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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르도농부 Oct 10. 2022

와이너리 숙소로 이사하던 날

잊을 수 없는 뽀이약 케밥 집

"다니엘, 지금 당장은 8시 출근해서 4시나 5시 퇴근하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수확이 시작되면 양조팀은 오전 조와 오후 조로 나눠서 근무하게 돼요. 오전 조는 6시부터 시작하고 오후 조는 밤 10시에 끝나요"

"저는 불가능해요. 가장 빠른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은 7시 40분쯤이고 5시 20분이면 보르도로 출발하는 마지막 버스가 떠나요."

"알아요. 그래서 말인데..."


 끝을 흐리는 파비앙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딱히 해결책도 안 보였기에 양조팀에 적합하지 않으니 포도밭으로 가라는 건가? 그도 아니면 그만두라는 건가?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다니엘에게 좋은 소식일 수도 있어요. 마르키 달렘 밭 바로 앞에 있는 작은 건물 본 적 있어요?"

"네 그쪽 밭일하러 갔을 때 작은 건물 본 것 같아요."

"쁘띠 마르키라고 하는 건물인데 거긴 원래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거든요. 9월부터는 수확 때문에 바빠서 그곳을 우리가 닫기로 결정했어요. 그리고 그 건물 2층에는 게스트 룸이 2개가 있는데 마르졸렌[1]을 설득해서 다니엘이 그곳에서 머물 수 있게 확답받았습니다."


 다른 의미로 가슴이 철렁했다. 출퇴근 스트레스가 가장 심했었는데 자신들의 편의 때문이긴 했지만 결국 와이너리 숙소에서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너무 좋다고, 도와줘서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건넸다. 날듯이 기뻤다. 한 달만 지낼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이 붙긴 했지만 그게 어딘가. 몇 초 전만 해도 잘리는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는데 와이너리 바로 옆에 지낼 수 있다니. 거기다 마르졸렌이 나를 마르키 달렘 양조팀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정말 코앞에 직장이 있는, 무려 트람에 버스로 5시간이던 통근 시간이 걸어서 5분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금요일에 애몬[2]으로부터 키를 받아들고 토요일에 한 달 동안 사는데 필요한 짐만을 큰 캐리어에 싸서 버스를 타고 마고 마을로 향했다. 주말에는 사실 처음 타보는 버스에는 평소와는 다른 이들이 버스에 탔다. 집시 같아 보이는 이들도 탔고 그들이 내려서 내 캐리어가 있는 짐칸을 열때마다 훔쳐가는 것이 아닌가 조마조마하면서 창밖을 내다보다가 마르키 달렘 바로 앞의 정류장에 무사히 도착했다.


 와이너리의 큼지막한 정문은 정규직들이 열 수 있었고 나는 쁘띠 마르키 쪽에 난 쪽문으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오래돼 보이는 나무 문을 열쇠로 열고 바로 앞에 있는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방은 2개였고 어디를 고르나 상관은 없었다. 다른 고객을 받거나 하지 않기에 한쪽 방에 짐을 두고 한쪽 방에서 잠을 자도 무방했다. 둘 중 그래도 더 큰 방을 선택했고 간단한 옷가지 등 짐을 정리했다. 방은 꽤나 넓어 큰 캐리어를 활짝 열어도 공간이 한참 남았다. 파란색 이불이 덮여있는 킹사이즈 침대 양쪽 옆으로 작은 테이블과 전등이 있었고 침대 머리맡의 벽 쪽에 조명이 두 개가 더 달려있었다. 침대 오른쪽으로는 거울 달린 화장대와 옷걸이, 옷을 수납할 수 있는 장이 있었고 침대 왼편으로는 낮은 책꽂이와 두 개의 큰 창 사이에 라탄 재질로 된 큼지막한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침대 맞은편으로는 세면대와 샤워실이 있었다. 그리고 이 쁘띠 마르키의 가장 좋은 점은 작은 방과 큰 방 사이에 있는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면 바로 포도밭과 아름다운 마르키 달렘의 샤또가 보인다는 점이다. 얼마 전 개봉한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영화를 보며 주인공이 매일 보던 포도밭이 부러웠었는데 내가 마치 그 속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구경을 마치고 짐 정리를 마쳤을 때는 얼추 해가 지고 있었고 제레미에게 전화가 왔다.


"살뤼 다니엘! 이사 다 끝났어? 우리 5분 내로 도착하는데 맞은편 주차장에서 기다리면 되지? 와인 가져온 건 방에 가져다 두면 되나?"

"살뤼 제레미, 응 짐 정리 다 끝났어. 여기 건물에 냉장고가 없더라고. 주차장에 있으면 내가 와인 받아서 사무실 쪽에 냉장고에 넣어두면 될 것 같아."

"오케이 곧 봐."


