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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Oct 26. 2022

그리운 모래에게 그리운 나에게 1: 공무와 모래와 나비

최은영, 「모래로 지은 집」

이 글은 책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공무


공무의 가족


왜 병든 사람들이 가족을 만드는 걸까.

최은영,『내게 무해한 사람』, 문학동네(2018), 109면


공무는 가족들로부터 상처를 입었다. 공무의 가족들은 모두 병든 사람들이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병든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만든 가족이 된 형도 병들었다. 공무도 그들의 가족이었으므로 공무도 병들었다. 공무는 어머니에게서 극단적인 두 감정을 느낄 것이다. 하나는 괴로워하는 어머니를 더 적극적으로 감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망이다. 그런 극심한 온도차로 인해 마음에 금이 가고 그로 인해 다시 괴로울 테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공무는 자신의 비겁함을 후회했지만 그런 아버지와 형에게서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어머니에게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최은영, 앞의 책, 127면




空無


사람은 변할 수 있어. ...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은 변할 수 있어. 남을 변하게 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자기 자신은.

최은영, 앞의 책, 136면


공무는 글을 잘 쓰고 사리분별도 잘하며 자신의 앞길을 어떻게든 개척해내어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또 애쓴다. 그런 공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다. 자신을 가장 괴롭게 한 가족들의 모습이 실은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또한 그들로 인해 망가지는 느낌을.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공무는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믿어야 했다. 가족들을 변하게 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공무 자신은 변할 수 있다고 믿고 싶었을 거다.

나는 공무라는 별명이 空無를 뜻한다고 생각한다. 불교 용어인 공무는 "모든 사물에는 그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본성이 없음.(표준국어대사전)"을 의미한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을 독자적인 본성보다는 자신의 노력과 의지에 따른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을 담은 것 아닐까?




모래와 공무


공무는 필사적으로 모래를 사랑하면서도 모래의 마음을 거절한다. 닉네임을 공무로 짓고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그렇게 애썼지만 그도 알았을 거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형의 모습도, 나약한 어머니의 모습도 자신의 일부임을 말이다. 그리고 망가진 자신의 모습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을 거다. 다른 한편으로 공무는 자신이 모래의 고백을 거절해도 모래가 자신과 관계를 유지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랬기에 모래가 자신을 떠나지 않도록 거절한 거겠지. 모래와 오래오래 함께 볼 수 있지만 자신을 다 알아버리지는 않을만한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인지 식별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의 장단점을 뜯어보기에는 먼 그의 정지된 사진 속 모래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 떠날 테니까. 모래가 그 사실을 확인하고 떠난다면 난 감당할 수가 없어.

최은영, 앞의 책, 168면
공무는 시든 잔디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모래와 공무의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모래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공무의 마음은 나의 마음과 얼마나 비슷하고 또 얼마나 다를까. 나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난 너랑 모래가 잘 되길 바랐었어."
나는 그 말을 하고 한 뼘 옆의 공무를 쳐다봤다. 공무는 이해한다는 듯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이러는 편이 나아."

최은영, 앞의 책, 168면


괴로워하는 모래, 점점 아파오는 모래를 보며 공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공무가 모래와의 이별을 두려워하여 자기중심적인 선택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공무는 병든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병들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모래와 더 가까워지면 모래마저 병들지도 모른다고 겁먹었을 수도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로 인해 형, 그리고 자신 또한 병들어버렸으니까. 사람은 완전함이 아니라 불완전함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지만, 나비가 그랬듯 공무 또한 자신의 불완전함이 두려웠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사랑할 수 있다는 것도,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함 때문에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최은영, 앞의 책, 168면



다른 이유는 공무가 바라보는, 공무의 시선으로 보정된 모래가 실제 모래보다 더 건강해 보인 것에 있다. 그는 모래가 다시 회복할 거라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래가 무엇을 하자고 했을 때 공무가 돈이 없다고 불평한 것으로 보아, 나비가 그랬듯이 공무도 모래의 고통을 무겁게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모래를 거절해도 모래가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나비의 눈에 그랬듯이 공무의 눈에도 모래는 반짝거리고 늘 따스한 사람이었을 거다. 공무가 찍은, 그의 시선에 담긴 모래가 말해준다. 카메라 렌즈를 거치지 않고서는 자신의 따뜻한 눈길을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 공무가 애틋하다. 그의 사랑은 마치 그의 사진처럼 빛을 담고 있지만 조용하고 삭막하다.


