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버터가 녹는 온도

by 박혜림


심리 상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뉴얼을 읽듯 말하는 상담사의 입에서

어릴 때 상처가 어쩌고 하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병원을 끊었다.

약도, 진료도, 안녕도 없이.


그 후로는 적당히 멀쩡한 척,
적당히 타협하면서
집과 가게 일을 병행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가맹점 한 곳에서
임의로 상호명을 바꾸고
개인 사업을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계약 기간도 남아 있었는데,
원리원칙대로 계약 조항을 설명하자
욕지거리가 되돌아왔다.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계약서를 들고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누가 봐도 명백한 위약 사유라는 말에
당당히 소장을 제출했다.


하지만 재판은 2년이나 이어졌다.

1심은 부분 승소.
2심에서는 위반 사실이 모두 인정됐지만,
계약서 속 위약금 조항이 과도하다는 이유로

계약 자체가 ‘불공정’으로 뒤집혔다.


법적으로 약속을 어긴 건 맞지만
벌을 받기엔 좀 과하다.
그게 결론이었다.


인생에서 아끼지 말아야 하는 돈이
변호사 선임비였다는 걸
처절하게 실감한 순간이었다.


2년의 시간과
2천만 원의 돈이
그렇게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결말은
내 몸과 마음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늘었고,

무기력은 천천히 삶 전체로 스며들었다.


수업도 예전 같지 않았다.
손끝 감각은 무뎌졌고,
크림은 멋대로 흘러내렸다.


“그냥 다 잊고 정리하자.”
남편의 말은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내 안에 고여 있던 감정들은

잊는다고 해서 사라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가게 문을 닫고, 커튼을 치고,
주방 뒤에 조용히 앉았다.


해야 할 일이 빽빽하게 적힌
뒤죽박죽 일정표를 들여다봤다.
다음 주는 녹색어머니 봉사도 있어서
수업 시간을 조정해야 했다.


고개를 돌리니,
내일 쓸 케이크 시트를 만들기 위해 꺼내놓은
버터 한 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오전 작업 후 상온에 꺼내둔 채
하루 종일 그대로였다.

냉장고에서 꺼냈던 모양 그대로.


손으로 살짝 눌러보니,
순식간에 부드럽게, 허무하게
크림처럼 무너져 내렸다.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버터가 녹는 온도는 생각보다 낮다.
온도 몇 도 차이에
모양도, 성질도 완전히 달라진다.


나도 그랬다.


테이블 안쪽 서랍을 열었다.
오래전 넣어두었던 약봉투가 손에 닿았다.
그리고,
하나씩 봉지를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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