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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Sep 21. 2022

운명

강신재, 「젊은 느티나무」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는 근래 읽은 소설 중 가장 구미가 당긴다. '젊은'이라는 형용사에 이끌려서 빌려보았는데 짐작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소설이었다. 자신의 의붓오빠를 사랑하게 된 숙희의 이야기이다. 소녀 시절의 풋풋한 애닳음만으로도 흥미가 돋는데 심지어 금지된 사랑이라니! 그러나 다 읽고난 뒤 이 작품을 천천히 곱씹게 되는 것은 사랑의 표현법 때문이다.




사랑하면 지는 거다.


이 소설의 서열은 거칠게 말하자면 바로 윗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누군가를 혼자 사랑할 때 마음속에는 자연스러운 서열관계가 생긴다. 관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대방은 갑이 되고, 하염없이 흔들리는 내쪽은 을이 된다. 작가는 이 갑을관계를 형제간의 전통적 상하관계와 연결지었다.


어쨌든 그는 그로부터 나를 숙희라고, 쉽고도 간단하게 불러오고 있다.

강신재, 『젊은 느티나무』, 문학과지성사(2020), 113면


'그'를 무어라고 부르면 마땅할까.
오빠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운명이다.

강신재, 앞의 책, 111면


현규는 숙희의 오빠이므로 숙희를 이름으로 부른다. 손윗사람은 아랫사람과의 관계가 어떻든 그저 이름으로 부르면 그만이다. 그러나 손아랫사람은 윗사람을 호칭으로 불러야만 한다. 이 호칭은 관계를 특정한 방향으로 정의 내린다. 즉, 숙희는 '오빠'라고 불러야만 한다. '오빠'라는 말에는 나의 가족, 나의 형제라는 정의가 포함되어 있다.


이 글의 단독 서술자 숙희의 시점에서 생각해보자. 현규를 사랑하는 숙희의 입장에서 현규는 갑이 되고 숙희는 을이 된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관계는 서로를 부르는 말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이렇게 형제간의 관계와 사랑으로 인한 관계를 중첩시킴으로써 유사성이 강조된다. 더욱이

호칭에 관해 면밀히 짚고 넘어감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둘의 사랑은 '금지된 사랑'이라는 점을 결코 잊을 수 없게 한다.




갑을관계는 호칭에서뿐만 아니라 소설 여기저기에서 드러난다.


"뭐 먹을 거 좀 안 줄래?"

강신재, 앞의 책, 103면


별안간 그의 팔이 쳐들리더니 내 뺨에서 찰깍 소리가 났다. (중략) 전류 같은 것이 내 몸속을 달렸다. 나는 깨달았다. 현구가 그처럼 자기를 잃은 까닭을. 부풀어 오르는 기쁨으로 내 가슴은 금방 터질 것 같았다.

강신재, 앞의 책, 127면


현규가 숙희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방식은 숙희를 부릴 때 드러난다. 또는 뺨을 치는 장면을 통해. 철저히 갑이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다. 그러나 이렇게 분명한 갑을관계임에도 숙희의 가슴은 기쁨으로 부푼다. 형제관계와 달리, 이 관계는 다만 에로스적 사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둘의 관계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흐른다. 숙희가 끝끝내 현규를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 데서 '운명에 대한 저항'을 관찰할 수 있다. 그 이유를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와 현규는 그런 숙희를 눈감아줌으로써 동조하고 있다.


내 편에서는 그를 오빠라고는 도저히 부를 수 없었다. 처음에는 너무 생소하여서, 그리고 나중에는 또 다른 이유들로.

강신재, 앞의 책, 113면


하지만 이 운명이라는 것이 참 오묘해서, 때로는 괴로움에 몸부림치지만, 운명이 없었다면 숙희는 현규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선후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운명이 있다

2. 운명으로 인해 인물이 (그들 간의 관계가) 존재한다

3. 인물이 운명을 부순다


운명이 부수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운명이 존재해야 한다. 이 소설에서 둘의 관계는 형제가 되었다는 '운명'적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숙희의 사랑은 그들의 남매 관계에 의존한다. 숙희는 이를 아주 잘 알기에 엄마의 부재로 현규와 단둘이 집에서 살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하여 시골로 떠났다.


