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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르도농부 Oct 15. 2022

양조장 도비가 자유를 얻은 날

아름다웠던 쏘떼른느 마을

 제르보드 파티가 끝나고 쁘띠 마르키로 다시 돌아와 서둘러 보르도로 나갈 준비를 했다. 4주 만에 감금이 해제되던 날이었다. 중심가에 도착해 저녁 약속을 다녀와 집으로 향했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마침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장-아르노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동안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그는 이런저런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와인 양조 이야기를 한참 이야기하다 사르멍 불길에 엉트르꼬뜨 스테이크 먹은 이야기를 하며 한창 자랑하다가 본론을 꺼냈다.


"저에게 좋은 소식이 생겼어요."

"그래, 어떤 좋은 소식인가?"

"와이너리에서 계약 종료될 때까지 지금 사는 곳에 계속 머물러도 된대요. 내일 짐 정리해서 가려구요."


 그 말을 듣는 장-아르노 표정은 바로 굳어졌고, 믿을 수 없는 말 한마디를 무심히 툭 뱉었다.


"10월 월세는?"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라도 건네주고 꺼냈으면 덜 미워 보였을 말이었다.


"한 달 동안 사용한 것도 없는데 550유로 전부 드려야 하나요?"

"응. 550유로 전부."


 정이 싹 달아났다. 장-아르노의 입장은 당연히 이해가 갔다. 문화 차이겠지만 그동안 아들이 놀러 오면 한식을 해주고 본인에게는 라빵 아 무따흐드[1]를 해줬었다. 한 입 뜨더니 어머니가 해주던 맛이라고 남은 음식마저 싹싹 긁어먹었고 휴가 때마다 눈이 불편한 벨사를 돌봐주며 그저 임대인과 임차인이 아닌, 인간적인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었다.


 적어도 축하한다는 한마디는 먼저 건네줄 수 있지 않았을까. 전기고 가스고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았으니 100유로라도 빼달라고 할까 싶다가도 이미 오만 정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 더 말을 섞고 싶진 않았다. 다음 날 아침이 밝는 대로 크레디 아그리꼴로 달려가 550유로를 인출하고 장-아르노에게 들이밀었다.


 돈을 받자 어제 굳었던 표정은 풀어졌고 입가에 미소가 번진 채 짐은 어떻게 옮길 거냐고 물었다. 버스로 가져가겠다고 말하고선 짐이 너무 많으니 다음 주에도 와서 가져가겠다고 말하고 방으로 들어가 계속 짐을 챙겼다. 버스를 타고 가려면 늦어도 4시 반에는 집에서 출발해야 마고로 돌아가는 막차를 탈 수 있었다.


 그 말에 알겠다고 돌아서더니 거실에서 산드린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방문을 두드린다. 문을 여니 약간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와이너리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짐 다 싸면 말해달라고 한다. 자존심보다는 현실이 먼저였다. 다음 주에 온다고 다 가져갈 수 있을까도 의문이었고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며 짐을 챙기는 건 너무 고생이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저 고맙다는 말 밖에.


 무슨 짐이 그리 많은지 오후 5시가 돼서야 전부 다 챙겨 장-아르노 차에 실을 수 있었다. 출발하기 전, 밖으로 잠깐 나와 해가 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배경으로 7개월 정도 추억을 지닌 집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마르키 달렘에 도착했을 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차를 쁘띠 마르키 바로 옆으로 주차해 짐을 겨우 다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장-아르노와 악수를 나누고 산드린과 비주 인사를 나누고선 보르도로 오면 연락하라는 의미 없는 말을 남기곤 떠났다.




 계약기간이 종료되는 12월 14일까지, 한 달 하고도 반 정도를 쁘띠 마르키에서 더 살 수 있게 되었다. 월세를 아낄 수 있었고 버스비와 통근 시간을 아낄 수 있었으며 기사 쓸 시간도, 제레미와 보낼 수 있는 시간도 더 많이 생겼다. 쁘띠 마르키로 완전히 이사 오고 난 후 양조장은 갈수록 한가해졌고 심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이때쯤 사람들과 만날 일들이 많아졌었다. 라베고스도 여유로워지긴 마찬가지였고 제레미와 아흐노(마르키 달렘 대장이 아닌, 라베고스에서 역시나 기간직으로 일하는 와인 메이커)와 함께 얼마 전에 갔던 일식집에서 취할 때까지 코슈 와인을 마시기도 했다.


