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화 Jan 01. 2022

카사노바: 방랑자, 늙은이, 범죄자

아르투어 슈니츨러, 「카사노바의 귀향」

이 글은 책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카사노바에게 관심이 없다. 내가 이 소설을 읽은 이유는 순전히『문학작품 감상문 및 보고서 쓰기』를 읽기 위해 「꿈의 노벨레」를 읽으려고 빌린 문학동네에서 낸 책에 「카사노바의 귀향」도 함께 (그것도 먼저) 수록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아침드라마보다 더 막나간다. 카사노바에게 공감이나 연민… 일반적인 등장인물에게 몰입하면서 우러나오는 보편적인 감정은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는 정말이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허풍쟁이에 자기 합리화와 망상에 빠져 사는 미친놈이다. 처음에는 이런 쓰레기의 이야기를 내가 왜 읽고 있나 싶었지만, 뒤로 갈수록 막장드라마를 보듯이 그래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읽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고 읽으니 우스워서 나름의 재미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간략한 줄거리


결혼을 할 수 있도록 카사노바가 도운 부부가 있다. 올리보-아말리아 커플은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사노바는 젊고 돈이 꽤나 있던 시절에 올리보로부터 사연을 듣고는 아말리아의 어머니를 꼬셔서 그녀와 하룻밤 자고 지참금을 대주겠다고 하여 결혼을 할 수 있도록 설득했다. 그러고는 자기가 도왔으니 이 정도는 괜찮다며 아말리아를 꼬셔서 잤다. 오랜 시간이 흘러 올리보와 우연히 만났을 때 카사노바는 속으로 "내가 자신의 아내랑 잔 걸 얘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걸까" 따위의 생각을 한다. 올리보는 카사노바가 자신의 은인이라며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는데, 거기에 부부가 낳은 세 자매가 있었다. 그중 첫째와도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


그 와중에 카사노바가 흠뻑 빠진 마르콜리나라는 여자가 있다. 마르콜리나는 남자에 전혀 관심 없이 학문에 빠져 있기로 유명하다. 카사노바에게는 관심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카사노바는 우연히 마르콜리나의 방에서 로렌치라는 젊은 소위가 몰래 빠져나가는 걸 발견한다. 이를 보고 분개한 카사노바는 마르콜리나를 창녀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발견한 비밀을 빌미로 그녀를 협박할 생각도 하지만 곧 관둔다. 한편, 로렌치는 마르콜리나를 좋아하는 듯하면서도 어느 후작의 아내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아무래도 후작의 아내가 주는 값비싼 보석 때문인 것 같다.) 카드 게임을 하면서 카사노바는 돈을 엄청 딴 반면, 로렌치는 후작에게 엄청난 빚을 지게 되면서 지위도 명예도 모두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다.


이때 카사노바는 자신이 번 돈으로 로렌치에게 찾아가 조건을 내민다. 카사노바는 억지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마르콜리나와 자기를 원했다. 그래서 돈을 아예 주는 대가로 로렌치에게 그의 외투를 빌려달라고 한다. 어두운 밤 카사노바가 그의 외투를 입고 그인척 하며 다가가 마르콜리나와 밤을 보내려는 것이다. 이 계획은 통했고 카사노바는 만족스러운 밤을 보낸 뒤 꿈을 꾸었다. 아침에 마르콜리나는 수치심과 경악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묘사했다. 카사노바는 그 이유가 자신이 '늙은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카사노바는 로렌치와 결투해서 그를 죽이고 고향으로 도망치고, 잠을 자는 동안 꿈도 꾸지 않고 죽는다.






카사노바 대 로렌치


카사노바는 로렌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로렌치는 젊은 시절의 카사노바와 유사했다. 지금의 카사노바와 달리 '젊다'는 사실만이 달랐다. 마르콜리나는 로렌치와는 밤을 같이 보냈지만 카사노바는 경멸했다. 마르콜리나가 자신을 '늙은이'라고 보았다는 카사노바의 생각은 자신이 생각하는 로렌치와의 유일한 차이점을 짚어낸 것으로 보인다.


꿈속의 곤돌라 사공은 로렌치였다. 꿈에서 젊음은 늙음을 죽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카사노바가 로렌치를, 즉 늙음이 젊음을 죽였다. 이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꿈을 꿀 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하늘을 날 수도 있다. 꿈속에서 늙었다는 제약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늙음이 승리한다. 늙음이 젊음을 죽여 젊음은 사라진 채 늙은 자신만 남는다.






꿈의 해석


이 글의 저자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의학을 전공하고 프로이트와 같은 시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에 등장하는 꿈은 적재적소에 설치된 장치라고 보아야 한다. 아… 그런데 하나하나 살펴볼 만큼 이 이야기에 정이 없다. 대충 생각나는 대로 적었는데 정설은 나도 모른다.


아말리아가 카사노바와 로렌치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한 것은 카사노바에 대한 아말리아의 왜곡된 환상 때문이다. 카사노바가 마르콜리나와 자다가 진짜로 잠들었을 때 꾼 꿈에는 로렌치가 아니라 카사노바로서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드러난다. 속세의 옷을 걸친 수녀들, 물에 빠져 죽어가는 결말은 무슨 의미일까?


속세의 옷을 걸친 수녀들은 정결한 척하면서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여성들을 보여주는 건가? (내가 저자를 너무 편견에 찌든 사람으로 만들었나?) 카사노바는 마르콜리나를 찾기 위해 강을 건넜지만, 그곳에는 그녀가 없었고 카사노바는 물에 빠져 죽었다. 그렇다면 그 강은 욕망의 상징인 건가? 카사노바의 욕망은 강물처럼 넘치고 그를 욕망에서 허우적대도록 만드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이 떠난 마을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