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고나다, 〈빅 볼드 뷰티풀〉(2025)
이 글은 영화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 떠 있다
― 장석남, 〈배를 매며〉 일부 발췌
재미있게 보았던 〈애프터 양〉의 감독 코고나다가 새롭게 내놓은 작품 〈빅 볼드 뷰티풀〉이 개봉했다. 영화 내용은 하나도 모르고 갔는데 알고 보니 주인공 데이비드가 이전 작품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였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배우 마고 로비는 세라 역을 분했다. 휴머노이드의 삶을 다룬 영화 〈애프터 양〉과 비슷한 내용일 줄 알았는데 완전히 새롭다. 사람의 상상력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는 게 놀랍고, 실은 〈애프터 양〉만큼 좋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보았는데 그만큼 좋았다.
장석남 시인은 〈방문객〉이라는 시에서 한 사람이 오는 것은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그의 일생이 오는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시적 표현을 시각화한다. 낯선 두 사람이 점차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서로의 과거를 함께 방문한다. 자신의 슬픔과 기쁨과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과 그리움이 있는 마음의 문을 연다. 그 시가 포착하는 장면을 두 눈으로 생생히 보는 기분이다.
나는 문에 대해서는 그다지 얘기하고 싶지 않다. 벽처럼 새긴 문. 가두기도 하고 연결하기도 하는 문. 경계는 이미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을 풀어볼 때 주제로 다룬 적 있다(一). 대신 〈2025 더 아트플라자 을지폴리 by IBK〉에서 김상욱 교수가 강연한 〈물리학자의 눈으로 본 미술〉의 내용과 버무려 믿음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어제의 강연과 오늘 본 영화의 연결고리를 생각해 보고 싶다.
교수님은 5만 원짜리 지폐와 종이 쓰레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5만 원짜리 지폐와 종이쓰레기의 차이는 그 가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뿐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오늘 내 통장 잔고를 보면서 정말이지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을 가득 채운 언젠가는 쓰레기가 될 물건들을 보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에게 꼭 필요해 보였던 울 코트는 무겁고 불편해서 이제는 장롱에 자리를 차지하는 모습을 보기만해도 불편한 기분이 든다. 내 피부를 환상적으로 가꿔줄줄 같았던 화장품은 이미 지난번 쓰레기를 버릴 때 같이 정리했다. 그리고 나는 내일도 지친 걸음을 걸으며 새로운 쓰레기를 갖고 싶어 안달이 난다.
데이비드의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특별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특별하다고 착각했다고, 옛날의 자기 자신에게 돌아갈 수 있다면 너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고 말할 거라고 장담한다. 그는 사실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심장병을 앓았고, 그의 부모님은 그런 그를 너무나 소중하게 여겼다. 이를 알게 된 데이비드는 과거의 자신에게로 돌아가 말한다. 너는 특별하다고.
세라는 데이비드에게 상처 주기가 두려워 관계를 시작하지 않으려 한다. 극이 끝나면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행복하지 않을까봐 무서워한다. 그러나 그들의 크고, 대담하고, 아름다운 여정은 여정의 가치가 그 끝이 아닌 함께 새로운 문을 여는 매 순간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 여정이 크고, 대담하고, 아름다웠던 까닭은 그들이 마지막에 열었던 문에 있지 않다.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도 계속해서 열었던 그 모든 문들 때문이다.
예술을 볼 때 우리는 변화를 본다. 동양화에서 사라진 그림자에 어떤 화가는 주인공 자리를 준다. 사진기의 발명으로 스냅샷같이 불안정한 구도의 그림이 등장한다. 빛을 포착하고 대상을 해체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아니라고? 과거에 여성과 장애인과 아동은 인간이 아니었다. 흑인을 때리는 행위는 죄였는데, 오늘날 개를 때리는 잘못과 마찬가지로 재물에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약속은 상당 부분 관념에 의해 지지받는다. 비트코인은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시이다.
르누아르의 1892년작 〈피아노 치는 소녀들〉을 두 번이나 볼 기회가 있었지만, 뒤쪽에 앉은 소녀를 유심히 본 적은 없다. 세라의 엄마는 이 작품을 좋아했는데, 악보를 넘겨주는 행위가 이타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이타심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그런 걸 발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빛나는 포장지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좋아했다.
데이비드는 특별하다. 그의 부모는 그를 특별히 여기기 때문이다. 특별하다는 인식, 어떤 게 중요하고, 다른 것보다 우선하는 가치를 지니는지는 객관적 사실이나 관계보다는 주관적인 감정에 의해 결정된다. 사랑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주관을 객관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힘은 믿음에 있다. 오직 사랑한다는 믿음으로 다음 문을 열 수 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무엇을 각별히 여길 것인가?
당신의 여정을 크고, 대담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줄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