 주말 어느 날에는, 레 토와 망[2]이라는 그라브 지역의 화이트 와인을 만들어 성공시킨 한국인 남경화 씨와 연락이 닿았고 보르도에 들를 일이 있다고 하여 만나 저녁 자리에서 조언을 구하며 궁금해하던 와인을 한 병 선물 받기도 했다.


 3월에 왔었던 진원 누나가 와이너리 투어로 손님들을 데리고 보르도 투어를 하던 중 시간을 내서 함께 마고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도 했다. 예전에 보르도에서 유학하고 일했던 수입사 대표님도 출장을 온 김에 연락이 닿아 만났고 가끔씩 만나던 보르도에서 오래 일한 한국인 소믈리에분과 함께 와인 한잔할 시간이 생겼다.


 그리고 자주 만나던 친구 중 한 명이었던 황웨이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송별회를 열었다. 선물로 받은 레 토와 망 2016 와인과 함께 예전 방문 때 사둔 르 블랑 뒤 샤또 프리우레 리쉰 2016[3]을 들고 가 나눠 마셨다.


 프랑스에서 만났던 중국 친구들은 해외에 더 오래 남고 싶었지만, 가족들은 중국으로 돌아오길 바랐기에 그 갈림길 사이에서 고민하다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네고시앙과 계약이 끝난 황웨이는 다른 일자리를 찾다가 가족 문제로 결국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만남이었지만 슬픔은 없었다. 평소에도 활발했던 황웨이였고 남은 엘리와 조니도 씩씩했다. 처음 부르고뉴에서 만나 바로 친해진 그녀는 포도밭에 나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힘들어하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자기 학교 동기 졸업생들과의 모임에 초청하기도 했었다. 운동을 좋아하던 친구였고 나를 억지로 끌고 나와 배드민턴도 치고 와인도 많이 마시며 시간을 보낸, 추억을 많이 쌓으며 꽤나 친해진 친구 중 하나였다. 기획 중이던 연말 여행에 친한 친구들이 다 함께 갔으면 했지만 아쉽게 되었다.


 얘기하다 보니 떠나는 게 못내 아쉬웠는지 황웨이는 와인 몇 잔을 연거푸 비웠고 밤이 깊어지자 술에 취해 침대에 쓰러졌다. 엘리가 그 곁을 지키기로 했고 나와 조니는 방을 나섰다.




 쁘띠 마르키에 살며 주말마다 보르도에 놀러 나갔던 날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단연 쏘떼른느 지역에 제레미를 따라 놀러 갔던 날이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동안 와이너리의 '문을 개방하는'[4] 행사를 열었고 제레미는 친구 와이너리에 일을 도우러 갔었다. 내게 시간 되면 놀러 오라고 틈 날때마다 초대했기에 일요일에 쏘떼른느로 향했다.


 친구의 와이너리는 샤또 까이유[5]라고 하는 쏘떼른느 그랑 크뤼 클라쎄 등급을 받은 역사가 깊고 품질이 좋은 곳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친구네 와이너리 건물이 웅장하게 서 있었다. 이런 개방행사는 지나가다 들리는 모든 이들이 비용없이 와인을 테이스팅할 수 있고 소유주들이 직접 와이너리 투어를 진행하며 설명해 주기도 한다. 점심시간이 지나니 방문객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왔다.


 제레미가 가져와 함께 마셨던 뷜 드 까이유와 레 뚜렐 드 까이유도 있었고 처음 보는 레 제라블르 드 까이유[6] 2011, 샤또 까이유 2011, 2014, 2010 세 개 빈티지가 있었다. 그리고 붉은 빛을 띠는 예술 작품 같은 라벨이 그러져 있는 와인이 하나 있었는데 1909년 설립을 기리기 위해 특별하게 만든 100주년 와인인 ‘라 뀌베 드 썽뜨네흐 드 샤또 까이유[7] 2009’였다.


 농밀하게 달콤한 쏘떼른느 와인은 옆에서 함께 팔고 있는 구운 푸아 그라나 블루 치즈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특히 푸아 그라는 프랑스인들이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에 가족들과 둘러앉아 입으로 누리는 가장 큰 호사라고 한다. 쏘떼른느 한 잔에 푸아 그라 한 입을 곁들이며 행복해하는 이들의 얼굴을 보고 충분히 짐작됐다.


