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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르도농부 Oct 11. 2022

보르도 농부 와인 양조 이야기 1부

하루 51번의 펌핑 오버

"다니엘! 관 잡아 관! 넘친다! 빨리!"

"저기 와인 샌다. 펌프 멈추고 올라와서 더 잠가야지!"

"드라이아이스 어딨어!"

"넘친다! 펌프 꺼! 파니! 펌프 끄라고!"


 양조가 시작되고 하루에도 수천 리터씩 쏟아지는 포도에 양조장은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10월 1일이 되었고 마르키 달렘 양조팀은 완성됐다. 대장 아흐노와 정규직이자 평소에는 트랙터 모는 업무를 하는 세바스티앙, 나와 같이 며칠간 일해온 파니, 그리고 파니보다 더 어린 기간직 니꼴라에 나까지 다섯 명이 함께 일했다.


 바로 스케줄 근무에 들어갔는데 파니와 니꼴라는 오전 조로 6시에 출근해 3시에 퇴근, 나와 세바스티앙은 1시에 출근해 10시에 퇴근했다. 그리고 첫 주 주말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2개 조가 나눠서 토요일 일요일 하루씩 8시에 출근해 저녁 7시에 퇴근했다. 그 뒤부터는 주말도 스케줄 근무로 토요일과 일요일 모두 오전 조는 8시에 출근해 오후 3시에 퇴근, 오후 조는 2시에 출근해 8시에 퇴근하는 지옥의 스케줄이 시작되었다. 주말까지 돌아가야 하는 스케줄 때문에 와이너리에서도 어쩔 수 없이 쁘띠 마르키에 내 숙소를 마련해줬으리라.


 포도를 수확해 선별까지 마치면 포도는 약한 파쇄 과정을 거쳐 껍질에 상처를 낸 뒤 부드러운 펌프를 통해 각 구획 별로 8,000리터짜리 스테인리스나 오크 발효통으로 이동한다. 키르완에서 사용하는 중력 이용 투입 장치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대장 아흐노는 마르키 달렘에서는 오히려 중력 때문에 과일에 생기는 상처로 섬세한 와인을 만드는 데 방해가 되어 없앴다고 알려주었다. 펌프를 이용해 아래부터 차곡차곡 포도가 깨지지 않게 쌓는 게 풍미 측면에서 더 낫다는 의견이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포도들은 자기 무게 때문에 눌려 과육이 즙으로 빠져나오게 된다.


 이때 바로 발효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잠시간의 보관이 필요하다. 산소에 노출되면 와인이 되기도 전에 식초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보호를 해줘야 하는데 이때 사용하는 것이 드라이아이스다. 높아져 있는 온도를 낮추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방출하는 이산화탄소가 산소를 막아주는 보호막 역할을 한다. 플라스틱 양동이로 6~8개 정도는 부어줘야 하기에 분주하게 뛰어다녀야 했다. 1층으로 나 있는 양조통 뚜껑을 열고 입구를 통해 드라이아이스를 열심히 부어주고 있을 때 지하 1층에서는 펌프 2개가 분주히 돌아가고 있었다.


 포도를 수확하고 선별할 때 세척하는 과정이 없기 때문에 먼지나 불순물 같은 거들이 있고 이를 걸러내 주는 작업을 위해 원래 담겨있는 발효조에서 비어있는 발효조로 액체만 빼내어 온도를 낮춰 보관하며 자연적으로 먼지와 깨끗한 주스를 분리한다. 분리한 깨끗한 액체는 다시 원래의 통으로 집어넣어 껍질과 침용을 하게 두고 분리에 사용한 통은 더러워졌기에 바로 닦아내야 했다.


 그 뒤로는 효모를 활성화하여 통에 넣은 뒤 발효가 진행되는 동안 펌핑 오버라는 작업을 해줘야 했다. 양조장에서 가장 오랫동안 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펌핑 오버는 말 그대로 펌프를 이용해 아래층에 깔린 액체를 위쪽으로 끌어올려 뿌려주는 것이었다. 레드 와인의 색상과 떨떠름한 탄닌을 추출하기 위해 껍질과 액체를 함께 담가두는 것이지만 그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펌핑 오버라는 작업으로 위에 떠 있는 껍질에 주스를 뿌려 추출 효과를 극대화해주는 것이다. 처음 통에 담긴 지 며칠 되지 않은 주스를 뽑아서 색을 보면 분홍빛을 띠지만 3주 정도 펌핑 오버를 한 주스는 짙은 잉크색을 띨 정도로 차이가 달라져 있다.