 라베고스 숙소에 지내고 있는 제레미와 막심이 쁘띠 마르키로 이사 온 것을 축하하기 위해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다. 주차장으로 나가니 제레미와 막심이 딱 봐도 묵직한 봉투를 들고 반기고 있었다. 3병을 가져왔는데 모두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기에 직원들이 식사하는 공간으로 가 냉장고에 와인을 가득 채우고선 제레미 차에 탔다. 황토색의 차량으로 10년은 족히 넘은 것 같은 비주얼을 가진 아주 작은 차량이었다. 네 명은 도저히 탈 수 없는, 세 명도 뒷자리 앉은 사람이 구겨져서 타야 하는 그런 차량이었다. 한두 번 얻어 타긴 했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차였다.


 쁘띠 마르키에는 조리를 할 수 있는 시설이 없었고 이 마을에서 먹을 곳이라곤 단 두 곳, 거기다 지금은 둘 다 닫은 상태라 차를 타고 멀리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까스뗄노라는 사람이 꽤 사는 마을로 가 OJ 벤또라는 일식집으로 향했다. 딱히 내가 아시아인이라고 배려해줬다기보다는 순전히 제레미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선택한 곳이었다. 메뉴가 꽤 있는 집이었는데 7가지 정도의 스시와 마끼, 캘리포니안 롤, 스프링, 카츠동과 야끼 소바, 텐동까지 있는 곳이었고 주방에 아시아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뿌리 깊이 있는 본능이 이런 곳에서는 스시는 절대 안돼라고 외치고 있었고 맛이 없어도 그럭저럭 먹을 수 있는 카츠동을 시켰다. 막심과 제레미는 스시를 시켰고 간단히 맥주를 한잔했다. 역시나 맛은 그저 그랬지만 프랑스에서 귀한 음식을 먹는다며 꾸역꾸역 입에 넣고 있을 때 제레미와 막심이 몇 번이나 스시를 권했고 손사래를 치다가 연어 초밥을 한 조각 먹어봤는데 나쁘지 않았다. 손님이 그리 많지는 않은 곳이라 중간에 젊은 쉐프로 보이는 프랑스인이 나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일본을 단 한 번도 안 가봤다고 한다. 프랑스는 재미있는 곳이었다. 보르도 시내에 있는 유명 한식집 중 한 곳은 중국인이 경영하는데 맛이 그저 그런데도 손님들이 넘쳐났고 이곳은 아시아 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프랑스인이 일식집을 하고 있었다. 맛이 없진 않아 충분히 만족하고선 내 방으로 향했다.


 마르키 달렘의 맞은편은 정부 건물이었기에 5시 이후에는 차량이 없어 그곳에 차를 대놓고선 방에 들었다. 냉장고가 건물에 없는 탓에 직원 식당까지 계속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게 불편했지만 이사 첫날 와인 메이커 친구들이 찾아와 축하해주니 그저 행복했다. 제레미 친구네 와이너리에서 가져온 스파클링 와인 뷜 드 까이유를 시작으로 보르도 시내에서 사 온 샴페인 퓌메-타쌍, 빠쎄 꽁뽀제, 달콤한 쏘떼른느 레 뚜렐 드 까이유, 그리고 막심이 삼촌네서 가져온 비유 피노 데 샤헝트 "레 호씨에흐"[3]까지 4병을 순식간에 비웠다. 여름휴가를 다녀오며 충분히 재충전도 되었고 마지막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는지 프랑스어 울렁증이 많이 없어져있었다. 막심이 영어를 잘 못해 프랑스어로 대화했는데 술이 들어가다 보니 평소엔 그렇게 나오지 않던 말들이 편안하게 나왔다. 샴페인 퓌메-타쌍은 독특한 이름의 샴페인을 만드는데 그 이름들이 프랑스어의 문법 시제였다. 가장 기본급 샴페인은 '단순 과거' 오늘 마신 샴페인은 '복합 과거', 그리고 가장 시그니처 등급의 샴페인은 '전미래[4]'였다. 피노 데 샤헝트라는 술은 처음 접해봤는데 꼬냑에 포도즙을 섞은 리큐르라고 한다. 꼬냑에 섞다 보니 알코올이 높은데 막심이 가져온 리큐르는 17.5도였다. 발효를 거치지 않은 포도즙을 섞어 약간의 달달한 느낌에 높은 알코올에 홀짝홀짝 마시다가는 훅 갈 것 같은 그런 맛이었다. 남자 셋이 모여 한참을 수다 꽃을 피우다 4병을 내리 비우고선 제레미와 막심은 새벽 한 시 반이 돼서야 라베고스로 돌아갔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지만 월요일부터 수확이 시작되고 아직 마르키 달렘 셀러는 청소가 끝나지 않았기에 일요일 근무를 하게 됐다. 8시에 출근하는데 7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아침까지 먹었는데도 시간이 남으니 이게 바로 삶의 질인가 다시 한번 파비앙과 마르졸렌에게 감사했다. 며칠 전까지 했었던 양조통과 양조기구 세척을 하는 날이었다. 마르키 달렘의 양조 공간은 라베고스와 비교했을 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먼지 한 톨 없을 것 같이 너무나 깨끗했고, 공간이고 뭐고 양조통들이 비좁게 끼어있던 라베고스와는 다르게 마르키 달렘은 오크와 스테인리스 양조통들이 적당한 거리를 벌리고 나란히 도열해 있었다. 지하 1층에서 올려다보면 1층 난간은 용의 비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고급스러움을 물씬 풍기는, 손님을 맞기에 적합한 양조장이었다. 이번 휴가 때 방문했던 와이너리 중 샤또 마고나 브란-깡뜨냑, 라스꽁브[5]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에서도 파니와 같은 팀이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르노라는 이름의 팀장이 내려와 업무를 알려줬다. 오늘은 셋이 근무하고 내일부터는 한 명이 더 와 넷이 근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셋이 하기엔 씻어야 할 것들이 꽤나 많아 저녁 7시가 다 돼서야 끝이 났다. 좋은 점은 프랑스는 노동자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노동권이 강력하게 보호되었기 때문에 추가 근로에 대해서는 칼같이 지켜서 돈을 지급해준다는 점이었다. 얼마 전 포도밭에서 일할 때도 되도록이면 회사에서 추가 근로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희망자들만 추가 근로를 받았고 그마저도 여름 혹서기가 오며 추가 근로는 없어졌었다. 평일 추가 근로 1시간당 120%, 토요일은 150%, 그리고 일요일은 200%였다. 어차피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시골 건물에 박혀있으면서 차도 없어 어디 가지도 못하는데 돈을 두 배로 주며 일을 주는데 안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곧 와이너리에서 정신없이 바쁠 양조 시기가 올 것이고 그때는 매주 주말마다 일해야 할 거라고 했다. 일이 끝나고 식당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서 지는 해로 붉게 물든 하늘과 그 아래 우뚝 서 있는 아름다운 성을 보며 방으로 들어갔다.




