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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진 것들이 아주 많다. 천부적인 특출난 재능 한 가지는 없지만 잔재주가 친구들에 비해 많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직업으로 돈벌이가 되는 취미들은 아니지만 참으로 좋아하는 것들이다. 글을 보고 사색을 하고 때론 글을 쓴다. 전시를 보고 찌르르 한 영감을 받기도 하며 그림을 끄적이며 색칠공부를 한다. 건강한 음식과 재료에 대해 생각하고 오감놀이하듯 요리를 한다. 여행지에서 건축물을 감상하며 도시 근교 어딘가 10년 뒤 집을 짓는 꿈을 꾼다. 모두 어린 시절부터 밥이 나오니 돈이 되니 소리를 듣던 내 시간을 즐기던 취미다. 전혀 특별하지 않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런 취미. 이것들과는 관련 없는 직업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는지 오랜 시간 같은 취미를 즐기며 살아간다. 여가생활을 하며 얻어진 작은 지식과 눈썰미는 사회생활을 하며 일을 하며 간혹 요긴하게 쓰였으니 놀이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하고 가끔 부가가치도 창출해낸 셈이다. 내 취미 참으로 기특하다.
대부분의 현대인이 그렇듯 나 역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다. 어쩌다 접한 일이 해보니 적성에 맞았고 하다 보니 재미도 있어 지금까지 계속하게 되었다. 현실적인 직업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운이 꽤 있었다고 생각한다. 적성에도 안 맞고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친구들을 보면 나는 상대적으로 나은 상황이리라. 일하며 재미도 보람도 있었고 직업적인 면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단단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를 몇 십 번 악물면, 남 몰래 눈물 몇 번 훔치면 10년은 더 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수명이 길지 않은 이 업에서 남은 시점을 돌이켜보니 앞이 참으로 막막하였다.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있는 것은 달랐고, 내게 남은 직업의 시간, 긴 수명이 남겨준 세월, 경제적 문제와 건강, 행복 등... 어린 시절 이 나이쯤 당연할 것이라 여겼던 이상적인 안정이 내게는 하나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서 보는 안정감은 회사라는 간판 뒤 숨어 연명하던 한 달 치 수명이었다. 이제는 체력도 떨어지고 있어서 옛날만큼 자신감과 패기도 없어졌다. 늘 하고 싶은 게 참 많았었는데 에너지 가득 찼던 스스로가 아득하고 희미해져 갔다. 내가 사라지고 있었다.
앞에서 괜찮게 포장했지만 사실 사회에서 갈리고 갈려 잿더미가 된 지 오래였다. 퇴근한다고 깔끔히 OFF가 아니라 매달 푼돈 몇 푼 쥐여주고 내 인생을 통채로 좀먹고 있었다. 정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 만신창이가 되어 불면 곧 없어지기 직전이었는데, 나는 참으로 질기고 지독한 사람이라 곧 죽을 것 같은데 숨은 끊기지 않았다. 잿더미 맨 아래 마지막 하나의 불씨가 남아있었던 걸까. 어느 날도 똑같이 껍데기만 움직거려 퇴근했는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남은 게 재뿐이더라도 어디서 불어오는지도 모르는 바람한테 이대로 사라지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사라지려고 악착같이 버티고 살았던 게 아니다. 설사 이미 죽었다 한들 이렇게 연명하고 싶지는 않다. 내게 남은 게 잿더미뿐이라면, 이 잿가루 한 톨이라도 모조리 다 팔아서 다시 시작해야겠다. 나는 그렇게 나를 팔아 나를 세워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