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삶의 양식이라는 표현을 보면 개성은 모두 흩어지고 세상만사 꼭 같게만 흘러가는 것 같다. 박완서는 아들을 먼저 여의고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괴로워했지만, 하필 그게 자신이 아닐 건 무어냐고 말했다. 이 수필집을 읽는 동안 작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얼마나 닮았는지, 나의 어머니의 것이, 또 할머니의 것이 얼마나 비슷한지 하나님이 사람들을 틀에 찍어낸 것도 같다.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었다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장 27절
보편성은 실은 엄청난 것이다. 나의 가치가 이 세상에 모래알만 하다는 기분은 때로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삶이 이 보편성에 기대어있다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고 크나큰 축복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와 일면식도 없는 작가의 글을 읽고 위로를 받을 수도 있고, 또 작가처럼 말이 많지 않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기분을 대충 짐작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계속해서 살아가고, 이내 나의 삶이 끝날 때에 남겨진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이어나갈 것을 알 수 있는 건 다들 그래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감당하지 못할 책임감에서 벗어나 듬뿍 정도 사랑도 주고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우리의 사랑이, 그 사랑의 믿음이 나약한 나도 너도 아니고 하늘의 섭리에 기대고 있다니 마치 거대한 나무에 뿌리를 둔 것처럼 마음이 든든하다. 언제고 제자리에 있었을 믿음이 존재가 너무나 생소해서 그 커다란 것을 이제야 발견했다는 사실이 아까울만큼…….
올겨울의 희망도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봄이고, 봄을 믿을 수 있는 건 여기저기서 달콤하게 속삭이는 봄에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세계사(2021), 27면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박완서, 앞의 책, 216면
그의 소망대로 그의 글은 진실되었다. 자신의 얄궂고 옹졸한 마음까지 솔직하게 드러내어서 내가 함부로 읽어도 되나, 싶을 정도이다. 작가는 1931년,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기도 전에 태어났는데 이렇게나 공감을 하고 마음을 기울여 읽게 되는 자신을 느낄 때마다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이 온몸으로 다가온다. 소재와 주요 사건이 역사에 있을 뿐, 그 시대를 살아온 할머니의 마음은 어느 것 하나 닳거나 낡은 구석이 없다.
그것과 별개로 나는 언젠가 할머니가 되는 게 두려운 적 있다. 이별의 아픔이 너무나 커서 나는 무서울 지경이었다. 할머니가 되려면 늙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족, 친구, 연인, 물건들, 고향, 집, 그 밖에 내가 마음을 쏟고 사랑을 주었던 모든 것들로부터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나가야 한다. 그들이 내 삶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그들로부터 떨어져나간다. 아무리 매달려도 뚝 떨어진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은 할머니는 없다. 나는 우리 할머니가 대체 어떻게 그 세월을 견뎠는지, 나는 제정신인 할머니가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박완서 선생님은 슬픔에서 기쁨을 찾아내고 죽음을 희망으로 치환한다. 우리의 삶은 정해져있을까? 운명일까? 우리의 남은 수명이 계단 오르듯 차근차근 단계별로 소멸하는 걸까 아니면 고무줄처럼 늘기도 했다가 한 순간에 줄기도 하는 걸까. 우리는 피상적으로 나의 삶을 이야기할 때 무엇이든, 그 길이나 또는 행로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하곤 한다.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내 수명이나 삶이 일정 부분 고정되어있다는 가정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
그러나 아직도 죽음은 나에게 희망이다. 그 못할 노릇을 겪고 나서 한참 힘들 때, 특히 아침나절이 고통스러웠다. 하루를 살아낼 일이 아득하여 숨이 찼다. 그러나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는 하루를 살아낸 만큼 내 아들과 가까워졌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저만치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을 죽음과 내 아들과의 동일시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면 요새도 가슴이 설렌다.
박완서, 앞의 책, 261면
추가 없으면 미도 없듯이, 슬픔이 있으니까 기쁨이 있듯이, 죽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살았다 할 것인가.
때로는 나에게 죽음도 희망이 되는 것은 희망이 없이는 살아 있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완서, 앞의 책, 264면
나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다. 요즘 유행하는 유튜브도 잘 모르고 아직 검색할 때에는 줄글이 편하다. 좋아하는 책, 음악, 영화 따위도 대개 10년도 더 전부터 좋아하던, 그러니까 최소한 10년 전에는 나온 작품이다. 평소에는 나의 이런 구식 취향을 개의치 않지만 가끔은 내가 대체 왜 이러나 싶기도 하다. 왜 나는 남들이 좋아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까, 왜 나는 남들이 아름다워하는 것을 아름다워하지 않을까, 왜 나는 그런 것들에게서 기어코 결점을 찾아내어 주지도 않은 정을 거둬버릴까…….
나는 현란하게 흥청대는 첨단의 소비문화 한가운데서 미아가 된 것처럼 우두망찰했다. 그때 그 미아의 느낌은 공간적인 게 아니라 시간적인 거여서 어딜 봐도 귀로나 출구가 보이지 않는 막막하고 절망적인 것이었다.
박완서, 앞의 책, 266면
그러니 노년에 이르러 자꾸만 옛 것을 찾고 좋은 건 다 옛 것이라고 말하는, 나보다 더한 구시대적 작가를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다. 작가의 옛날과 나의 옛날은 어마무시한 시차를 두고 있지만. 더불어 나 이전에 살던 모든 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해온 그 마음이 곳곳마다 켜켜이 쌓여 있음을 느낀다. 어쩌면 이렇게 사랑이 부족한 내가 그것들을 사랑하게 된 것은 그 마음이 너무나 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선생님마저 옛날로 가신 것이 못내 섭섭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