변 상황은 늘 똑같았다. 이 지옥은 결국 나의 마음 가짐이 만든 것이었다.
나의 글은 나처럼 뛰어나지 않은 사람도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누군가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성공담이 아니다. 그러기엔 난 여전히 흔들리는 중이다.
이 글은 그저 세상의 엄친아들 사이에서 혼자 애쓰다 지쳐버린 나에게 ‘지금의 너 자신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새로운 주입식 교육이다.
아무리 부족하고, 느려도, 주변에 뛰어난 사람들이 많아도, 그 어떤 코스프레도 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받아들이자고.
그리고 난 다시 남편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무슨 칼인데?"
"나? 음… 난 과도 정도는 되지."
쩝. 제법 객관적인 평가인 듯하다.
과도는 오늘도 내가 버터칼이어도 좋다고 말해주고 있다. 과도 덕분에 오늘도 버터칼은 흔들리는 정신줄을 다시 한번 붙잡는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