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화 Nov 16. 2022

상처 입은 도시

루이스 세풀베다, 『역사의 끝까지』

『역사의 끝까지』는 소위 〈추악한 전쟁〉, 즉 과거 군사 독재 정권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자행한 국가 폭력을 후일담 형식으로 돌이켜 보는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독재 이후의 사회와 지식인의 변모 그리고 권력과 일상화된 공포 등 역사적 현재에 초첨을 맞추고 있다.

루이스 세풀베다, 『역사의 끝까지』, 엄지영 옮김, 열린책들(2020), 299면




아베는 싫지만 지브리는 좋다. 지브리의 수장 미야자키 하야오와 아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는 아베 정권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마음의 뿌리는 너무나도 다르다. 나는 한국을 사랑해서, 그는 일본을 사랑해서. 이처럼 오늘날 내 또래들은 어제와 오늘이 갈등을 빚는 일상 속에서 '역사적 현재'를 경험하고 있다.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 아닌, 그 폐허를 숨처럼 마시고 자라난 사람들.


이 소설은 칠레의 복잡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분위기가 낯설지 않다. 혼란스러운 근대사는 한국만의 것이 아니었다. 서술자는 과거를 어렴풋이, 기억으로만 전달해줄 뿐 결코 그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옮긴이의 말처럼 현재 시점을 유지함으로써 역사가 영향을 미친 지금의 모습에 집중하였다. 소설에는 이념을 위해 모든 걸 (청춘과 목숨과 사랑하는 이들을 포함한 전부를) 바쳤지만 이제는 골칫덩이로 전락해버린 이들, 또 이전과는 다른 가치를 좇지만 여전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벨몬테는 등장인물들이 자기 합리화하는 방식을 냉소적이고 피로한 시선으로 좇는다. 오늘날 사람들은 더 이상 신념대로 사는 이들을 추앙하는 체하지도 않는다. 순응하고 제도화되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일본과 풀어나가야 할 문제를 덮어둔 채 우호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독재 정권의 죄악을 외면하는 행위 역시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현실주의 논리의 과잉 현상에서 비롯된다'(루이스 세풀베다, 앞의 책, 302면).


벨몬테와 동지들이 손에 쥔 진실의 조각들은 파편화된 탓에 거짓을 닮았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를 쫓고 누구에게 쫓기는지 모르는 채 역사의 끝까지 갔다. 그 끝에서 그들은 이미 끝나버린 낡은 진실을 알게 된다. 역사란 그렇다. 우리가 전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되면 이미 먼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역사에 끝에서 오늘이 시작된다. 벨몬테와 베로니카가 상처 입은 도시 속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듯이, 우리는 무너진 진실과 새로 마주한 진실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살아가게 된다.




미국이 전쟁을 이야기할 때 한국은 몸서리를 친다 (일부 발췌)

By HAN KANG OCT. 7, 2017


전 세계가 북한을 두려움으로 지켜보고 있는 동안에도 한국인들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다. 북한이 핵무기들을 실험해도, 심지어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에도 서울에 있는 학교, 병원, 서점, 꽃집, 극장과 카페는 평상시처럼 문을 연다. 어린아이들은 노란 스쿨버스에 올라 타 창밖의 부모에게 손을 흔들고 고학년의 학생들은 교복 차림으로, 아침에 감아 아직 머리가 젖은 채로 버스에 올라탄다. 연인들은 꽃과 케이크를 들고 카페로 향한다.


하지만 이 차분함은 한국인들이 정말로 겉으로 보기처럼 무관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전쟁의 공포를 초월한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수십 년 동안 축적된 긴장과 공포는 우리 내부 깊이 파고들어 있으며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잠깐씩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한국인들이 신중하게 차분함과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는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북한의 존재를 전 세계 어느 국가보다 더 구체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연하게도 독재와 독재 치하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별하기 때문에 선과 악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전체적으로 상황에 대처하려고 노력한다. 누구를 위해 전쟁이 벌어지는가? 이런 유형의 오래된 질문은, 생생하게 느껴지는 현실로서 지금 바로 우리와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촛불이라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도구를 통해 사회를 바꾸고자 원했을 뿐이며, 이를 결국 현실로 만든 사람들, 약하고 순수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인간적 고결함을 지닌 수천만 명의 사람들은 매일 카페와 찻집, 병원과 학교의 문을 열며 매 순간 새롭게 밀려오는 미래를 위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누가 평화가 아닌 다른 시나리오를 말할 수 있겠는가?


[저작권자: 뉴스프로, 기사 전문 혹은 부분을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십시오.] 

https://thenewspro.org/2017/10/12/while-the-u-s-talks-of-war-south-korea-shudders/

매거진의 이전글 거울: 나와 당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