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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Dec 18. 2021

신이 떠난 마을에서

루쉰, 「복을 비는 제사」

이 글은 책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말 결산을 하듯이, 부뚜막의 신(神) 조왕신은 일 년에 한 번씩 옥황상제에게 집의 일을 보고하러 떠난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이 신의 전송과 마중을 위해 복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다. 이 소설은 조왕신이 떠나는 날인 세밑(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는 샹린댁의 삶과 말로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그녀의 삶은 너무나 기구해서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한다.


신이 있었다면 샹린댁을 어여삐 굽어살피지 않았을까?






이 소설의 서술자 '나'는 1인칭 관찰자로서 자신의 시각에서 주인공 샹린댁에 대해 이야기한다. 샹린댁은 젊어서 남편을 읽고 괴팍한 시어머니로부터 도망쳐 쓰 아저씨 댁에서 하녀로 일했다. 이제 일이 좀 풀리나 싶던 차에 시어머니는 도망친 며느리를 쫓아왔다. 그야말로 자신의 '재산'을 되찾으러 온 것이었다. 며느리를 먼 시골구석의 남자에게 시집보내야 돈을 많이 받고 그 돈으로 자기 아들을 장가보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샹린댁의 비참한 삶의 궤적은 웨이 할멈을 통해 전해진다.



"샹린댁은 말을 들었는가?……"
"듣고 안 듣고가 무슨 상관입니까…… 소란이야 누구나 다 피워보지만요, 밧줄로 묶어서 꽃가마에 처넣고 남자 집으로 메고 가서 족두리 씌우고 절 시키고 방문을 걸어 잠그면 일은 끝나는 거지요. 하지만 샹린댁은 정말 유별났어요. 그때는 정말로 심하게 날뛰었다는군요, …(중략)… 가는 길 내내 소리 지르고, 욕을 하고 하는 바람에, 허쟈아오에 도착했을 때는 목이 다 쉬었대요. 가마에서 끌어내어 남자 둘하고 시동생이 힘껏 붙잡았는데도 식을 올리지 못했어요. 그들이 약간 방심해서, 잠깐 손을 늦추자마자, 아이구, 맙소사, 그 여자가 잔칫상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쳤지 뭐예요, 머리에 큰 구멍이 생기고, 빨간 피가 콸콸 쏟아져서, 재를 두 주먹이나 뿌리고 붉은 헝겊을 두 겹이나 싸매도 피가 멎지 않았어요. 여럿이 달려들어서 그 여자를 남자랑 같이 신방에 집어넣고 문을 잠갔는데도 여전히 욕을 해대니, 아이구, 그건 정말……" 그녀는 고개를 젓고, 눈을 내리깔고, 말을 멈추었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됐지?" 쓰 아주머니가 물었다.
"다음 날도 일어나지 않았대요." 그녀가 눈을 들며 말했다.
"그 다음엔?"
"그 다음요?…… 일어났지요. 연말에는 아이를 낳았는데, 사내애고요, 새해에는 두 살이 되지요."

루쉰, 『아Q정전』, 전형준 옮김, 창비(2021), 144-145면



이렇듯 이 소설에서 샹린댁의 사연은 본인의 입에서 나오기보다는 주로 간접적으로 소개된다. 왜 루쉰은 샹린댁이 스스로의 아픔과 절망을 절절히 이야기하도록 두지 않았을까? 이는 다음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슬픔이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저작되고 감상되어 이미 찌꺼기만 남았고 이제는 오직 혐오와 타기의 대상일 뿐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웃음 속에서, 그것이 싸늘하고 가시 돋친 것이며 자기는 더 이상 입을 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들을 흘낏 바라보기만 할 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 루쉰, 앞의 책, 151면



샹린댁이 먼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것은 아들의 사연이 전부이다. 연약해진 그녀는 아주 사소한 것에도 자극을 받아 자신이 어떻게 아들을 잃었는지 풀어놓았다. 처음에 마을 사람들은 일부러 사연을 들으러 왔지만 이내 금방 질렸고, 그녀를 멸시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침묵에 잠겼다.


처음부터 쓰 아저씨는 줄곧 샹린댁이 제사 준비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풍속을 해친 사람이 만든 음식은 조상님들이 잡숫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샹린댁을 불쌍히 여겼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에게 샹린댁은 부정을 탄 사람이었다. 그들은 샹린댁의 기구한 사연을 재미있는 오르골 장난감 취급하였고 싫증이 나자 버렸다. 가장 많이 배워 선생님이라고 불린 '나'가 자신의 대답이 샹린댁에게 위험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조금도 돕지 않고 자기 합리화나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라는 말은 아주 유용한 말이었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용감한 젊은이들은 흔히 사람들의 의문을 해결해주거나 의사(醫師)를 선정해준다고 나서는데 만일 결과가 좋지 않으면 대체로 거꾸로 원한의 대상이 되어버리지만,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라는 말로 마무리를 지어두면 만사가 걸릴 게 없는 것이다.

