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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Dec 11. 2021

She is not a man

버지니아 울프, 『3기니』

이 글은 책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귀하는 믿기 힘드시겠지만,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는 소설의 목소리가 아닌 사실의 목소리입니다

버지니아 울프, 『3기니』, 김정아 옮김, 문학과지성사(2021), 59면






고장난 시계


버지니아 울프의 글은 오늘날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도 쉽게 읽히는 까닭에 그녀의 삶과 현재 사이에 약 100년이라는 시간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어색할 지경이다. 내가 읽은 『3기니』는 올해 문학과지성사에서 새롭게 번역했는데, 각주가 아주 상세히 구체적으로 달려 있어서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 글쓴이가 직접 미주로 달아놓은 자료도 풍부해서 현실감이 느껴진다. 그러니 서술자의 편지를 읽으면서 올해 중앙대에서 성평등위원회가 폐지된 사건을 다룬 기사의 구절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영 이상하지는 않다.



뉴넘과 거턴의 학생들은 이름 뒤에 BA를 붙일 수 없었기 때문에 교사로 임용되는 데 불리했다. 그러나 이 제안[시험에 통과한 사람(여학생)이 자기를 BA라고 칭할 수 있게 해주자는 제안]은 대단히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투표 당일에 비상주 투표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안건은 1707대 661이라는 압도적 반대로 부결되었다. 그때 세워진 최다 투표 수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은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 앞의 책, 58면


앞서 지난달 8일 중앙대 확대운영위원회는 성평등위 폐지 안건이 찬성률 58.41%로 가결됐다고 밝혔다. 출석 인원 101명 중 찬성 59명(58.41%), 반대 21명(20.79%), 기권 21명(20.79%), 무효 15명(14.85%)이 나왔다.
(중략)
"왜 중앙대 재적생 2만 명 중 59명의 의견으로 위원회가 폐지됐어야 하는지 총학에게 묻고 싶다… 확대운영위원회 자리에 있던 학생대표자들에게는 왜 이 사안을 다수결로 결정지으려 했는지, 왜 찬성 토론자가 단 한 명도 없었는지…"
(중략)
"이 사건은 대학사회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인권단체의 폐지이며 중앙대의 역사의 오점으로 남을 것"

진혜민, "중앙대 성평등위원회 졸속 폐지 논란… 학생들 "성차별적 한국 사회 단면"", 〈여성신문〉, 2021.11.04.




앤 여왕은 죽었고, 버닛 주교도 죽었고, 메리 애스텔도 죽었지만, 여자 대학을 세우고 싶다는 소망은 죽지 않았습니다.

버지니아 울프, 앞의 책, 54면


"성평등위원회가 폐지됐어도 성평등을 이룩하기 위한 사람들까지 없앨 수 없음을 기억하라"

진혜민, 앞의 기사



이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 과거에 제기된 문제들이 한 세기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둘째, 울프는 이런 문제를 예민하게 들추어내어 여성의 지위를 얘기할만큼 급진적이었다. 그런데 한때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했으며, 오늘날에는 페미니즘의 선구자라고 불린 버지니아 울프는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감, 그를 넘어선 혐오를 표현한다.


악의로 가득한 부패한 단어, 한때는 매우 해로웠으나 이제는 쓸모없어진 단어,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바로 그 옛 단어입니다. 사전에 따르면 이 단어는 "여성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성들에게는 생활비를 벌 권리라는 유일무이한 권리가 생겼으니, 이 단어는 이제 의미 없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의미가 없어진 단어는 죽은 단어, 부패한 단어입니다. 그러니 이 시체를 불태움으로써 새로운 사건을 기념하도록 합니다. 이 단어를 풀스캡에 검은색 대문자로 쓰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는 엄숙한 예식을 거행합시다. 이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십시오! 이 불빛이 세상 곳곳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십시오!

버지니아 울프, 앞의 책, 186면


그녀는 왜 이러한 단어들을 불살라버리자고 했을까? 여성 차별 비판과 페미니즘 혐오는 모순적이지 않은가? 그녀의 주장은 과연 페미니즘과 안티 페미니즘 사이 어디에 있는가?






