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자 메이 올컷, 『작은 아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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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원작 소설을 본 사람은 이미 다 알겠지만 조와 로리는 서로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어렸을 적 앞부분만 축약해놓은 책을 읽었던 나는 강경 조&로리파로 성장했고, 늘 그 둘이 세상에 둘도 없는 연인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작가는 무슨 압력이 있었는지, 심술이 생겼는지 후반부에 그 둘을 인정사정없이 찢어버리고는 서사가 한참 부족한 다른 인연을 만들어냈다. 나는 이에 규탄하여 내 마음속 연인을 기리고자 '조, 로리, 테디!'를 쓴다.
이 소설은 메그, 조, 베스, 에이미 네 자매와 그들을 둘러싼 이웃들의 성장과 연애, 결혼과 가정을 다루었다. 네 자매 중 과연 누가 훌륭한 이웃 로리와 사랑에 빠질지는 이 소설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초반에 작가는 공평하게도 넷 모두에게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어머나 세상에! 누가 보낸 거야? 네게 애인이 있는 줄 몰랐지 뭐니.."
다들 호기심과 놀라움에 사로잡혀 탄성을 지르며 메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편지는 엄마가 보내신 거고 꽃은 로리가 보낸 거야."
메그는 말은 간단하게 했지만, 로리가 잊지 않고 꽃을 보내준 데 대해 무척 고맙게 생각했다.
루이자 메이 올컷, 『작은 아씨들』, 강미경 옮김, 알에이치코리아(2020), 183면
"옛날에 어떤 여자애가 있었는데요, 음악에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도 본인은 그 사실을 몰랐어요. 혼자 있을 때 그 애가 작곡한 곡들을 들어보면 얼마나 달콤한 느낌이 드는지 모르실 거예요. 하지만 그 애는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어요."
"나도 그 사람과 알고 지내면 많은 도움이 될 텐데. 난 너무 둔하거든요."
로리 옆에 서서 열심히 귀를 기울이던 베스가 말했다.
"너도 아는 사람이야. 누구보다도 많은 도움이 될 거야."
로리가 장난기 가득한 검은 눈으로 쳐다보자 베스는 뜻하지 않은 발견에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소파 방석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151면
"네가 마치 대고모님 댁에 가면 내가 매일 들러서 산책을 시켜줄게. 그리고 즐겁게 놀다 오는 거야, 어때?… 내가 매일 들러서 베스 소식을 알려주기도 하고, 같이 놀러 다니기도 하면 지루하지 않을 거야."
…(중략)…
"그럼 퍽이 모는 마차에 태워서 데리고 나가줄 거야?"
"신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할게."
"그리고 날마다 와줄 거지?"
"두고 보면 알 거 아냐."
"그리고 베스 언니가 좋아지는 대로 데리러 올 거지?"
"그길로 달려갈게."
"그리고 극장에도 데려갈 거지?"
"열두 번이라도 갈 수 있어."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369-370면
로리는 다정한 성격이라 그들 모두와 친절히 지냈으나, 로리와 가장 가까운 것은 다름 아닌 조였다. 둘은 닮았기에 서로를 잘 이해했다. 조와 로리는 오래되고 구체적이어서 아름답기까지 한 서사를 공유했다. 이는 이 소설에 등장한 다른 어느 연인들도 따라갈 수 없다.
"처음부터 널 사랑했어, 조.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724면
그사이 그녀의 새 친구는 가장 아름다운 꽃들만을 한 아름 꺾어 묶더니 조가 좋아하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께 갖다드려. 그리고 보내주신 약 매우 감사하다는 말도 전해줘."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120면
"내 생각엔 블라망주를 두고 한 말인 것 같은데."
"넌 애가 왜 그렇게 둔하니. 그건 너를 두고 한 말이야."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124면
처음부터 로리는 조를 호의적으로 생각했다. 로리가 조를 좋아하는 걸 가족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였다. 로리는 자신의 사랑을 굳이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누구를 가장 좋아합니까?" … "물론 조예요."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275면
그녀는 다시 우는 대신, 뜻밖의 소식에 적잖이 당황한 듯 발작하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친구에게 매달렸다.
로리는 무척 놀랐지만 침착하게 행동했다. 그는 한동안 조의 등을 토닥이다 그녀가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자 한 번인가 두 번쯤 수줍게 키스했다.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384면
"로리, 넌 천사야!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하지?"
