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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Dec 04. 2021

『작은 아씨들』의 빛과 그림자

루이자 메이 올컷, 『작은 아씨들』

이 글은 책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선물도 없는 크리스마스가 무슨 크리스마스야."

루이자 메이 올컷, 『작은 아씨들』, 강미경 옮김, 알에이치코리아(2020), 13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생각나는 소설이 있다. 크리스마스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오는 조의 불평과 함께 시작하는 루이자 메이 올컷의 소설 『작은 아씨들』이다. 가족과 사랑을 주제로 해서 더욱 따뜻한 성탄절 분위기가 난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본 이 소설은 여전히 재미있지만 마냥 포근하지만은 않다.






『작은 아씨들』 속 빛나는 구절


이 책에는 군데군데 사소하지만 재치 있는 문장들이 숨어있다. 공감이 가서 더욱 친근하고 재미있다. 이 분야에서는 특히 에이미가 빛을 발한다. 아래는 굶어 죽은 새 때문에 베스가 슬퍼하자 에이미가 나름대로 위로하고자 건넨 말이다.


"오븐에 넣어봐. 몸을 따뜻하게 해주면 살아날지도 모르잖아."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240면




한 번은 베스가 성홍열에 걸리는 바람에 에이미가 대고모님 댁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는 데, 이때 해야 할 일이 많았던 에이미의 우울하고 웃긴 심정이 드러나는 구절도 있다.


그 시간이 어찌나 지루한지 에이미는 어서 빨리 잠자리에 들어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한탄하며 울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일단 잠자리에 들면 겨우 한두 방울 눈물을 짜다 잠드는 게 보통이었다.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393면




에이미 말고도 각 인물들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표현들이 많다. 가령 베스는 네 자매 중 셋째로 매우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인데 작가는 이러한 베스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었다.


베스가 벽난로 청소솔과 행주 말고는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15면




한편 사랑에는 관심 없고 책만 잔뜩 읽은 조는 메그 언니에 대해 이렇게 투덜댄다. 사랑의 증상은 분명 책을 통해 습득했겠지?


"언닌 사랑에 빠진 게 분명해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증상들이 거의 다 나타나고 있어요. 딴 데 정신이 팔린 사람 같다니까요. 먹지도 않지, 자지도 않지, 우거지상을 하고 구석에만 처박혀 있잖아요."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422-423면




여기저기 복선이 많고 티가 잘 나지 않는 부분까지 꼼꼼하게 설정한 부분이 많아서 그걸 찾는 재미가 있다. 에이미가 대고모님 댁 아가씨에게 미리 듣기로는 처음 결혼한 사람들이 진주 목걸이를 받는다고 했었는데, 이후 메그와 존 부부가 이를 받게 된 얘기가 스치듯이 지나갔다. 가장 슬프고 커다란 복선 중 하나는 바로 베스의 죽음이다.


"내 꿈은 엄마 아빠와 함께 살면서 두 분의 일을 도와드리는 거야."
베스가 그거면 충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300면
"뭐랄까, 난 처음부터 오래 살지 못할 운명이었다는 느낌이 들어. 난 우리 자매들과는 달라. 크면 무얼 할지 계획을 세운 적도 없고, 다들 하는 결혼 생각도 한 적이 없어. 집안에서 종종거리는 어리숙하고 어린 베스 말고 다른 내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었어."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750면




그런가 하면 여성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작품을 썼다는 명성에 어울리는 부분도 있다.


마치 대고모는 집에 도착하자 밖으로 쪼르르 달려 나와 자신을 맞이하고 안으로 들이는 신부를 보고는 있는 대로 역정을 냈다.
…(중략)…
"전 구경거리가 아니에요, 대고모님. 사람들이 저를 구경하러 오는 것도 아니고, 제 드레스를 품평하거나 얼마짜리 점심이 나오는지 살피러 오는 것도 아닌데요 뭐. 전 너무 행복해서 누가 뭐라고 말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제 결혼식은 제가 원하는 대로 소박하게 치르고 싶어요."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509-510면


요즘 결혼식에서도 신부가 직접 객을 맞으면 신문에 나곤 하는데, 1800년대에 작가는 대담하게도 메그가 직접 결혼식 손님들을 맞이하는 장면을 만들었다. 작가가 생각하는 결혼의 본질과 행복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꾸밈없고 정겨운 모습이다. (작가는 모든 종류의 꾸밈을 사치로 생각한 듯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소설은 위의 내용과 결을 달리하는 부분들이 많다.






