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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치동 1대 전기세 키즈였다

강남 8학군에서 중하위권으로 산다는 것

by 버터나이프 Mar 24. 2025

'전기세 키즈'. 요즘 영어 유치원을 보내려는 학부모들 사이에서 생겨난 신조어인 듯하다. 영어 유치원에서 뛰어나게 잘하는 2~3명 빼고 나머지 아이들은 학원의 전기세를 내주는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뭐야. 나잖아…?
그렇다. 내가 바로 그 옛날 20년 전부터 존재해 온 '대치동 전기세 키즈'였다. 30년도 더 전에 나름 그 당시에 흔치 않았던 영어 유치원(지금 영유에 비하면 단순히 영단어를 가르치는 수준이었겠지만)을 다녔으나 현재 외국인을 만나면 '아하하.. 아임 파인'을 내뱉는 갑갑한 영어를 구사하고 있으며, 대치동 학원가와 비싼 독서실에서 꾸벅꾸벅 졸면서도 학원비는 성실히 납부해 준 기부 천사! 그게 바로 나다.

'전기세 키즈'가 어른이 되었더니 '스테이크를 썰고 싶은 버터칼'이 되었다. 가지지 못한 것만 바라보다 정작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깨우치지 못한 그런 사람 말이다.  


내 주변엔 항상 엄친아들이 많았다. 공부도, 체력도 남다른 애들. 나는 항상 그들 사이에 병풍처럼 존재했었다. 뭔가 특별히 잘하는 것은 없으나 특별히 못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

하지만 여기가 어디인가. 엄친아들의 비중이 높으니 그저 그런 어중간한 존재는 자동으로 중하위권에 배치된다. 이때부터였을까. 평균이라도 되고 싶다는 내 열망이 강하게 자리 잡은 건. 공부를 돋보이게 잘하지 않는 나 같은 학생은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전기세를 내주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이런 나의 싹수(?)를 보고 감을 잡았던 우리 엄마는 여느 대치동 학부모와는 달리 학원을 추천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연한 불안함과 두려움에 내가 졸라서 학원 보내달라고 떼를 써서 꾸역꾸역 학원을 갔다. 대치동에 학원 보내려고 이사까지 오는 동네인데, 학원 보낼 필요 없다는 학부모와 학원 보내달라는 학생이라니..

그러나 난 역시 엄마의 예상대로 학원에서 크게 얻은 것이 없었다. 열심히 수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제대로 소화하며 들었던 수업은 없었다. 단지 알아듣는 '척'을 했을 뿐.






왜 나는 모르는 것을 티 내지 못하고 마치 다 알아듣는 척 고개를 끄덕였을까?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우등생 코스프레가 시작된 것 같다. 그럭저럭 평범했던 나는 우리 엄마보다 친구 엄마들 등쌀에 못 이겨 학원을 다녔다. “지금 내버려 두다가 다 놓친다, 어디 어디를 보내라” 등등. 그중 다행히 레벨테스트는 적당히 쳤었는지 당시 메이저 학원의 특목고 준비반 이른바 '경시반'에 들어갔고, 그게 마치 내가 이 동네에서 마냥 멍청이는 아니라는 증명처럼 의기양양하게 다녔다. 초등생의 특목고 준비반. 그것이 이 동네에서 평균은 된다라는 증명 중 하나 같았다.



멍청이는 아니라는 기쁨도 잠시, 경시반에 들어감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멍청이가 되었다.

다들 이 어려운 것을 어찌나 잘도 풀던지, 수업 시간마다 쓱 둘러보면 날 빼고 다른 애들은 문제 풀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던 애는 나뿐이었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쭈뼜대는 순간 선생, 학생 할 것 없이 '뭐지? 얘는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지?'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눈빛들이 오갔다.


열 명 중 혼자 못 따라가는 사람이 되는 것은 항상 나를 주눅 들게 했다. 그렇지만 그런 학생에게 특별한 케어는 없었다. 그 특별한 케어라는 것은 잘하는 애들을 위한 것이었다.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도 나 같은 애가 어디서 어떻게 허덕이고 있는지 그들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저 지지부진한 애가 우리 반 진도에 영향만 안 주면 그만일 뿐.


공부라는 것이 작은 성취감에서부터 점차 흥미가 붙는 건데, 따라가지도 못하는 수업에 어정쩡하게 붙어있다 보니 점점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나는 경시반에 다니는 내내 겉으로 아는 척하는 것만 늘어갔다. 마치 여기에 잘못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나는 계속 공부에 흥미를 잃어갔고, 체면치레하느라 내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채 시간은 잘도 지나갔다.

 





난 늘 공부에 있어서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진 택배 상자처럼 가만히 있었다. 일단 외우라면 외우고, 넘기라면 넘겼다.


그러던 와중, 어이없게 대학 수시에 합격했다. 모두가 쓰는 수시 가만히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어 딱 한 군데 질렀는데 덜컥 조건부 합격이 된 것이다. 그때 당시 질러본 것에 의의를 뒀었기에, 얻어걸린 합격은 준비가 안 된 나에게 기적적인 행운이면서 동시에 감당이 안 되는 복이었다.

행운도 준비가 잘 되어있는 자에게 찾아오는 것이지 학원에서 가르친 스킬만 때려 넣은 내가 논술 잘 봤다고 수능 2등급 3개를 안정적으로 받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수시를 붙은 것이 내 헛된 희망만 더 부풀리게 해 줬다. 한 번도 학교에서 주연인 적 없었는데 갑자기 논술이 붙으면서 반짝 주연이 되었다. 선생님도 수시가 붙고 나니 관심을 보이셨고, 엄마 아빠도 갑자기 나에게 희망을 가졌다. 그럴 수밖에. 생각지 못한 학교를 반쯤 붙었다는 소식을 듣는데 없던 희망도 생길 수밖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미 합격생으로 취급받았다.


그 뒤로 나는 수능 2개월 앞두고 벼락치기 고액과외를 받으며 그야말로 돈지랄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다신 없을 행운을 놓칠 수도 있다는 부담감과 기대. 한편으로는 고액과외까지 시켜주면서 무리하는 엄마아빠를 보면서 부담감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수능. 내 주력과목 3개만 확실하게 보자는 전략이었다. (이런 바보 같은 전략이..) 그러나 주력과목이 아니었던 1교시를 두 달간 아예 손을 놓았던 나는 시험장에서 간만에 마주한 시험지를 보고 꽤나 당황했다. 그 덕에 처음부터 시간 배분을 잘못해 마구잡이로 밀려 쓴 내 OMR카드를 내며 정신줄도 같이 내버렸다. 그 뒤로 눈물로 적신 시험지에는 아무 숫자도, 문자도 들어오지 않았고 그야말로 시험을 말아먹었다.



고3 수능 이후, 나는 학교에서 초등학교 경시반 때와 같은 느낌을 느꼈다. 수능을 망쳤다고 어두운 기운을 내뿜으며 말했지만 그게 수시 합격이 떨어진 것을 뜻할 거라고 생각해주지 않았다. 왜? 우리 학교에서는 그런 일이 있기 힘드니까. 그런 멍청한 짓을? 마치 경시반에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했을 때 모두가 쳐다보는 그 의아한 눈빛과 같았다.



그렇게 나에게 행운이라 생각되었던 것들이,

계속 내가 나로 살지 못하게 되는 순간들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첫 번째 깊은 동굴에 들어갔다.

여전히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지 못하는 상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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