울프의 F-word


나는 이런 울프의 글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아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다음은 스웨덴 룬드 대학의 석사 학위 논문으로,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대하는 울프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Her definition of feminism was confined to the law alone, it seems. Feminism is theory, and theoretically, women now had the same rights as men. They were equal before the law. To Woolf, it was still important to fight patriarchy but she did not call this undertaking an issue of feminism. The narrow definition of feminism as "one who champions the rights of women" required a new word describing what had to be done for equality's sake in practice after the law had established equality.
페미니즘에 대한 그녀의 정의는 법에만 국한된 것으로 보인다. 페미니즘은 이론이며, 이론적으로, 여성들은 이제 남성들과 같은 권리를 가졌다. 그들은 법 앞에 평등했다. 울프에게, 가부장제와 싸우는 것은 여전히 중요했지만 그녀는 이것을 페미니즘의 문제라고 부르지 않았다.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이라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 좁은 정의는 법이 평등을 확립한 이후 실질적인 평등을 위해 행해져야 하는 것을 설명하는 새로운 단어를 필요로 했다.

Ute Kathmann, "Virginia Woolf and the F-Word: On the Difficulties of Defining Woolf's (Anti-)Feminism", Master's thesis in Literature/Culture/Media(2012), 7면


울프는 제도적, 이론적 평등을 넘어선 실질적 평등을 추구했다. 그녀에게 페미니즘은 아닌 제도적 평등에 그쳤고, 실질적 평등을 갖추지 못한 제도적 평등은 심지어 기만적이었다. 그녀는 한낱 명찰에 불과한 제도적 페미니즘이 아니라 실질적 평등을 위한 여러 감정들이 여성들의 진정한 동력이라고 주장했다. 투표권과 직업을 가질 권리가 보장된 시점에서 이론적 평등을 이데올로기로 삼는 페미니즘이 구시대적이라고 말하면서, 현실이 얼마나 실질적 평등과 동떨어져 있는지 이 책에서 철저히 파헤쳤다.


더구나 이런 명찰들로는 딸들이 아버지들의 유아기 고착에 맞설 때 힘이 되었던 진짜 감정들을 명명할 수 없습니다. 전기들이 보여주듯, 그 힘 뒤엔 서로 다른, 서로 모순되는 여러 감정들이 있었으니까요.

버지니아 울프, 앞의 책, 246-247면



옮긴이는 '울프의 현 상태 비판이 여성주의적 프로파간다로 전환되기를 바라는 독자에게는 『3기니』가 실망스러운 텍스트일지도 모르겠다'(버지니아 울프, 앞의 책, 357쪽)고 말하였지만, 지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페미니즘'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버지니아 울프의 말은 충분히 여성주의적 프로파간다로 전환될 수 있다. 다분히 여성주의적인 글의 내용과 저자가 생전에 여성 단체들을 지원해왔다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냄새, 공기, 불문율


울프가 가상적으로 상정한 여성 권리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반박은 다음과 같다.


당신에게는 투표권이 있고, 그 투표권에는 재산이 따라왔을 텐데, 당신은 지금껏 전쟁을 없애지 않았다. 당신에게는 투표권이 있고, 그 투표권에는 권력이 따라왔을 텐데, 당신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말살하고 있는 파시스트와 나치에게 당신은 지금껏 저항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한때 '여성 운동'이라고 불렸던 것들이 이제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결론 말고 무슨 다른 결론이 있을 수 있겠나.

버지니아 울프, 앞의 책, 85면


1년에 3억 파운드를 군사비로 지출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1년에 4만 2천 파운드라는 푼돈으로 무슨 반전론을 얼마나 살 수 있겠는가?
버지니아 울프, 앞의 책, 87면


제도적 권리인 투표권은 여성에게도 있지만, 재산과 권력은 여전히 남성들의 전유물이다. 울프는 다양한 기사나 전기 등을 자료로 들며 심각한 임금격차, 직업 세계에서의 차별, 결혼한 여성의 설자리가 없는 문제(당시 결혼한 여성은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등 현실적인 문제들을 지적한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은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제도가 갖추어진 곳에서 이러한 문제들은 쉽게 무시되고, 그러므로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가리는 '제도적 페미니즘'을 불태워버리자는 저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글은 편지일 뿐이고, 귀하는 시간에 쫓기는 분이니, 고학력 남성의 딸들이 상대해야 하는 적들 중 하나의 공기는 가장 감지가 안 되는 적들 중 하나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가장 강력한 적들 중 하나라는 자명한 사실을 밝히는 것으로 진술을 마무리하도록 합시다.