『작은 아씨들』에 드리운 그림자


좋은 남자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여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란다.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206면
메그, 이 아빠는 하얀 손이나 뛰어난 재능보다도 가정을 행복하게 해주는 여자의 손길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453면
그 사람 화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라. 남편이 존경을 받느냐 아니냐에 집안의 평화와 행복이 달려 있는 거란다. 너 자신을 돌아보고 둘 다 잘못했어도 네가 먼저 사과하거라.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566-567면


900쪽이 넘는 소설 원작을 읽다보면 책 전체에 걸쳐 꼼꼼히도 이런 가부장적인 설교가 이어진다. 아무리 옛날에 쓰였다곤 하지만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그 전 세대에 쓰였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노골적이다. 이야기가 조금 재미있어질라 치면 남성 중심적인 사고관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온다. 노예해방과 여성주의적 관점이 담긴 작품을 썼다는 작가가 왜 이런 말을 여기저기 흩뿌려 놓았을까? 루이자 메이 올컷은 그녀와 가장 닮은 듯한 조의 입을 빌려 말한다.


"하지만 편집장님, 모름지기 이야기에는 교훈이 들어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신경 써서 죄인들이 뉘우치는 장면을 몇 군데 넣은 거예요."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697면


작가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소녀들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가르치고자 했다. 그녀가 잘하는 이야기 만들기를 통해서 말이다. 작가 소개에 드러난 가정환경과 성장 배경을 통해 그녀의 가치관이 어떻게 정립되었는지 알 수 있다. 사실상 작가 소개를 작품 소개로 치환해도 될 정도이다.


1832년 11월 펜실베이니아 주의 저먼타운에서 네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에이머스 브론슨 올컷은 목사이자 진보적인 사상가로, 인내와 절제를 교육철학으로 내세워 아이들을 양육했다. 그는 아버지의 벗이었던 초월주의 사상가 랠프 월도 에머슨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 여성주의자 마거릿 풀러 등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끊임없이 일을 해야 했고, 남북전쟁 중인 1862년에 자원입대하여 북군의 야전병원에서 간호병으로 복무하다 장티푸스 폐렴을 앓는다. (후략)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겉표지 안쪽


동화책에 교훈이 꼭 필요한지는 오랫동안 논의되어온 주제이다. 동화의 아버지(동화의 어머니는 없다! 개인적으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을 후보로 추천한다.)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샤를 페로는 동화에 억지로라도 교훈을 꼭 집어넣었다. 그러나 로얄드 달처럼 오로지 재미만을 추구하는 작가도 있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스스로 사유하는 힘을 기를 수 있게 하는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과 같은 책도 많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믿어주는 거다. 하나하나 가르치는 대신, 흥밋거리를 소개해주고 관심이 있으면 스스로 찾아보도록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샤를 페로식 전략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작은 아씨들』의 빛과 그림자


이 책은 읽었을 때 불쾌한 부분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가 특별히 못났기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순 없다. 그녀는 당대에 훌륭하다고 일컬어지는 덕목, 절제와 배려를 자신의 글에 듬뿍 담았을 뿐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당대에 널리 퍼진 인식을 보다 분명히 살펴볼 수 있다. 더욱이 몇 발 앞서간 점도 있다. 그런 부분 때문에 포기하기에는 『작은 아씨들』의 일상 이야기가 너무나 매력적이다. 성장과 사랑, 이별과 만남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가정을 이루는 것, 가사를 돌보는 것을 우선순위로 두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나에게 그런 가치관은 어색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쓸데없이 우월감을 느끼거나 나와 다른 사람들을 안타까워하고 비난할 자격은 없다. 누구든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다는 당연한 원칙 때문이다. 나는 베스를 아끼는 동안 베스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면서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는 소박한 미덕들, 예를 들어 재능이나 부, 미모보다 훨씬 더 사랑하고 존중해야 할 미덕들을 발휘해 행복한 가정을 만들겠다는 베스의 욕심 없는 꿈을 정식으로 인정하게 된 것 역시 이때였다.

루이자 메이 올컷, 앞의 책, 378면





표지 출처


"작은 아씨들", 다음영화, 2021년 11월 15일 접속,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27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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