루쉰, 앞의 책, 135면






해설에 의하면 루쉰은 민중이 다른 민중을 괴롭히는 민중적 자해를 비판하거나,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무기력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는 것을 주제로 삼은 작품을 많이 내었다(루쉰, 앞의 책, 247면).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그보다 더 근본적인 침묵을 발견했다. 샹린댁에 대해 끊임없이 떠들어대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침묵하는 사람들과, 끝내 영원한 침묵에 잠긴 샹린댁은 특정 집단이나 계층으로서의 유대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유대가 상실된 모습이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샹린댁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알지만 절대 그녀를 돕지 않는다. 또한 그녀가 자기 집안일을 돕도록 허락하지도 않는다. 이는 철저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타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며 그들이 자신에게 개입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행태를 드러낸다. 샹린댁의 사연이 주로 '나'나 웨이 할멈의 입을 빌려 전해지는 것도 이런 현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이 작품의 가장 가슴 아픈 점은 이런 일이 오늘날까지 계속된다는 점이다. 인터넷에는 항상 지나치게 사적이고 슬픈 이야기가 떠돌아다닌다. 또 많은 사람들은 관계의 단절로 인해 괴로워한다. 시끄러운 소음이 가득한 곳에서 개인의 목소리는 묻히고 마침내 목소리들은 침묵한다.






대낮부터 초저녁까지의 의혹은 복을 비는 제사의 분위기에 씻겨 전부 사라져버리고, 하늘과 땅의 신들이 제물과 향현을 흠향하고 얼큰히 취해 공중에서 비틀거리면서 노진 사람들을 위해 무한한 행복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루쉰, 앞의 책, 156면



책의 말미는 샹린댁에 대한 죄책감을 쉽게 지워버리는 한편, 사람들에게 행복이 곧 찾아올 것 같다는 기대를 품고있다. 이는 외지인이었던 샹린댁과 '노진 사람들'의 상반된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거지가 되어도 노진을 떠나지 않은 샹린댁이 노진 사람이 아니면 무엇인가?


샹린댁은 노진 사람이 아니면서 노진 사람이었다. 샹린댁의 사연은 자기보다 남들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그녀는 죽음을 두려워했으나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존재가 확실치도 않은 신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길을 마중하려고 시끌벅적한 축제를 벌이는 마을에서 실재했던 샹린댁이 세상을 떠난 일은 쉬이 묻혔다. 샹린댁은 모순을 형상화한 인물이다. 샹린댁이 내내 슬픈 삶을 살았다는 것만이 모순적이지 않다. 이 점이 어떻게 모순으로 바뀌냐면, 그런 샹린댁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으로 인해 그렇게 된다. 신들이 준비하는 행복에는 샹린댁의 몫이 있어야 한다.


앞서 서술했듯이 우리의 잘못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왔다. 무거운 굴레 속에서 우리는 내일이 오늘과는 다르기를 희망한다. 마을을 떠났던 신이 돌아오기를, 신들이 사람들을 위해 무한한 행복을 준비하고 있기를 바라며 '복을 비는 제사'를 지낸다. 이 희망은 태생적으로 아주 강렬하면서도 가냘프다는 모순을 지닌다. 믿는 것만으로도 이미 일어난 일처럼 느껴지지만 내일이 오면 어느새 사라져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모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희망은 유효한가? 어떻게 샹린댁은 행복할 수 있을까? 루쉰의 다른 소설 「고향」에는 꿈결 같은 답변이 있다.



희망을 생각하자 나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달라고 했을 때 나는 그가 우상을 숭배하면서 언제나 그것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그를 비웃었었다. 지금 내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것도 나 자신이 만들어낸 우상이 아닐까? 다만 그의 소망은 아주 가까운 것이고 나의 소망은 아득히 먼 것이라는 것뿐이다.

몽롱한 가운데, 나의 눈앞에 해변의 초록빛 모래밭이 펼쳐졌다. 그 위의 쪽빛 하늘에는 황금빛 둥근 달이 걸려 있었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

- 루쉰, 앞의 책, 63-64면




참고문헌

루쉰, 『아Q정전』, 전형준 옮김, 창비(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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