 양조장은 완벽하게 준비가 끝난 상태로 월요일 아침을 맞았고 8시에 거의 맞춰 어슬렁거리며 출근한 포도 선별장에는 열댓 명의 대부분 처음 보는 세조니에들이 있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마르키 달렘 밭 수확이 시작되는 날이었고 1, 2차 선별을 엄격하게 하기 위해 많은 인원이 출근해있었다.


 포도를 수확하면 으깨지지 않게 높이가 낮은 통에 수확한 뒤 차곡차곡 쌓아 와이너리로 보낸다. 이렇게 받은 포도를 선별장에서 진동 테이블에 올려 1차로 송이채로 불량이 있는지 선별한다. 밀듀로 쪼그라들거나, 충분히 자라지 않았거나, 벌레가 있거나, 등등의 이유로 품질에 미달한 포도를 1차로 추려낸다. 1차 선별과정을 통과한 포도송이는 '제경기'라는 기계에 들어가 포도알만 따로 분리되어 2차 선별 진동 테이블로 간다. 2차 선별대에서는 포도 한알 한알을 보고 다시 한번 벌레가 먹은 포도가 있는지, 안 익은 포도가 있는지 등등을 보고 품질 미달 포도들을 걸러낸다. 여기까지가 18명씩 붙어서 작업하는 포도 선별 작업인 것이다.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 필요 조건은 좋은 포도를 길러내는 것이고 기른 후에 만드는 과정에서의 첫 관문이 바로 선별인 것이다.


 파니는 1차 테이블에 배정되었고 나는 2차 테이블에 배속되었다. 진동하는 테이블에 수천 개의 포도알이 굴러다니며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지나가다 보니 눈이 빠질 것 같이 아파왔고 선별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사람이 손으로 작업하는 속도의 한계 탓에 놓치고 양조통으로 들어가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선별대에서 함께 일하는 이들은 재밌는 친구들이었는데 막간을 이용해 정규직인 세바스티앙이 와인을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별로 안 좋아한다도 아니고 굳이 혐오한다는 표현을 하며 와인에 쓰이는 포도를 분류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 하는 모든 일들이 소중하고 감사했다. 책으로만 보던 것들을 직접 경험하고 하나하나 체득해가는 과정들이. 그렇기에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국내에 와인 업계인들이 앞으로 와이너리에 와서 1년씩은 꼭 일을 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나와 같이 넘어야 할 장벽이 너무 많아 이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여기에서 일당이든 월급이든 받고 일하는 이들은 별생각이 없는 것을 떠나서 와인이라는 것을 혐오한다고 한다.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기본 가설은 항상 모든 분배가 효율적으로 되었을 때를 상정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알 수 있다. 자원의 분배는 효율적으로 될 수 없다. 이들이 살아온 환경 때문에 이들은 와인을 혐오하는 것이고 국내에서 와인을 하는 이들은 자라온 환경 때문에 이런 기회를 취할 수 없다. 이것 하나만을 보고 13시간 비행해가며, 수개월 동안 고생해가며 버텨온 내게는 힘 빠지는 하루일 수밖에 없었다.




