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거주 공간이자 가족으로 좁게는 나 자신이자 넓게는 우주이다. 엔터테이너 이효리가 자기 자신을 소길댁으로 칭할 때의 '댁'은 집 댁(宅)이고, 가족의 가 또한 집 가(家)이며 우주는 집 우(宇)에 집 주(宙)를 쓴다. 이처럼 집은 지리적 위치나 물질적 실체에서 나아가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네이버 웹툰 〈집이 없어!〉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집'은 상징물로서 가족, 보호자, 인생의 동반자를 나타낸다.
민족 대명절 설날에 나는 집에 돌아와 집에 관한 잡지를 읽으며 집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있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
한창 낯선 사람 사랑하기에 열중했었다. 소개팅을 했다는 말이다. 처음 보는 이 사람을 내가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소개팅으로 사랑할 상대를 찾는 걸까? 긴장이 풀리고 지친 마음으로 집에 오는 길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은 왜 소개팅에 나왔을까? 지금부터 2~3년 만난다 치면, 그 뒤에는 결혼을 원하는 걸까? 그럼 나는 왜 소개팅을 했나? 1인 가구를 꿈꾸지 않았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면 꿈에서 한 발짝 멀어지는 기분이다. 아니다. 나는 외로운 거다. 실용적이진 않지만 지적 유희를 가져다주던 대화 상대가 있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진부하지만 실용적인 얘기들로 휴게 시간을 메운다. '나의 세계'의 유일한 거주민인 나는 이주올 사람을 적극 모집 중이다.
그는 똑똑하되 가르치려 들어서는 안된다. 진중하면서도 재밌어야 하고 재미있는 한편 가벼워서는 안 된다. 나와 대화가 잘 통해야 하지만 다른 여자들과도 너무 잘 통하는 나머지 여자사람친구가 많은 것은 별로이고, 그렇다고 친구가 아예 없는 것은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의미이니까 싫다. 나와의 관계를 중요시하면서도 내가 전부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좋은 대학을 나와서 나쁠 건 없다.(매우 좋다는 의미이다.) 교양 있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동시에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나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 내가 이해하는 글의 미묘한 차이에 공감하는 감수성을 지닌 그가 예민하지 않고 무던한 사람이기를 바란다. 애연가는 안되고 애주가도 안되고 키는 커야 하고 얼굴은 잘생겼는데 그중에서도 곱상하게 생겨야 한다.
이쯤에서 사랑에 대한 나의 비뚤어진 환상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사랑이 '똑똑하고 사교적이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에게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에 등장하는 연인들은 대개 똑똑하고 사교적이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젊은이들이다. 불행은 그들의 사랑을 돋보이게 할 장신구에 불과하다. 이를 보고 자란 내 사랑에는 조건이 너무 많다. 낯선 사람 사랑하기는 난항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면 어느덧 집에 도착한다. 만 1세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기까지 적을 두고 살아온 곳이다. 우리 동네는 유달리 이사가 없다. 두세 학교를 같이 다닌 이들도 많고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같이 나온 친구도 있다. 내 친구는 모두 오래된 친구이고 새 친구는 거의 없다. 내가 사는 집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마을로 확장되는 동안 울타리는 견고해졌다.
역시나 10년 이상을 알고 지낸 친구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다. 친구와 헤어지는 길에 생필품은 꼭 한 번에 다 떨어진다는 얘기가 나온다. 독일에서의 짧은 자취 생활을 돌이켜본다. 그래, 꼭 그러더라. 독일에서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집안일이었다. 단순하고 정직한 삶이었다. 내가 밥을 하지 않으면 나는 밥을 못 먹는다. 나는 매일 끼니를 만들고 먹어치우고 씻어냈다. 독일-오스트리아-에스토니아-이란-한국의 국경이 부엌 싱크대와 화장실 변기에 씻겨나갔다 세워지기를 반복한다. 내게 집은 배를 채우는 공간이었지만 삐쩍 마른 오스트리아인에게는 욕정을 채우는 공간이었다. 5주 동안 4명의 여자가 찾아왔으며 두 번 이상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우리에게 '집'이라는 공간의 역할은 '사랑'의 의미만큼이나 달랐다. 우리는 우리가 아니되 여전히 64호로 묶여있었다.
학교에서 64호로 가는 중에 종종 마트에 들른다.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정류장에는 개를 데리고 앉아있는 노인과 유모차를 끈 엄마가 있다. 나와 함께 그들도 버스에 탄다. 10여 분간 같은 버스에서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러다 집 앞 정류장에 버스가 서면 나는 내린다. 내가 집과 학교와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는 자유와 동일한 것을 그들도 갖고 있다. 유모차에 탄 아이뿐 아니라 그들의 키우던 개마저 한국보다 더 나은 이동권을 보장받고 있다. 그들의 집은 버스를 타고 내가 사는 정류장에 들렀다가 더 멀리 지평을 넓힌다. 너무나도 이질적인 내가 독일에 받아들여진 것처럼.
명절이 되면 다들 집에 돌아간다고 한다. 요즘은 이전같지 않다. 당일치기하는 집도 많고 대부분의 쇼핑몰이 연휴 내내 영업한다. 하루만 쉬는 음식점도 많다. 사람들은 가족단위로 모여서 이곳저곳을 다닌다. 명절에 집에서 가족을 만나는 거나 밖에서 친구를 만나는 거나 그게 그거지. 둘 다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자리이니. 꽁꽁 싸매고 걷는데 거리에 아이들이 쏟아진다. 가게 앞에 앉아있는 아이, 지하철에 말 거는 아이, 전시에 실증내는 아이……. 시끄럽다고 속으로 번거로워하다가 문득 내가 너무 박해졌다고 반성한다. 내가 자란 유년에는 내가 내내 울어도 싫은 소리 하는 어른 한 명 없었다는데. 친절한 스쳐 지나가는 이웃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고 보니 길에서 이토록 많은 어린이를 만난 것은 처음이다. 이 어린이들은 다 어디에서 온 걸까? 이들이 누비는 집은 어디일까? 그 틈에 혼자 무릎을 쳐다보는 여자의 집은 또 어디일까?
What is your name? 과 함께
Where are you from? 을 묻는 것은
이름과 마찬가지로 그의 출신, 그의 집이 (자신의 선호도에 상관없이)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개체가 집단으로 영역을 확장시키는 사회화 과정은 내 집 밖의 타인을 향한 적개심을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나' 아닌 외부를 향한 공격성이 '우리'가 아닌 타자를 향한 배타성으로 전환되는 과정일 뿐이다.
민음사 편집부, 『한편』 13호 「집」(2024), 23면
집안일은 집 안팎을 구분한다. 우리가 사는 곳은 집이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집안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갈 때에 육체로만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과 사회적 자아가 다른 영혼에, 다른 사회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 모든 곳이 우리의 집이다. 터전을 잡고아이를 돌보고 환경을 가꾸고 우주를 생각하는 것은 모두 집안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