공무는 자고 있는 모래를 바라봤다. 내가 맞은편에 앉아 있다는 것도 잊은 듯이 그렇게 한참 동안 모래를 봤다. 공무는 모래를 보는 일에 굶주렸던 사람처럼 보였다. 빤히 뜯어보는 것도 아니고 대충 훑어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정하고 따뜻한 시선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는 못 볼 사람의 얼굴을 보듯이, 눈에 담아 두고두고 꺼내봐야 할 얼굴을 보듯이 공무는 모래를 봤다.

최은영, 앞의 책, 144면
무표정하게 있어도 찡그린 표정을 지어도 응달에 앉아 있어도 어쩐지 모래가 등장한 사진에는 어떤 빛이, 온기가 머물렀다. 사진들 안에서 모래는 물결 위에 반사된 빛처럼 반짝였다.

최은영, 앞의 책, 120면






모래


관계 의존


"난 공무만큼 널 생각해."
모래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 말을 했다.

최은영, 앞의 책, 118면


모래는 천리안에 올라온 글들이 모두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고 생각해서 댓글을 아주 성심성의껏 달았다. LA에서 모종의 일이 있었는지 관계에 굶주렸던 것 같다. 모래는 이 모임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모래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오래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모래는 매일 공무를 생각하고 또 매일 나비를 생각한다. 의지와 의존은 한 끗 차이다. 모래는 관계에 의존했다.




벼랑 끝 로프


"그렇게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돌아서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모래가 말했다. "우리의 모든 대화가 그저 예전의 모방이었다는 기분이." ... "그저 예전의 우리를 흉내 내고 있었던 거야. 그것도 열심히. 공무도 알았겠지."

최은영, 앞의 책, 159면


모래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마음 하나 없이 함께하는 거다. 모래는 모든 건 변한다고 생각해왔지만 함께하는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모래에게 가장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모래와 공무는 그저 예전의 자신들을 흉내 내고 있었고, 나비는 모래를 약간 귀찮아했다. 그리고 모래는 바보가 아니기에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모래가 사랑한 공무와 나비는 사라졌다. 그들의 물질성은 남아 있어고 그걸 확인한 모래는 외로웠다.


단지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 외로워지기 싫어서, 남들 사는 것처럼 살고 싶어서 진짜 마음 하나 없이 함께하는 사람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게 나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이었는데. 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될까.

최은영, 앞의 책, 141면


아무래도 이것이 모래가 세상을 떠난 이유 아닐까? 모래에게는 두 손이 있었고, 그 두 손을 잡아줄 사람은 공무와 나비뿐이었을 테니. 벼랑 끝에 달린 모래에겐 그들이 로프였다. 로프는 단지 모래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안도감을 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연결되어 있을 때뿐이다.(163면 참고)



모래가 말했듯, 사라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기억에 남은 그 사람은 어디론가 이미 떠났고 관계는 변화한다. 당연하다고 해서 괜찮은 것은 아니기에 모래는 외로웠다.


"그래도 사람은 사라져." 내 말을 듣고 모래는 그렇게 대답했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은 없어. 사람의 물질성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최은영, 앞의 책, 162면




외롭다고 말한다고 해서 널 공격하는 건 아니야


나도 사람이야. 그것도 너무 불완전한 사람이야. 외롭다고 말한다고 해서 널 공격하는 건 아니야.

최은영, 앞의 책, 166면


아무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며 자기 자신을 나비나 강무에 대입하고 자신보다 나은 처지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모래에 대입하지 않았을까? 나도 많은 부분에서 그랬다. 원래 자기 연민이 제일 쉬운 법이다.


그러나 모래의 괴로움도 공감할 수 있다. 모래는 마르고 가장 연약해 보이지만… 관계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하루 종일 곱씹어서 그런지 변화에 민감했다. 모래의 저 말이 이해된다. 나는 대학 이름이 그랬다.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나는 그냥 내가 아니라 XX대생이 되었다. 소중한 나의 친구들과 이전처럼 말이 잘 통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면 나는 슬펐다. 나를 이해해주던 사람들이 모두 나를 떠난 듯한 외로움을 느낀다. 그들에게 있어 나의 불평은 모래의 배부른 투정이다. 내가 좋은 대학에 다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듯 나도 삶의 어려움이 있고, 내 학벌은 어려움을 이겨내는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의 이런 속내를 그저 덮어둔 채 그대로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이런 구질구질한 밑바닥까지는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크다. 그리고 항상 후자의 마음이 이긴다. 그래서 그들이 나를 이해하지 않도록 내버려 둔다.




