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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Jan 12. 2022

저녁의 구애

편혜영, 「저녁의 구애」

이 글은 책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애


저녁의 구애는 무슨 의미일까. 먼저 구애는 무슨 뜻일까. "일방적이고 주관적이며 이기적인, 그래서 사랑과 사랑 아님의 경계에 있는 공백…(중략)… 구애·죽음·재난의 트라이앵글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 자기 혼자 견뎌야 한다는 것, 지겹도록 반복된다는 것에서 시작되고 끝난다(380쪽, 김미현(문학평론가) 발췌)." 소설 속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구애를 하고 있는 사람은 여자이다. 여자는 별다른 반응도 없는 김에게 끊임없이 구애를 하고 있다. 김은 자신의 태도에 차라리 여자가 화를 내기를 원하지만, 여자는 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자는 자신의 속상함을 알아주길 원할 것이다.


김은 여자의 구애를 귀찮아하고, 부고 소식을 탐탁지 않아한다. 그런 김에게 옆집 화원 사내가 말한다.


부고는 원래 크게 알려야 해. 죽은 줄도 모르고 안부를 묻는 짓을 못하도록 말이야. 그것처럼 바보 같은 게 없거든. ... 부고를 못 들은 녀석들은 아직도 그 친구 안부를 묻지. 죽었다고 대답할 때마다 그 녀석이 죽은 게 실감 나.

윤성희 외 8명, 『칼 (2010 제10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문예중앙(2010), 385면


돌이켜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그런 것 같다. 우리는 상대방이 내게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기를 원한다. 각자 겪었을지 모르는 아픔이나 역사를 이해해 주길 원한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대개 사적이어서 친하지도 않은 타인에게 말하기 곤란하다. 그렇게 말하고 다니면 김처럼 그런 알고 싶지도 않은 불편한 사실을 나에게 왜 전하고 무언가를 요구하느냐고 불평할지도 모른다. 또 그런 내밀한 사정까지는 굳이 공유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이러한 모순적인 마음은 타인을 향한 우리의 구애이다. 이런 마음은 불쑥 튀어나오기에 예측 불가능하다. 실현될 수 없기에 혼자 견뎌야 한다. 또 이런 모든 이유로 지겹도록 반복된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이해받고 싶어 한다. 여자가 본심을 참은 것처럼 우리의 본심을 삼킨 채로. 여자가 끝까지 김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정작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 소설에 드러난 또 다른 구애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 자신과 닮은 한 트럭에서 불이 나는 걸 보고 김은 허겁지겁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구애한다. 이는 상투적이고 진부하다고 서술된다. 여기에서 김의 이기적인 속성이 드러나는데, 트럭 운전사에 대한 걱정으로 119에 전화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여자에게 사랑을 말했기 때문이다. 바로 직전까지 여자를 지루해하였음에도 김은 바로 거의 마지막 순간 마음을 바꿨다.


이는 김의 무관심하고 평온한 이전까지의 태도와 대조된다. 김은 지진과 같은 재난을 자신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또 그는 죽음이 자신에게서 아주 멀리 있다고 여겼다. 그에게 불행은 재난이 아니었다. 그가 말한 불행은 다음과 같다.


모두 무사한데 자신에게만 불운이 닥치는 것. 김이 생각하는 불행은 그런 것이었다.

윤성희 외 8명, 앞의 책, 393면


결국 우리는 무사한 사회에 편입되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타인과 관계 맺기를 원한다. 재난과 죽음이 자신의 코앞에 다가온 느낌을 받은 김은 마지막 순간에 이러한 자신의 욕구를 누구보다 이기적으로 누구보다 일방적이게 토해낸다. 그러므로 구애가 된다.






김은 죽었을까?


얼마쯤 걸어갔을 때 등 뒤에서 나지막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김이 자리에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김이 모는 것과 같은 종류의 트럭이었다.

윤성희 외 8명, 앞의 책, 400면


트럭 운전사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글이 산만해지고 상황이 휙휙 돌아간다. 무엇보다 트럭의 바퀴 소리나 덜컹이는 소리는 못 들음에도 운전사의 휘파람 소리를 매우 선명하게 듣는다. 이 부분이 김의 죽음을 암시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이 글은 내내 김의 죽음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범벅되어 있다.


김은 한 번도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음을 깨달았지만 그것이 다였다. 그는 살아 있었고 죽음에 대해서라면 그것이 목전으로 다가올 때까지 그것은 멀고도 먼 훗날의 일이 될 거였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윤성희 외 8명, 앞의 책, 396-397면


돌아가시기도 전에 성질 급한 유족들이 빈소에 영정사진을 내려놓은 모양이었다.

윤성희 외 8명, 앞의 책, 396면


김은 자신의 죽음이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정반대로 코앞에 닥쳤을지도 모른다. 또한, "돌아가시기도 전에 성질 급한 유족들이 빈소에 영정사진을 내려놓은 모양이었다.(396쪽)"라는 구절을 보면, 김이 화환을 가지고 노인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이 실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기다린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래에 발췌한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조등처럼'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렇다면 김은 타인의 죽음에 거리를 두고 생각한 것처럼 자신의 죽음마저 멀리서 바라본 것이다.


김은 땅에 박힌 듯 멈춰 서서 조등(弔燈)처럼 환히 빛나는 그 불빛을 바라보았다.

윤성희 외 8명, 앞의 책, 402면






저녁의 구애, 죽어가는 영혼의 애원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을 기다린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싶어 구애를 하는 한편 타인과의 완전한 단절을 기다린다. 타인과의 관계를 갈망하지만 그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해 차라리 안전한 죽음을 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점에서 구애는 무관심과 매우 비슷하다. 둘 다 일방적이고 주관적이며 이기적이다. 김의 무관심에서 여자의 구애가 보인다. 죽음을 추모하는 장례식장에는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트럭 사고에서는 다시 김의 구애가 드러난다. 김은 여자와 다르지 않다. 김은 그의 친구, 어른, 여자, 담뱃불을 빌린 한 사내, 그리고 택시 운전사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구애는 무관심과 다르지 않다.


저녁은 하루가 저물어가지만 완전히 끝나지는 않은 시각이다. 노인의 삶이 거의 끝나가지만 완전히 죽어버리지는 않은 것과 같다. 저녁의 구애는 구애를 삶과 죽음으로도 확장시킨다. 저녁의 구애는 저녁에 한 구애로 들리지만 한 편으로는 저녁이 하는 구애로도 들린다. 타인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죽어가는 영혼의 구걸을 넘어, 자신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영혼의 구걸까지 서술한다.




표지 출처


The Angelus (painting) -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The_Angelus_(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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