 수확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이런 작업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한 통당 하루에 3번씩 해준다. 그것도 한 번 할 때 15분 내외로 해줘야 했고 사실 몸이 힘든 것은 없었지만 시간 소요가 많이 되는 작업이었다. 게다가 2인 1조로 한 명은 아래에서 펌프를 켜주고 다른 한 명이 위에서 와인을 뿌려줘야 했지만, 수확 초기에 나와 함께 일하던 세바스티앙이 다른 작업으로 바빠 나 혼자 아래층에서 펌프를 켜고 전속력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와 펌핑 오버 작업을 하다 시간이 되면 다시 뛰어 내려가서 펌프를 꺼줘야 했다. 그리고 옆 통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관을 분리하고 재결합한다고 여러 번 위아래로 뛰어다녀야 했다. 그 덕분에 하루 평균 걸음 수는 2만 5천보, 오르내린 층계는 25층이 넘었고 달리는 당에 초콜릿을 아무리 먹어도 살은 계속 빠지고 있었다.




 오후 조였던 나는 오전에 느지막이 일어나 근처 빵집에서 사 온 바게트에 버터와 잼을 발라 먹고 기사를 쓰다가 점심까지 챙겨 먹고 한시에 양조장으로 출근했다. 양조장 기숙 생활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식사였다. 쁘띠 마르키 건물에는 안전상의 이유로 가스레인지가 없었고 마르키 달렘 건물에 직원들이 식사할 수 있게 마련해둔 식당에도 냉장고와 전자레인지만 있을 뿐 조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처음 프랑스에 올 때 챙겨온 만능 쿠커가 있어 라면을 끓여 먹을 순 있었지만, 삼시세끼 매일을 라면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말이면 세바스티앙에게 라까노에 있는 앙떼르막쉐[1]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 전자레인지용 음식을 사 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부분은 선택할 수 있는 종류가 굉장히 다양했다. 뵈프 부르기뇽부터 라따뚜이, 뽀 또 푸, 리소토, 파스타, 라비올리, 슈크루트, 까술레, 블랑께뜨 드 보[2] 등 고기 요리 등 배를 든든하게 채울 수 있는 메인 음식이 많았다. 이것마저도 돈을 좀 더 아끼겠다고 4인 가족용 큰 제품을 사서 안남미로 만능 쿠커에 밥을 짓고 6번에 나눠 돌려먹곤 했다. 한국에서도 가족과 친구들이 비비고 같은 것들을 잔뜩 보내줘 가끔씩 한식이 당길 때마다 해 먹었다.


 점심을 열두 시쯤 식당에 나가 먹다 보니 파니와 니꼴라도 함께 밥 먹을 때가 많았다. 파니는 매일같이 도시락을 싸서 다녔는데 니꼴라는 가끔은 근처 빵집에서 식사가 될만한 피자 같은 것을 사다가 먹기도 했다. 한 번은 기겁을 하고 놀란 적이 있었는데 파스타 면만 집에서 삶아 와서 전자레인지에 돌린 뒤 치즈를 뿌려서 소스 없이 그냥 먹는 것이었다. 파스타를 해 먹더라도 고기 부스러기라도 있는 볼로네제는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내겐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선 20~30분 정도 와이너리 건물을 돌아다녔다. 언젠가 한 번은 양조장 건물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갔더니 포도밭 전체가 한눈에 조망되는 테라스가 있었고 의자와 테이블까지 있었다. 일몰 즈음 떨어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포도밭을 한눈에 담고 마시는 와인은 얼마나 맛있을까 생각하며 한참은 포도밭을 바라봤다.


 그렇게 양조장으로 출근하면 1시부터 3시까지는 4명이 겹쳐 근무하는 시간이라 나와 세바스티앙이 펌핑 오버 작업을 넘겨받고 파니와 니꼴라는 오전 동안 정리하지 못한 기구들을 열심히 세척해두고선 세시에 퇴근했다. 아홉 시쯤 출근한 아흐노는 다섯 시까지 함께 일하다가 우리에게 일을 맡기고 퇴근했다. 이때부터는 세바스티앙과 둘만 남아 별다른 대화 없이 묵묵히 교대로 펌핑 오버 작업을 해나갔다.


