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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Oct 05. 2022

거울: 나와 당신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미국에서의 초연 때 연출자 알랭 슈나이더가 베케트에게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묻자 베케트는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옮김, 민음사(2020), 164면


솔직히 말하면 내가 한껏 나다니며 즐거운 때를 보내고 있을 시절이라면 들춰보지도 않았을 법한 책이다. 어디선가 결말을 주워 들어서 고도가 오려나 안 오려나 하는 궁금증도 없었다. 그러나 요즘 염세주의에 빠진 탓인지 재미없다 재미없다 하면서 금방 다 읽었다.


이 책은 삶에 싫증이 날 때 읽기 좋은 책이다. 죽고 싶을 때가 아니라, 나의 삶이 어딘가 불만스럽지만 어떻게 바꿔볼 결심도 서지 않고 그저 지금과는 달라졌으면 하는 느릿느릿한 불만족이 느껴질 때.


인물들은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린다. 흰 수염이 났다는 것 말고는 고도가 누구인지도 모르겠다. 언제 올지, 아주 안 올지도 모르는 채 그들은 그저 고도를 기다린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지금 나와 꼭 닮았다. 나는 내 삶에 변화를 주고 싶다. 그러나 변화를 위해서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다. 이렇게 젊은 데두? 하지만 내 나이는 언제나 기대보다는 미성숙하고 생각보다는 늦은 나이이다. 무엇보다 내가 어떤 변화를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제대로 데여보지도 않은 내가 어째서 조금의 실패도 두려워하는지 모르겠다. 복에 겨운 소리이지만 제대로 실패한 적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제대로 실패해보지도 않고 제대로 성공해보지도 않고 그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도가 나에게 오기를,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시골길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사뮈엘 베케트, 앞의 책, 158면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대한성서공회, 마태복음 25:1-13




나: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當身): 나는 모르네.

나: 왜 내 질문에 답을 안 하는가?

당신: 그 답은 나에게 없어.

나: 그럼 누구에게 있나?

당신: 당신에게 있지.

나: 당신에게 있다고?


침묵


당신: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 고도를 기다리네.

당신: 그럼 나는 무얼 하고 있지?

나: 고도를 기다리네.

당신: 고도를 기다려?

나: 고도를 기다려.

당신: 고도를 기다리는군.

나: 당신은 고도가 누군지 아는가?

당신: 고도가 누구인가?

나: 내가 먼저 물었네.


당신은 듣지 않고 있다.


나: 생각해 보래두!

당신: 무엇을 말인가?

나: 내 질문에 답을 생각해 보란 말일세.

당신: 당신이 누구이냐구?

나: 그거 말고, 고도가 누구냐고 물었네.

당신: 고도는… 흰 겹저고리, 칼, 한성, 한성에 이르는 길, 옛 도의, 삼계 육도의 고과, 해수면, 해수면 위로 우뚝 솟은 코만한 외딴섬, 도리, …


당신은 몸을 솟구쳐 높이 뛴다.


나: 그만하게.


당신은 여전히 몸을 솟구쳐 높이 뛴다.


나: 그만 생각하라구!


나가 화를 낸다.


당신: (기분이 상하여) 그만 가겠네.

나: 왜 그러는가?

당신: 나는 이만 가겠어.

나: 안돼!

당신:  그러는가?

나: 고도를 기다려야지.

당신: 그렇지, 참…





출처

대한성서공회, 마태복음 25:1-13 https://www.bskorea.or.kr/bible/korbibReadpage.php?version=GAE&book=mat&chap=25&sec=1&cVersion=&fontSize=15px&fontWeight=norm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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