 눈이 빠져라 쳐다보며 포도를 선별하는 작업으로 일주일이 지났고 다시 토요일 하루의 휴일이 찾아왔다. 지난주와 달리 양조장에 인원이 보강되어 나와 다른 직원이 일요일에 근무하기로 했고 토요일은 휴뮤였다. 마침 또 휴무였던 제레미와 막심이 찾아왔고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어디 갈 거라는 말없이 따라와 보면 된다는 말만 남기고선 나를 차에 태우고선 한참을 올라갔다. 거의 30분을 차를 몰고 가 어느 성당 앞 주차장에 세우고 내려보니 멀리 '뽀이약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광고문구가 보였다. 그제서야 뽀이약에 온 걸 깨달았고 제레미는 앞장서서 가면서도 계속해서 따라가 보면 안다고 물어보지 말라는 말만 계속했다.


 8시밖에 안 됐지만 벌써부터 여기저기 휘청거리는 취객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며 도착한 삼거리에는 동네 분식집 같은 분위기의 식당이 하나 있었다. 제레미는 이곳을 소개하며 프랑스 전국에서 가장 맛있는 케밥 집이라고 했다. 앙제 여행 때 처음 접하고선 저렴한 가격에 고기도 잔뜩 들어 자주 먹던 음식이었는데 언젠가 한 번 뽀이약 쪽에 정말 맛있는 케밥 집이 있다고 들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전설의 케밥집이 이런 동네 분식점 같은 곳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제레미를 따라 가게 문을 넘었는데 주인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기가 다 떨어졌다고 기다려야 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저녁 장사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고기가 떨어질 정도라니. 우리 모두 여기까지 왔는데 먹고 돌아가야지라는 의견이었고 주인은 고기가 익는데 한 시간 정도가 걸리니 40~50분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예정에 없던 공복에 주변 공원에 가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하필이면 라면 한 봉지 끓여 먹은 게 전부인 점심이어서 그런지 유난히 배가 고팠다.


 가게에서 음료수를 사 와 마셨지만, 허기는 달래지지 않았고 잘 참는 것 같았던 제레미도 이내 배고프다며 불평했고 막심은 어딘가 나사가 빠졌는지 배고프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 겨우 주문할 수 있었고 원래는 내 방으로 가져가서 와인과 함께 먹기로 했었지만 배가 고파 참을 수 없던 제레미와 막심은 가게를 나오자마자 포장지를 뜯더니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케밥이 거기서 거기겠지라고 생각하며 나도 포장지를 풀고 한입을 베어 무는 순간 이곳을 너무 무시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만화에서 보던 '미미'라는 글씨가 머리 위로 그려지는 그런 맛이었다. 지금껏 먹어온 케밥이 모두 부정당했고 앞으로 먹을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게 느껴졌다. 케밥에 와인을 먹겠다는 우리의 계획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케밥 집 근처 광장 의자에 앉은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먹어 치우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다 먹고서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우리는 민망해하며 방으로 돌아와 와인을 마셨다. 케밥을 기다리다 지쳐 졸음이 쏟아졌던 우리는 답지않게 와인 두 병만을 비웠고 그동안 대화 주제는 단 하나였다. 뽀이약의 케밥은 왜 그렇게 맛있는가.


[1] 마르졸렌: 샤또 마르키 달렘과 샤또 라베고스의 여사장

[2] 애몬: 샤또 마르키 달렘의 마케팅 팀장

[3] 뷜 드 까이유(Bulles de Caillou Crémant de Bordeaux), 샴페인 퓌메-타쌍, 빠쎄 꽁뽀제(Champagne Fumey-Tassin, Passé Composé), 레 뚜렐 드 까이유(Les Tourelles de Caillou), 비유 피노 데 샤헝트 "레 호씨에흐"(Dixneuf, Vieux Pineau des Charentes "Les Rosiers”): 모두 와인 및 리큐르 이름

[4] 단순 과거(Passé simple), 복합 과거(Passé composé), 전미래(Futur intérieur): 모두 프랑스어 문법상 시제

[5] 샤또 마고(Château Margaux), 브란-깡뜨냑(Château Brane-Cantenac), 라스꽁브(Château Lascombes): 여름휴가 때 방문 했었던 와이너리들로 각각 그랑 크뤼 클라쎄 1등급, 2등급, 2등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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