 하루는 퇴근하기 직전, 정리도 일찍 끝냈고 바닥 청소까지 다 끝나고도 시간이 남아 퇴근 시간까지 잠시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세바스티앙은 축구를 좋아해 원래는 주말마다 메독 지역 조기축구회에 나가서 볼을 찬다고 유니폼까지 보여줬다. 그리고선 핸드폰으로 토토 같이 축구 경기 스코어를 예상하는 내기를 한다고 알려줬는데 운이 좋으면 하루에 월급만큼 벌기도 하고 운 나쁘면 그만큼 잃기도 한다고 했다. 그 뒤론 얼굴만 봐도 간밤에 잃었는지 땄는지 알 수 있게 됐다. 그리곤 10월이 끝나고 11월쯤 숲에 가보면 그 유명한 보르도 명물 포르치니 버섯[3]이 자라 수확하러 간다며 내가 관심을 보였더니 다음에 갈 때 연락하겠다고 알려주었다. 세바스티앙은 수염이 항상 까칠까칠하게 얼굴 전체를 덮어있었고 편한 옷에 장난꾸러기처럼 모자를 뒤로 쓰고 다녔다. 와인은 거의 마시지 않고 맥주와 위스키를 주로 마신다고 한다. 프랑스 맥주 괜찮은 것 추천 좀 해 달랬더니 그런 건 먹는 게 아니라고 벨기에 맥주나 먹으라고 한다. 와인을 만들고는 있지만 와인에 대한 뜻이 있어서 양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메독 지역에서 태어났고 돈을 벌기 위해 트랙터를 몰기 시작했고 그러다 양조까지 함께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함께 일하는 파니와 니꼴라는 달랐다. 베떼에스[4]에서 양조학을 배웠고 양조 경험을 하기 위해 보르도의 여러 샤또를 돌아다니며 양조를 하는 것이다. 경험은 아직 많지 않다 보니 아흐노 입장에서는 한 번 더 설명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열정으로 두 눈이 항상 빛나고 있었다. 제레미와 막심 또한 마찬가지였다. 막심은 꼬냑을 벗어나고자 와인 양조를 배워 일하기 시작한 경우였고 제레미는 나와 동갑으로 26살에서야 베떼에스를 들어갔다. 들어가는 과정도 험난했는데 고등학교 수준 정도의 과정이었기에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모든 학교에서 입학을 거절했고 그러다 결국 받아들여진 곳이 쏘떼른느 지역에 있는 샤또 라 뚜르 블랑슈[5]라는 와이너리에서 운영하는 베떼에스였다. 그곳에서 2년 과정을 마치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와인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특히 학교에서 관심 있던 분야가 화학 쪽이었기에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면 자판기처럼 답이 나왔다.


"이 잎이 빨갛게 변해버린 이유는 광합성이 부족해서야."

"우트멍[6]이라고 알아? 와인의 모든 것은 8월에 결정된다고도 하지. 이 8월에 부드러웠던 포도나무 가지가 단단한 사르멍이 되는 등의 변화를 말해"

"왜 이산화황[7]을 젖산 발효가 완료되기 전까지 뿌리지 않느냐고? 이산화황은 미생물들을 싹 다 죽여버리는 살균제라고 봐야 해. 그렇기 때문에 젖산 발효까지 효모가 작용해야 하는 상황에 이산화황이 들어가게 되면 효모의 활동까지 막아버리고 그럼 와인은 발효를 할 수가 없겠지. 이런 이유로 이산화황은 젖산 발효가 끝나야 넣을 수 있어. 그전까지는 드라이아이스로 인위적으로 만들던 발효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던 이산화탄소로 산소로부터 공격을 막아줘서 산화를 늦추는 거지."




 포도밭에서의 수확은 계속해서 날짜를 달리하며 이뤄졌고 포도는 계속해서 쏟아졌다. 10월 1일 처음 양조장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양조통 6개가 채워져 펌핑 오버는 하루 3번씩 총 18번을 하면 됐었다. 그 다음 주인 10월 8일에는 11개, 9일에는 13개, 10일에 16개 그리고 11일 17개까지 차더니 오후에 나머지 2개마저 채워져 19개 통이 가득 차게 되었다. 처음 받았던 6개 양조통은 시간이 꽤 지난 터라 하루에 2번씩만 하면 됐고 나머지 13개 양조통은 하루에 3번씩 해야 했으니 하루에 펌핑 오버만 51번을 해줘야 했다.


