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공간이라는 착각

식힘망에 가장 많이 데인다더라고

by 박혜림


감정이 없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유튜브 알고리즘에 성인 ADHD 증상에 대한 영상이 떴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보다가, 어느새 다시 돌려보고 있었다
산만함, 충동성, 번아웃.
그건 요즘 내 얘기였다.


유전적 영향이 크다는 말이 나왔다.
그 순간, 예민한 큰아이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나 때문일까?'
생각이 한 번 박힌 뒤로, 안 좋은 상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날 밤, 인터넷을 몇 시간 뒤졌다.
성인 ADHD, 우울증, 유전 가능성
검색창에 켜켜이 쌓인 기록들이 내 마음 같았다.
정신과 예약 버튼을 누르기까지 한참을 망설였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몇 번이고 멈췄다.


병원에 가는 날 아침까지도 망설였다.
정신과 진료 기록이 남으면 보험 가입이 어려울 수 있다는 글이 자꾸 떠올랐다.
그래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진료는 차분하게 진행됐다.
담담하게 내 이야기를 꺼냈다.
생각보다 말이 많아졌다.
한참을 이야기하고 나니, 숨이 찼다.


검사지를 숙제로 받았다.
주의력, 불안, 우울 정도를 체크하는 설문지들이 쌓였다.
그중 '현재 느끼는 감정을 적어주세요'라는 질문 앞에서 손이 멈췄다.


내 기분은 無, 없다.


기쁨도, 슬픔도, 감동도 없이 텅 비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뭐라고 써야 하나.
빈칸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뒤 결과를 들으러 갔다.


'상세불명의 우울 에피소드.'
'공황장애 병력이 없는 광장공포증.'


수년간의 합가 동안,
내가 가장 불안을 느끼는 공간은 '집'이었다.


그때 알았다.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집이라는 공간에서


나는 마치 식어버린 반죽처럼

더 이상 부풀지 못한 채,

속부터,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버터가녹는온도 #감정서사 #폐업후기록 #엄마창업 #일상의균열

#이상증세 #워킹맘스트레스 #몸의신호으면웃으면서 망해가는 중이었다서 망해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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