"다시 한번 안겨봐. 난 좋던데."
로리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385면
둘은 서로를 잘 아는 만큼 상대방의 말에 잘 속지도 않았다. 아래 대목에서 조는 자기가 가장 갖고싶은 걸 구해주고 싶어하는 로리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로리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 거짓말했다는 조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가장 갖고 싶은 건?"
로리가 말했다.
"구두끈."
질문하는 사람의 속마음을 알아챈 조가 대답했다.
"그건 솔직한 대답이 아닙니다. 정말 가장 갖고 싶은 걸 말하세요."
"천재성이에요. 왜, 구해 주시게요?"
조는 실망하는 로리의 얼굴을 보며 짓궂게 웃었다.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94-95면
그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했다. 조는 자신이 힘들 때 스스럼없이 로리에게 기대었다. 로리는 언제든 조가 기댈 수 있도록 버팀목을 자처했다.
굵은 눈물방울이 가엾은 조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조가 어둠 속을 더듬어 찾듯 힘없이 한쪽 손을 내뻗자, 로리가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목멘 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있잖아, 나한테 기대, 조!"
그녀는 뭐라고 말을 하진 못했지만, 로리에게 '기댔다'.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381면
"하지만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 내가 그리 훌륭한 위인은 못된다는 거 나도 알지만, 평생 네 곁에 있을게. 맹세해."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477면
그리도 잘 어울리는 둘이 어째서 함께하지 못한 걸까? 사랑은 타이밍, 사랑은 빌어먹을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로리의 시계는 조의 것보다 빨랐다. 그의 사랑이 이미 성숙했을 때 조는 첫발조차 디디지 않았다. 메그 언니가 결혼하자 조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매우 싫어하기까지 했다. 조에게 결혼은 가족들을 떼어놓는 슬픈 일이거나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께 메그의 결혼을 지켜본 로리는 달랐다. 로리는 조와의 앞날을 조금씩 그려나가고 있었다.
"메그 언니 결혼 때문에 다들 제정신이 아닌가 봐. 애인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는 그만했으면 좋겠어. 화내기 싫으니까 주제를 바꾸자."
그의 기분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리는 길고 낮은 휘파람으로 위안을 삼더니 대문에서 헤어질 때 무시무시한 예언을 내뱉었다.
"내 말 명심해, 조, 다음은 네 차례야."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504-505면
"로리, 너도 이런 게 부럽거든 그 집 딸들 중에서 아무나 한 명 고르도록 해라. 그럼 이 할아비는 아무 불만이 없을 테니."
로런스 씨가 떠들썩한 오전을 보낸 뒤 안락의자에서 휴식을 취하며 말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할아버지."
로리는 조가 단춧구멍에 꽂아준 조그만 꽃 장식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다 말고 웬일로 고분고분 대답했다.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517면
어이없게도 조는 로리가 자길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며 뉴욕으로 떠나버린다. 나 참, 자기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자길 좋아한다고 걱정하며 이사까지 가는 사람은 머리털 나고 처음 본다.
"아무래도 로리가 절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요.… 뭔가 일이 터지기 전에 떠나있는 게 좋겠어요."
…(중략)…
"이래도 소용없어, 조. 내 눈은 널 향해 있으니까. 그러니까 처신 잘해. 안그러면 내가 가서 널 집으로 데려올 테니까."
로리가 작별 인사를 하며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664, 668면
로리는 조가 자기를 피해 도망치는 걸 알지만 화를 내지 않는다. 성장한 청년 로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오히려 이전에 조가 했던 말을 마음에 새겨 열심히 공부한다. 조가 '대학을 마칠 때까지는 기다리면서 몸과 마음을 준비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로리는 우등생이 되어 졸업식에서 연설도 했다.) 그가 머리를 기른 것도 조를 위해서이다. 그녀가 로리를 부르는 이름 '테디'는 오로지 조에게만 허락된 이름이다. 그가 손가락에 낀 유일한 반지는 오래전 조의 선물이다. 자신의 이름, 머리칼, 머릿속에 든 지식까지 전부 로리는 조에게 바쳤다.
"있잖아, 테디, 정 기분이라도 내야겠다면 네가 존중하는 그 '예쁘고 참한 여자들' 중 한 명에게 헌신해봐. 괜히 멍청한 여자들에게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내가 정말 그러길 바라?"
그러면서 로리는 걱정과 즐거움이 뒤섞인 기묘한 표정으로 조를 바라봤다.