 10월 첫 주는 주말도 하루씩 돌아가면서 근무했지만, 그 다음 주부터는 7일 내내 근무하며 팀원들 얼굴에 피곤함이 묻어나왔고 실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지하 1층에서 1층까지 연결된 관의 고무가 빠졌는지 펌프를 틀고 와인이 올라오자마자 분수처럼 뿜어내기 시작하기도 했다. 첫 6개 양조통은 나중에 펌핑 오버가 아니라 펌프를 통해 통 내부를 순환해주는 작업을 해줬다. 이때 1층에 있는 뚜껑을 열어야지만 압력 문제가 없었는데, 실수로 뚜껑 여는 것을 깜빡했다가 스테인리스 통을 고장 낼 뻔도 했다. 파니가 예전에 일했던 곳에서 그런 실수로 수천만 원짜리 통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찌그러진 사고가 발생했다고도 했다. 그런가하면 다른 통으로 와인을 옮기는 과정에서 피곤했는지 관을 제대로 잡고 있지 못하다가 바닥에 그대로 수십 병치 와인을 다 쏟아버리기도 했다.


 다크 써클이 턱 끝까지 내려오고 매일매일 같은 작업을 반복하며 시간은 흘렀고 그사이 계속 된 와인 분석이 진행됐다. 당 밀도를 분석해 어느 정도 알코올이 생겼는지 기록하고 온도를 확인하고 주기적으로 375mL 용량의 병에 와인을 담아 양조 컨설턴트인 미셸 롤랑이 와서 테이스팅한 후 펌핑 오버 횟수나 언제까지 하면 된다 등의 조언을 해주면 새로운 지시사항이 내려오곤 했다.


 와인이 변하는 모습이 궁금했던 나는 아흐노에게 가끔씩 테이스팅해도 되냐고 물었고 주 단위로 통에서 발효가 진행되고 있는 와인을 마셔볼 수 있었다. 테이스팅은 신기하긴 했지만, 마냥 즐겁진 않았다. 발효는 어느 정도 진행돼 단맛은 없었으며 아직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아 깊은 맛이나 밸런스가 잡혀있지 않았다. 또한 속이 비어있는 느낌을 줬는데 여전히 발효 중이었기에 탄산 느낌도 강했다. 아흐노는 농담을 섞어가며 취하지 않게 조심하라고 했다. 알코올뿐만 아니라 이산화탄소 때문에라도 위험할 수 있다고.


 양조장에 갇혀 사는 생활이 지속되면서도 중간중간 짬을 내기도 했는데 하루는 엘리와 조니가 하루 휴무에 와이너리 투어를 예약했는데 함께 갈 수 있냐고 물었다. 아침에 근처 와이너리 한 곳은 갈 수 있었고 마침 예약한 곳이 지난 여름휴가 때 방문 허가를 받지 못했던 샤또 빨메르[8]였다. 오전 10시에 시작해,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었으므로 오랜만에 친구들 얼굴도 볼 겸 함께 하겠다고 했다.


 당시 나는 빨메르에 반감이 상당했다. 슈퍼 세컨드라고 불리며 3등급의 와이너리이지만 1등급에 필적하는 이름값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샤또 마고[9] 만큼은 아니더라도 꼭 방문하고 싶었던 곳 중 하나였다. 여름휴가를 포함해 여러번 방문 요청 메일을 보냈지만 모두 무시당해왔었다. 게다가 이번 방문을 맞아준 담당자는 오만함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너희가 언제 빨메르를 와보겠니 대충 와인이나 먹고 가렴'이라는 태도로 일관하였고 포도밭이나 양조에 대한 질문을 해도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질문을 하려고 말을 꺼내도 중간에 말을 자르며 자신은 포도재배팀도 양조팀도 아니라 모르니 물어보지 말라고 위압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특히 휴가 복귀 후 양조장에 들어오기 전에 FD 질병[10] 검사 때 빨메르 밭에 왔었는데 밀듀로 말라비틀어진 열매라 뒤덮인 넓은 밭을 봤었고 이를 언급하며 올해 피해에 대해 물었더니 화가 난 듯 나를 노려보며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런 대우를 받고 나서 테이스팅하는 와인은 당연히 맛이 없을 수밖에 없다. 세컨드 와인인 알테르 에고[11] 2014년 빈티지와 샤또 빨메르 2008년 빈티지가 각각 나왔고 담당자는 와인을 따라주더니 급한 일이 있다며 급기야 자리를 비우기까지 했다. 우리는 당황해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보고선 와인이라도 마시자며 잔에 담겨있는 와인을 비우고 조금 더 기다렸다. 10분 정도 뒤에 담당자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아직도 가지 않았느냐는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엘리는 와인을 살 수 있냐며 가격표를 받아서 살펴봤지만 다른 샵보다 비싸게 파는 것을 보며 혀를 내두르곤 와이너리를 빠져나왔다.


