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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Nov 02. 2022

그리운 모래에게 그리운 나에게 2: 모래로 지은 집

최은영, 「모래로 지은 집」

이 글은 책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운 모래에게 그리운 나에게 1: 공무와 모래와 나비와 이어집니다.


모래로 지은 집


연인


그리고 다시 공무가 찍은 모래의 사진이 나왔다. 모래는 편의점 앞에 서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화면은 온통 굵은 눈송이로 가득 찼는데 모래는 한구석에 서 있었다. 나나 공무가 봐야 모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작은 피사체로, 반쯤은 눈송이에 가려져 있었다.

최은영,『내게 무해한 사람』, 문학동네(2018), 143면


경찰서 사진을 열 장쯤 지나자 어둠 속의 경찰서 건물 사진이 나왔다. 건물의 네모난 창마다 형광등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그 사진에서 나는 옥상 위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봤다. 너무 어두워 사람의 형태만 분간할 수 있었지만.

최은영, 앞의 책, 170면


어떤 사진이 공무의 것인지, 모래의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둘이 찍은 사진들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최은영, 앞의 책, 169면




별명과 이름


세 사람의 닉네임인 '나비'와 '공무'와 '모래'는 모두 연약하고 흩어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공무와 모래의 실명이 처음 불리는 순간들은 그들이 현실에 부딪쳐 상처로 깨져나갈 때다. 직업군인 아버지의 분신같은 첫아들로서 사법고시 실패의 고통을 공무에 대한 폭력으로 풀었던 공무의 형이 교통사고를 당해 중태에 빠졌을 때, 모래는 병원에서 떨고 있는 공무를 향해 거듭 "현우야"(124쪽)라고 부른다. 공무의 첫 휴가 때 취한 모래 대신 전화를 받은 '나'는, 모래의 권위적인 남자친구에게 "은아 친구 선미"(144쪽)라고 모래와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이 순간들은 세상 앞에서 그들의 세계를 방파제처럼 세워보아도 이를 온전히 지켜나가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어떻게든 침범당하고 파괴될 거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만 같다.

최은영, 앞의 책, 310면




사라지지 않는 것


"너희랑 있으면 편해. 사람들이랑 있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편할 수 있지? 그런 생각도 들고. 이게 얼마나 갈까."
"넌 꼭 오래 살아본 사람처럼 말한다. 얼마나 갈지가 그렇게 중요해?"
"응. 나는 그래."

최은영, 앞의 책, 114면


물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변형될 뿐. 산화되어 재만 남는다고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물질은 아주 작은 부분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한다. 그 과학적 사실은 어린 나에게 세상 어떤 위로의 말보다도 다정하게 다가왔었다.

최은영, 앞의 책, 162면


왜 변해야 돼? 왜 지나야 돼? 공무 사진처럼 그냥 어느 순간에 그대로 남고 싶기도 했어.

최은영, 앞의 책, 131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 떠날 테니까. 모래가 그 사실을 확인하고 떠난다면 난 감당할 수가 없어.

최은영, 앞의 책, 168면


셋은 닮았다. 처음부터 닮은 부분도 있었고 함께하면서 닮아가는 부분도 있었다. 그들은 나름의 가족이었다. 강무, 모래, 나비 세 사람은 모두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것을 원한다. 비단 이 세 사람만이 아니라 누구나 그럴 것이다. 행복한 관계, 행복한 추억에 멈춘 채 영원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그들이 사용하던 천리안이나 미니홈피는 문을 닫았다. 그 당시 우리가 느낀 행복이나 충만감은 아주 약한 충격으로도, 심지어 아무런 계기 없이도 쉽게 사라진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렇기에 자신의 삶과 상대방을 사랑하게 된다. 희소성이 높으니 말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제목 모래로 지은 집은 모래가 주축이 되어 나름의 가족을 일궈낸 불완전한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은 것을 원하지만 모래로 지은 것처럼 쉽게 사라지고 마는 그들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래성이 아니라 모래집인 것은 이 소설이 가족에 관하여, 또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관하여 다루었기 때문이다.




참회록


나는 무정하고 차갑고 방어적인 방법으로 모래를 사랑했고, 운이 좋게도 내 모습 그대로 사랑받았다.

최은영, 앞의 책, 181면


나는 이 소설이 작가의 참회록처럼 느껴진다. 내가 느꼈던 귀찮음에 섞인 죄책감이나 오만했던 자신에 대한 깨달음, 나의 시기심,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애정으로 덮지 못한 몰이해, 그 모든 불완전함을 알고 사랑해준 사람의 소중함이나 그리움, 죄책감이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실제로 경험하지 않고도 이런 묘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내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는 존재는 얼마나 소중한가. 대가 없는 사랑은 용기가 필요하다. 모래가 그립다.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최은영, 앞의 책, 17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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