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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연 Mar 11. 2024

04. 지각하지 않으려고 - 지하철에서

워킹맘의 숨 쉴 시간, 달리기


초겨울 출근길 지하철에서 내릴 준비를 하며 멍하니 서있었다. 평소처럼 운동화를 신고 셔츠, 슬랙스에 외투를 걸친 차림이었다. 야근이 많았던 주라 그날따라 몸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지하철 소리는 시끄러웠고 규칙적이었으며 사람들은 대부분 이어폰을 끼고 있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전형적인 평일 아침이었다. 그때 누가 다가왔다. 회사 동기인 진우였다. 진우는 옆동네에 살아서 버스 노선은 다르지만 가끔 지하철에서 마주치곤 했다.      


그날은 진우가 지각할 것 같아서 문이 열리자마자 먼저 뛰어간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지금 몇 시 인지도 모르고 넋을 놓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9시 7분 전이었다. 환승역에서 지하철을 하나 눈앞에서 놓친 게 컸다. 진우는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재빨리 몇 계단씩 뛰어올라 위로 사라졌다. '남자라 그런가, 나보다 어려서 그런가 잘 뛴다.' 생각하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도 뛰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등굣길에 버스가 떠나려는 걸 보고 뛰어가다가 정류장에서 철푸덕 넘어진 적이 있었다. 무릎이 다 깨지고 피가 철철 났지만, 내 꼴사나운 모습을 목격한 학생들이 가득 찬 버스가 떠날 때까지 구석에서 피해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리 학교 교복은 영화 ‘친구’에 나오는 삼각 하얀 칼라에 곤색 상하의였다. 넘어지면서 그 플레어스커트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 후로 ‘생활형 뜀박질’은 내게 선을 넘는 일이 되었다.      


나름대로 러너가 되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준비운동을 안 한 상태에서 무리하면 부상이나 당하겠지 싶었다. 그저 평소보다 잰걸음으로 지하철에서 동시에 내린 한 무더기의 사람들보다 조금 앞서 왼쪽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가 앞사람을 추월한다는 느낌으로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 개찰구부터는 뛰다시피 걸어갔다. 지하철 역 입구를 나서자 이제부터는 평지니까 달려도 될 것 같았다.      


회사 앞 횡단보도까지 체감상 100m 정도를 성큼성큼 뛰어갔다. 몇 미터 앞에서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는 걸 본 순간 스피드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내달았다.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 감이 들었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횡단보도를 뛰어가며 옆을 보니 진우였다. 신호등에 걸려 서있었던 거였다.

"어, 뭐야 뭐야. 어떻게 따라잡았지? 달리는 사람이라 다른가 봐요."

정말로 놀라는 눈치였다. 나도 진우가 진작에 앞서갔을 걸로 생각하고 있었던 지라 그 상황이 신기하였다.

"난 그냥 지하철역 입구부터 뛰었어."

"어, 그런가 보다. 저는 계단에서 뛰니까 힘 다 빠져서 막상 밖에서는 빨리 못 갔어요."


무릇 직장인이라면 회사를 코앞에 두고 재미를 느낄 새가 없을 텐데, 우리는 뛰면서도 한번 크게 웃었다. 일단의 회사 사람들에 섞여서 엘리베이터를 탔으니 그날은 방어에 성공했다.


야근으로 한동안 달리지 못했어도 한번 만들어진 러너의 몸은 생활형 달리기 정도는 소화할 수 있었나 보다. 사실 달리기 앱에서 인터벌 트레이닝을 시키는 날은 못 들은 척 그냥 똑같은 속도로 달리기도 했었다. 예를 들어 10분씩 3번의 달리기를 하는데 매 달리기 끝에 2~30초 정도 최대 속도의 80% 수준으로 달리는 거다. 내가 마라톤을 할 것도 아니고 굳이 스피드 훈련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날 인터벌 트레이닝의 구체적인 쓸모를 찾았다.      


내가 러닝을 모르던 때와 같이 터덜터덜 걸어갔더라면 다음 신호등에 횡단보도를 건넜을 거고, 그랬다면 아침부터 일상의 퀘스트라도 공략한 것 마냥 소소한 성취감을 느끼지도 못했을 거다. 출근시간을 준수한 회사원은 사무실 자리로 스르륵 미끄러지듯 들어가 기분 좋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나는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아이스 음료를 마시지 못하는데, 그날은 몸이 후끈했다. 어제와 오늘, 한 달 전과 오늘의 출근길이 다르지 않은 직장인에게는 오래 기억에 남을 아침이었다.      


그날부터 횡단보도에서 녹색 신호등이 깜빡거려도 자신 있게 달려 길을 건넌다. 이제 달리기 굴욕은 떠나보내도 될 것 같다. 나는 달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게 ‘러닝’이건 ‘생활형 뜀박질’이건 내 두 다리는 넘어지지 않고 나를 튼튼하게 지탱하며 달려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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