 최악의 방문 경험을 갖게 됐지만 엘리는 샤또 디켐[12]이 이것보다 더 심했다며 와인을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웰컴 팀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어찌 됐든 샤또 빨메르 한 곳을 더 채우며 마고에 있는 그랑 크뤼는 이제 단 한 곳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샤또 로장-가씨[13]. 엘리와 조니는 오후에 뽀이약 쪽에 와이너리 두 곳 예약이 더 있었고 마르키 달렘 근처 피자집에서 점심을 함께 먹고서 인사를 나눴다.




 와이너리에서 제일 친했던 제레미와도 본격적인 양조 시즌에 돌입하고 나서는 도통 만날 일이 없었다. 제레미는 라베고스에서 오전 조였고 나는 마르키 달렘에서 오후 조였기에 시간을 맞춰 함께 장을 보러 가기도 어려웠었다. 그래도 수확이 다 끝난 12일부터는 서로가 심적으로 여유가 생겨 토요일마다 내 방으로 와 술을 마시곤 했다.


 하루는 세바스티앙이 그르니에 메도꺙[14]이라는 음식을 먹어봤냐고 물어봤었다. 보르도 지방보다 더 작은 메독의 특산물이라니, 먹어봤을 리가 없었다. 궁금증이 일어 먹어보고 싶다며 철자는 어떻게 쓰냐고 물어봤는데 본인도 r이 두 개인지 하나인지 모르겠다고 아흐노에게 물어봤다. 아흐노도 잘 모르겠다며 지나가는 파니와 니꼴라한테 물어봤다. 그 상황이 너무 웃겼던 것은 자국어 스펠링을 모르는 것도 그렇지만 누구 하나 핸드폰으로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r이 하나인지 두 개인지 의미 없는 토론만 계속하고 있었다.


 어쨌든 제레미에게 그르니에 메도꺙이 뭔지 물어보니 하나 사 갈 테니 같이 먹어보자고 했다. 멀리 뽀이약 마을까지 가서 사 온 거라고 생색을 내며 가져온 것은 괴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겉은 쪼글쪼글하게 생겼고 색은 연한 회색을 띠고 잘라냈더니 안쪽도 이상한 초록색과 고기의 분홍색이 섞여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게 했다. 그르니에 메도꺙은 차갑게 먹는 샤퀴트리였는데 메독 지역의 특산 음식이라고는 하나 지역 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그런 음식이었다. 한 설명에 의하면 차가운 앙두이예뜨[15]라고도 불리는데 비슷하게 냄새 때문에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음식이었다.


"음? 나쁘지 않은데?"

"괜찮다고?"

"엄청 맛있는 건 아닌데 생긴 거에 비해서 괜찮은데? 향도 내장 풍미도 너무 강하진 않고."

"으... 너 많이 먹어... 난 못 먹겠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제레미는 자신으로부터 멀찍이 접시를 밀어버리고는 치즈에 와인만 홀짝였다. 쁘띠 마르키에서 담장만 넘으면 바로 아방 갸르드라는 와인샵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윌리스라는 근처 와인 샵보다 인테리어 면에서 소박한 느낌의 샵이었다. 와인 가격도 더 합리적이었고 주인장도 시골 사람 특유의 정이 있었다. 제레미는 이미 여러 번 샵에서 와인을 샀던 터라 안면을 텄고 가면 할인까지 받는다고 했다.


 샵은 약간 조잡한 시골 슈퍼 같은 느낌이었는데 나름 진열해둔다고 했지만 여기저기 와인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었다. 마고 마을에 있는 와인 샵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마고 와인이 많았다. 마르키 달렘도 4~5개 빈티지씩 가져다 놓았고 들어본 적 없는 마고 아펠라씨옹의 와인들도 있었다. 반 이상이 보르도 와인이었고 샴페인이나 부르고뉴 같은 와인들도 있었지만 유명한 와인들 몇 가지만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선 가격이 저렴한 남프랑스 와인과 내추럴 와인이 조금 있었다.