모래


나의 자아를 부수고 다른 사람을 껴안을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최은영, 앞의 책, 152면


모래는 강무와 나비를 사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자아를 부수고 다른 사람을 껴안았다. 나비는 그럴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랑하기 위해 자아를 부숴야만 한다면, 자아를 부순 게 사랑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모래는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다. 강무가 어렸을 때 본, 신문지 위에 쪼그리고 앉아 고기를 굽고 있던 젖은 등을 한 사람처럼 말이다. 끊임없이 자아를 부수는 자기 삶의 모순과 외로움을 합리화해야 했다.


어쩌면 그때 그녀는 자기에게 그 모든 게 다 사랑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몰라. 그 말이 거짓이고 얕은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제대로 된 위로조차 할 수 없었던 외로운 사람에게 어떤 비난을 할 수 있을까.

최은영, 앞의 책, 156-157면






나비


나비의 시선


애쓰고 애쓰고 또 애써온 시간이 그애의 얼굴에 남아 있어서 나도 그애를 대할 때는 불성실하고 싶지 않았다. 무성의하게 공무가 이런저런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싶지 않았다.

최은영, 앞의 책, 115면


나비는 공무에게서 유대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비가 그랬듯 공무도 힘들었으니까 말이다.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애틋한 마음으로 공무를 이해하려 한 듯하다. 누군가 자기를 이렇게 바라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나비가 보기에 모래는 걱정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모래는 애정과 부러움의 대상이다. 나비는 모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자기가 아프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 태도가 거슬렸다. 그전에는 이렇게 맞은 적이 없었나? 그애의 커다란 교복과 마른 몸, 붉고 일그러진 작은 얼굴이 불쾌하게 다가왔다.

최은영, 앞의 책, 111면
관대함은 더 가진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태도라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비싼 자동차나 좋은 집보다도 더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은영, 앞의 책, 118면




대가 없는 이해


그냥 길 가는 고양이에게 나비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들이 좋아서 나비라고 했다고. 화를 내면서, 악을 쓰면서 나비야, 나비야, 하진 않잖아,라고. 그래서 나도 너를 부를 때 나비야, 나비야 하고 어쩐지 다정하게 불렀던 것 같아.

최은영, 앞의 책, 176면


마지막으로 남긴 모래의 편지는 얼마나 나비의 낯을 뜨겁게 하는가? 모래는 나비가 왜 나비라고 별명을 붙였는지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비에게 다정하게 불러주는, 나비가 원하는 것을 손쉽게 내어주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모래는 나비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모래는 나비의 불완전함을 알았고 그를 보듬어주려 했다. 모래의 편지를 통해 나비는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지난날 자신의 과오를, 자기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확인하게 된다.


내 마음속, 그 모든 확신이 적힌 카드들을 들춰 보면서 나는 그 카드의 뒷면에 쓰인 말들을 읽었다. 나는 다그치는 사람,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 오해하고 단죄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받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 누구보다도 모래에게 마음으로 기댔던 사람, 이 모든 사실을 부정했던 사람……

최은영, 앞의 책, 180면




죽음을 대하는 나비의 태도


그의 죽음을 이야깃거리고 삼고 싶지 않아서였다. 선배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서든, 내 마음을 위로받고 싶은 이기적인 이유에서든 선배의 죽음을 이야기로 삼는 순간 그의 고통은 마음을 자극하는 동정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도 동정받는 걸 원하지 않는다. 선배의 삶이 그저 가여움으로, 억울함으로 결론지어지고 그의 이름이 그저 학대받은 피해자로 대체될 수는 없었다.

최은영, 앞의 책, 135면


서술자 나비는 모래의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모래의 편지에도 그저 LA에 다시 간다고 쓰여 있고 나비는 다시는 모래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직감을 했다는 정도의 말만 있다. 사실 누군가의 죽음은 이 정도의 느낌이다. 기약 없이 멀리 떠났다는 생각만 들지, 이 세상에서 아예 사라졌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 나비는 모래가 동정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것 같다. 침묵은 죽음을 대하는 나비의 방식이었다.





그리운 모래에게 그리운 나에게 2: 모래로 지은 집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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