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써보는 글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사소한 생각들에 대하여 (Prologue)

by baewoong
생각해보면, 중학생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판타지라는 장르에 순식간에 매료되어 그 당시 PC통신을 기반으로 급성장한 온갖 온라인 소설들을 섭렵하다 보니, 문득 “나도 이런 재미있는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중 3짜리가 만들어 낸 빈약한 설정들로 만들어진 서사는 늘 용두사미로 끝을 맺곤 했다. (그래서 내 기억으로는 한 작품이 3~4편을 넘겼던 적이 없었다. 빈약한 설정 탓이었는지, 지구력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간간히 PC통신 판타지 게시판에 올려서 다른 사람의 평가를 받았을 때의 기억이 좋게 남아있었는지, 내 글이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 지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은 내가 글을 써 내려가는데 조금이나마 동력이 되기도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다른 취미 활동에 빠지다 보니 책과 글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내가 가장 ‘글’에 가까웠던 적은, 교내 문집의 편집부로 잠시나마 활동했던 때였다.


편집부에는 교지에 실릴 여러 종류의 글이 필요했고 선생님들과 다른 학생들의 글을 무수히 공모받았어도, 할당된 문집의 분량에는 조금 미치지 못했다. 당연히 그 분량의 책임은 고스란히 편집부로 되돌아왔다. 어떤 글로 채워야 할지 편집부의 고민이 컸던 그때, 대체 무슨 치기였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한 번 써보겠습니다"는 용기를 냈다.


A4용지로 20장 정도의 분량이 필요했지만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많은 양의 글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때나마 빠져있었던 판타지 소설과 나름 작문의 절정에 다다랐던 중학생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서였을까. 20장의 글은 하루 이틀 정도면 금방 써 내려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약 한 달 정도의 고민과 작문의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마침내 한 편의 SF(라고 우기는) 단편을 완성했고 편집부 담당 선생님께 내 글을 보여드렸다. 지금 내가 하는 일로 따지면, 제안서를 광고주에게 보내기 전에 내부 피드백받는 것 같은 숨 막혔던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선생님은 나에게 한 마디를 하셨다. “너 글 좀 쓰네.”


그 말을 들은 나는 ‘해냈다’는 기분이 들거나,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만한 운명의 반환점을 만난 것 같은 충격을 느끼지 못했다.


단지 그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만 들었다.


왜 나는 내가 잘하는 것에 대해 칭찬을 듣고도 그 순간의 희열에 집중하지 못했을까.

20년 가까이 지나고 되돌아보니, 어쩌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었던 그 순간에 더 집중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남는다.


이 글을 왜 시작했는지 모른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은 순간을 마련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을 남기고 싶다는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일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길고 긴 인생에 스스로의 기록을 남기고 싶은 치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내가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딸리는 필력을 커버하기 위해 단지 손이 가는 대로 쓰고, 내 인생에 기억에 남을 만한 손꼽히는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글로 쓰는 것’밖에 없으니, 그냥 막연하게 써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돌아보면 내 삶이 엄청나게 도전적이었던 적도 없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흰 바탕의 문서에 글자를 입력하는 것 밖에 없어서 일 수도 있다.


이 글의 끝이 어떻게 맺어질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써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