버지니아 울프, 앞의 책, 100면



유해 공기는 뿌리 깊은 관습의 도움을 받아 더욱 곤고해진다. '과학에도 성별이 있다는 생각, 과학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라는(원문은 "she is a man." science(과학)를 여성형 인칭대명사로 받은 것은 scientia(science의 라틴어 어원)가 여성형이기 때문인 듯하다.) 생각'(버지니아 울프, 앞의 책, 251면)은 고학력 아버지의 딸들이 시험에 응시하고 대학에 다니고 병원에서 일할 기회를 박탈해왔다.


그러나 여성들은 온갖 가난과 제약과 조롱과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불문율을 폭로했다. 여성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는 수많은 불문율이, '신'이나 자연이 정했다는 그것들이 실은 신/자연으로부터 나온 게 아님을 보임으로써 거짓 권위에 도전했다. 그들은 과학은 남성이 아님을 보였다.


울프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불문율이 '각 세대에 의해 때마다 새롭게 폭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티고네에 따르면 법에는 성문법과 불문율 이렇게 두 종류가 있고, 미시즈 드러먼드에 따르면 성문법을 개혁하기 위해 성문법을 위반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성문법 위반은 19세기 고학력 남성의 딸들이 행했던 다종다양한 활동들의 유일한 목적이 아니었던 것은 물론이고 주요한 목적도 아니었다. 그 활동들이 실험적인 방식으로 시도했던 것은 오히려 불문율(특정한 본능, 또는 감정, 또는 정신적, 육체적 욕구 등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 비공식 관행)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그런 불문율이 존재하고 있고 문명 시대의 사람들도 그런 불문율을 따르고 있다는 점은 꽤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런 불문율을 정한 것이 '신'이나 자연이 아니라는 점, 그런 불문율은 각 세대에 의해 때마다 새롭게 폭로돼야 한다는 점, 그런 불문율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각 세대가 때마다 새롭게 지력과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점은 이제 겨우 받아들여지기 시작하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 앞의 책, 347-348면


〈플랫랜드: 더 무비〉에서 3차원 구는 2차원 사각형에게 3차원을 소개해주면서도 4차원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조지프 리스터는 소독법을 고안했지만 멸균법은 현실적으로 불가하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4차원과 그 너머를, 멸균법을 구체화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놀라운 점이 여기에 있다. 그녀는 2차원의 세계에서 3차원을 발견하고 4차원을 상상했다.






힘은 권리가 아니다


귀하 같은 남성 법조인들이 한목소리로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파업을 시작할 것이다"라고 외친다면 영국의 법무가 중단되겠지만, 여성 법조인들이 그렇게 외친들 영국의 법무는 평소와 똑같이 진행되겠지요.

버지니아 울프, 앞의 책, 25면


권리와 힘은 항상 함께 가지 않는다. 권리가 있으나 권리를 행사할 만큼 힘이 없는 경우도 많고, 자신의 권리를 넘어선 힘을 가진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지금까지 남성은 권력의 측면에서 다수자로서 권력을 독점해왔다. 그러나 힘의 독점과 사용은 그들의 권리가 아니다. 이는 아주 쉽고 단순한 사실이다. 내가 친구의 사탕을 뺏을 수 있고 또 뺏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뺏을 권리가 있지는 않은 것과 같은 이치로. 그러므로 그 힘을 여성과 공평히 나누어 갖는다고 그들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산을 오르는 다른 길


울프의 주장은 남성과 대척점에 서있지 않다. 오히려 울프는 여성의 권리 회복(취한 적 없는 나의 것을 가져오는 것도 회복에 해당한다면)이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설득한다. 이는 성별을 떠나 모두가 소망하는 전쟁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도 필수 불가결하다. 동일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것뿐이다. 여성은 남성이 아니고, 여성의 지위는 남성의 것과 같지 않다. 그러니 같은 목적지라도 여성과 남성의 길이 다르고, 예전과 지금이 다름은 마땅하다. 우리는 우리만의 불문율을 폭로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책 전체에 걸친 논증이 그 증거이며, 특히 제일 마지막 장의 논증이 그렇다. 전쟁을 막기 위해 기부금을 필요로 하는 남자의 요청을 들어주기 앞서 서술자는 같은 목적을 달성하고자 다른 여성 단체 두 곳에 기부한다. 그런 뒤 자신이 기부하는 3기니 중 마지막 한 기니를 남성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자유롭게 선물로' 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총 3기니를 받으시는 세 분의 대의는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동일한 대의이니만큼 3기니를 받는 분은 세 분이라 해도 3기니가 받드는 대의는 하나라는 것을 부디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버지니아 울프, 앞의 책, 25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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