현규에 대한 감정은 언제나 내 맘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너무나 고통스럽게 여겨질 때에는 여기 오지를 말았더면 하고 혼자 중얼대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는 않는다. 나는 만약 내 생애에서 한 번도 그를 만나는 일이 없이 죽고 말 경우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가슴이 서늘해지기까지 한다.

강신재, 앞의 책, 115면




숙희의 바람대로, 또는 숙희의 두려움대로 운명은 부수어진다.


현규였다.
그는 급한 비탈을 올라오고 있었다.

강신재, 앞의 책, 130면


위의 장면은 내내 관계의 우위의 있던 현규와의 관계가 전복되는, 그야말로 전율이 흐르는 순간이다. 이제 숙희는 언덕에서 현규를 내려다보고 있다. 기존의 갑을관계가 깨지고 새로운 관계가 다져졌다.


좁게 보면 형제관계가 깨어지고 연인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넓게 보면 조금 다르다. 그동안의 모든 갑을관계, 형제관계에 더하여 숙희가 을이 되었던 사랑 관계가 깨어지고 숙희가 갑, 현규가 을인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관계가 만들어졌다. 형제관계와 유사한 서열을 가진 기존의 사랑 관계와 정반대의 새로운 갑을관계가 형성되었다.


새로운 관계는 그들의 상황에 걸맞은 '만남을 위한 헤어짐'이라는 표현처럼 반대되는 것투성이다. 형제관계와도, 기존의 사랑 관계와도 반대된다. 기존의 운명과도 반대된다. 운명의 부서짐과 탄생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런 그들의 맺음은 숙희가 기대고 있는 '젊은 느티나무'에서 약속된다. 느티나무의 꽃말은 운명이다. 그들은 아직 자라고 있는 젊은 느티나무처럼 이제 막 운명을 틔웠다.


그러니 앞서 언급한 선후관계에 순환성을 부여해야 한다.


1. 운명이 있다

2. 운명으로 인해 인물이(그들 간의 관계가) 존재한다

3. 인물이 운명을 부순다

1. 새로운 운명이 생긴다.


이렇게 완성된 운명의 순환고리는 운명의 탄생과 깨어짐을 무수히 반복하며 이어진다.


"애초에 그렇게 혼인을 정했더면 애 고생을 안 시키는걸……."
어느 날 옆방에서 할머니가 우시며 수군수군 그런 소리를 하시는 걸 듣고 놀랐다.
"그럼 우리 숙희는 안 태어났을 것 아뇨. 공연한 소릴……"

강신재, 앞의 책, 119면


엄마와 무슈 리, 그리고 아버지의 관계는 언뜻언뜻 언급만 된다. 그래도 흩어진 단서를 꿰맞추어보면 그 순환성을 확인할 수 있다.


1. 엄마-아버지의 관계가 있음

2. 엄마-아버지의 관계로 인해 숙희가 태어남

3. 엄마-아버지의 관계가 부서짐 (이유는 알 수 없음)

1. 엄마-무슈 리의 새로운 관계가 발생함

2. 엄마-아버지의 관계로 인해 현규-숙희의 형제관계가 발생함

3. 숙희가 운명에 저항함

1. 숙희-현규의 연인관계가 정립됨

...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부서지고 발생하는 것이 운명인가, 아니면 순환고리가 운명인가? 운명을 부수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오랜 욕망이라는 사실이 떠오르는 한 편, 사람에게 부서지는 것을 과연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변주되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 속에서 '관계있음'은 그대로였듯이, 천륜을 거스른 그들에 대한 방패로서 바깥의 운명이 천천히 움직이는 걸까? 느티나무의 더딘 성장처럼 아주 서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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