 우리가 함께 마시는 와인은 모두 아방 갸르드에서 사 왔고 많은 돈을 쓰지 않기에 주로 남프랑스 와인을 많이 마셨다. 그르니에 메도꺙을 먹을 때는 샤또 드 카라귀예 꼬르비에르[16] 2016와 르 쁠랑 드 썽스 쥐랑송 섹[17] 2017을 마셨고 다른 날에는 가스꼬뉴 지방의 위비라는 생산자의 3가지 화이트 와인 꼬뜨 드 가스꼬뉴, 꼴롱바르-위니 블랑, 쁘띠 & 그로 망상[18]을 둘이서 다 비웠다.


 이렇게라도 제레미를 만나 회포를 푸니 다행이었다. 포도밭보다 흥미로웠고 일하는 게 즐거웠지만, 일주일 내내 쉬는 시간도 거의 없이 뛰어다니며 일하다 보니 육체적으로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같이 일하는 이들과도 잘 지냈지만 그래도 몇 달을 더 본 동갑내기 친구와 술을 마시며 편하게 대화를 나누니 일주일간 쌓인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적어도 와이너리 감금이라고 표현하는 이 생활이 끝나는 10월 한 달 동안은 잘 버텨내길 스스로 다시 다짐해본다.


[1] 앙떼르막쉐(Intermarché): 프랑스 하이퍼마트 브랜드 중 하나

[2] 뵈프 부르기뇽(Boeuf Bourguignon), 라따뚜이(Ratatouille), 뽀 또 푸(Pot au Feu), 슈크루트(Choucroute), 까술레(Cassoulet), 블랑께뜨 드 보(Blanquette de Veau): 모두 프랑스 전통 요리 이름.

[3] 포르치니 버섯: 쎄프 드 보르도(Cèpe de Bordeaux)라고 부르는 그물버섯으로 보르도의 습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

[4] 베떼에스(BTS): 전문 학업 과정으로 고등학교 수준의 학위로 인정된다. 디종 대학 등에 설치된 양조학과를 제외하고서 대부분 양조는 이 과정을 수료한 뒤 현장에 투입된다.

[5] 샤또 라 뚜르 블랑슈(Château La Tour Blanche)

[6] 우트멍(Aôutement): ‘성숙’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로 8월을 의미하는 Aôut에서 온 단어이다.

[7] 이산화황(So2, Sulfite)

[8] 샤또 빨메르(Château Palmer)

[9] 샤또 마고(Château Margaux): 보르도 마고 지역 그랑 크뤼 클라쎄 1등급 와이너리.

[10] FD 질병(Flavescence Dorée): 직역하면 '누르스름하고 금빛이 나는'이라는 뜻으로 포도나무가 비정상적으로 누런색을 띠는 질병이다. 이 질병이 발생한 포도나무가 3그루 이상 있는 구획은 모든 포도나무를 뽑아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질병이다.
 [11] 알터 에고(Alter Ego)

[12] 샤또 디켐(Château d’Yquem): 쏘떼른느에서 유일한 등급인 특1등급을 받은 최고의 와이너리.

[13] 샤또 로장-가씨(Château Rauzan-Gassies): 보르도 마고 지역 그랑 크뤼 클라쎄 2등급의 와이너리로 메일과 전화, 방문에도 모두 응하지 않아 결국 2018년에 방문하지 못한 유일한 마고 그랑 크뤼 클라쎄 와이너리였다.

[14] 그르니에 메도꺙(Grenier Médocain): 메독 지역의 특산품으로 돼지의 내장으로 만든 차갑게 먹는 샤퀴트리이다.

[15] 앙두이예뜨(Andouillette): 소시지 같이 생겼지만 안에는 내장으로 만든 프랑스식 순대. 특유의 육향이 있어 호불호가 크게 나뉘는 음식이다.

[16] 샤또 드 카라귀예 꼬르비에르(Château de Caraguilhes Corbieres)

[17] 르 쁠랑 드 썽스 쥐랑송 섹(Le Plein de Sens Jurançon Sec)

[18] 위비 꼬뜨 드 가스꼬뉴(UBY N2 Côtes de Gascogne), 꼴롱바르-위니 블랑(UBY Côtes de Gascogne Colombard-Ugni Blanc), 쁘띠 & 그로 망상(UBY Côtes de Gascogne Gros & Petit Mans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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