"당연하지. 하지만 대학을 마칠 때까지는 기다리면서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 넌 아직 반도 못 미치니까. 누가 됐든 그 참한 아가씨에 비하면 말이지."
조가 어떤 이름이 튀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수습하고는 역시 기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긴 하지!"
로리가 평소 같지 않게 겸손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내리깔더니 멍하니 조의 앞치마 술을 손가락에 돌돌 말며 순순히 인정했다.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659면
네 마음에 들려고 열심히 공부했고, 당구든 뭐든 네가 싫어하는 건 전부 다 끊고 불평 한마디 없이 널 기다렸어. 네가 날 사랑해 주기를 바랐으니까. 난 아직 반도 넘게 부족하지만……."
여기서 로리는 걷잡을 수 없이 다시 목이 메는 바람에 미나리아재비의 목을 부러뜨리면서 '망할 놈의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724-726면
이후 조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청혼을 거절하자, 로리는 아직 조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함께할 수 있다고 우기기까지 한다. 그는 조 앞에서 일말의 자존심까지 모두 버리고 매달렸다. 유럽으로 떠나는 그날까지 다시 한번 뒤돌아 애원했다. 조가 끝끝내 거절하자 그는 더 이상 조를 괴롭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괴롭혔다.
"아, 테디,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그래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내 목숨이라도 내놓고 싶어! 난 네가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사랑하지 않는데 억지로 사랑할 수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중략)…
"가끔 그런 사람들도 있어."
기둥 쪽에서 숨죽인 목소리가 대꾸했다.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727면
실연당한 로리의 기억 속에 조는 씁쓸하게 남아 있다. 둘이서만 주고받던 다정한 말과 시간은 사라지고 로리의 기억 속에는 자신을 밀쳐내는 모습뿐이다.
"헤이스를 시켜 멋진 꽃 몇 송이만 여기 행사장으로 보내주는 친절을 베풀면 내가 평생 축복해 줄게."
"지금 해주면 안 돼?"
로리가 뭔가를 암시하듯 뻔뻔하게 나오자 조는 얼른 로리의 면전에 대고 문을 쾅 닫고는 철창 사이로 소리쳤다.
"어서 가, 테디, 나 바빠."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617면
"조 언니가 지금 이런 오빠를 보면 뭐라고 할까?"
에이미는 로리에게 자극을 주려고 자기보다 더 활력이 넘치는 언니의 이름을 들먹이며 성마르게 물었다.
"평소처럼 '가, 테디, 나 바빠!' 하겠지."
로리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웃음소리는 자연스럽지 않았고 얼굴에는 그늘이 스쳤다.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805면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조의 머릿속이다. 만일 로리가 유럽 여행에서 돌아와 자신에게 다시 청혼을 했다면, 사랑이 아닌 외로움 때문에 청혼을 받아들였을 거라며 조는 둘이 이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가 사랑에 눈을 뜬 가장 큰 계기가 바로 외로움이다. 모두들 제 짝이 있고 자신은 남겨졌을 때 조는 혼자라고 느꼈고, 그때 조에게 접근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인물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심지어 어느 남자든지 로리와 비교하곤 했던 평상시 조의 습관마저 버려둔 채로.
작가는 처음에 조를 자신처럼 독신으로 남겨두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소설 속 조는 독신주의자라기보다는 아직 사랑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삶이 가족과 친구들, 글쓰기로 이미 충만했기 때문이다. 조는 자신과 함께할 반려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적절한 때에 로리와 교류했더라면 조는 로리와 결혼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둘이 잘 안 어울린다니! 이는 당대의 사고방식, 즉 좋은 집안의 아내는 모름지기 사교 생활을 잘하고 성심껏 내조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통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가장 가까운 친구,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존재야말로 영혼의 단짝이다.
로리의 말과 행동, 그의 시선과 노력을 다시 살펴보니 마음이 아프다. 후반부에서는 자꾸만 슬픔이 분노로 바뀌는 바람에 읽기 힘들었다. 에이미와 조의 남편이 밉기까지 했다. 가끔은 낯설 만큼 변해버린 조와 로리도. 수없이 많은 로리의 구애에 조가 한 번이라도 답할 수 있었다면. 그의 손을 잡고 '귀여운 로리, 나도 널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그 한순간만 주어졌다면 그들은 영원히 함께였을 것이다.
작은 아씨들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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