 안팎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다가 잠시 쉬고 있었는데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걸 눈치 챘는지 잠시 손님들이 뜸한 시간을 틈타 제레미가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왔다. 숙성고와 테이스팅 공간 반대편으로 와이너리 오너 가문이 사는 것 같은 곳에서 자전거를 하나 골라오더니 근처 다른 와이너리들도 모두 개방행사를 하니 잠시 놀다 오란다. 다시 바삐 돌아가는 제레미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서니 좌우로 낮은 돌담이 포도밭을 둘러싸고 있고 노랗게 변한 포도나무 잎들을 보며 자전거를 타고 있노라니 왠지 모르게 제주도에 와있는 듯한 푸근한 느낌이 들었다. 자전거로 목적지 없이 그저 달렸는데 그러다 보면 샤또 도와지 다옌느(Château Doisy Daëne)와 같은 잘 알려진 곳에도, 샤또 그라바스(Château Gravas)와 같은, 생전 처음 들어 본 곳에도 닿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좋은 곳 한 곳에 가 있는 게 낫겠다 싶어 방향을 틀었다. 자전거로 1시간가량을 가야 하는 거리였지만 어중이떠중이 몇 곳 가는 것 보단 좋을 것 같았다. 자전거를 그렇게까지 오래 타보지 않았기에 얼마 가지 않아 엉덩이에 물집이 잡혔고 설상가상으로 좋았던 날씨는 급작스럽게 흐려지더니 비를 뿌렸다.


 괜히 왔나 생각하면서도 계속 패달을 밟았고 그렇게 한 시간 거리를 밟아 도착한 곳에는 흰색 건물에 ‘샤또 라 뚜르 블랑슈[8]’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제레미가 와인 양조를 할 수 있게 도와준 곳이며 쏘떼른느 와인 중 샤또 디켐을 빼고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와이너리였다. 와이너리 건물로 들어가니 얼마 전 기사[9]를 썼던 5+ 와인 6본 케이스가 진열되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 앞에 한참을 보고 있으니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


“이 와인에 관심이 있나 봐요?”

“네. 얼마 전에 이 와인으로 글을 하나 썼거든요”

“혹시.. 와인21닷컴 다니엘인가요?”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저에요, 디디에. 당신이 자료 요청을 해서 저와 이메일로 소통했었잖아요.”

“오 디디에. 반가워요!”

“글은 잘 읽었어요. 한글은 모르지만, 구글 번역기로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있었답니다.”

“좋은 자료 덕분이죠”

“라 뚜르 블랑슈는 다 둘러봤나요?”

“아뇨 방금 도착했어요. 이제 테이스팅 해보려구요”

“아 그렇다면 10분 뒤에 투어가 시작되는 데 참석해봐요! 양조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조금 더 설명이 될거에요.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을 쓸 수 있다면 이따 네 시쯤에 옆에 강당에서 쏘떼른느 와인 마스터 클래스가 열리는데 거기도 들렀다 가요. 한 자리 빼달라고 할게요.”


 놀라운 인연이었다. 5+ 와인이란 5가지 와이너리에서 콜라보로 만든 와인으로 각자의 와인을 섞어 만든 와이너리 블렌딩 와인이었다. 독특한 컨셉에 매료되어 기사를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각 와이너리에 자료를 요청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이었고 친절하게 답변해준 이가 바로 디디에였다.


 직접 만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는데 이렇게 만날 줄이야! 덕분에 라 뚜르 블랑슈 와이너리 투어와 에꼴 뒤 방 드 보르도[10]에서 진행하는 쏘떼른느 와인 마스터 클래스도 들을 수 있었다. 불어로만 진행된 수업이었기에 집중력이 금세 바닥나긴 했지만, 이 달큰한 와인만으로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어 흥미로웠다.


 마스터클래스가 끝난 뒤엔 다시 테이스팅 공간으로 향했다. 쏘떼른느 와인 판매 부진에 대한 고민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랑 방 보다 덜 달콤한 세컨드 와인을 만들고 그보다도 덜 단 써드 와인을 만들어봐도 판매는 어려웠다. 라 뚜르 블랑슈는 해결책으로 그라브[11] 지역까지 밭을 확장해 드라이한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소비뇽 블랑으로 만든 레 자르당 드 라 뚜르 블랑슈 블랑 2016, 소비뇽과 쎄미용으로 만든 듀오 드 라 뚜르 블랑슈 2015, 그리고 메를로 품종으로 만든 레 자르당 드 라 뚜르 블랑슈 루즈 2015, 세 종류였다. 드라이한 와인들을 테이스팅하고선 브륌 드 라 뚜르 블랑슈 2016, 레 샤르미유 드 라 뚜르 블랑슈 2012[12], 그리고 샤또 라 뚜르 블랑슈 2013 빈티지까지 맛볼 수 있었다. 역시나 오늘 테이스팅한 와인 중 내 입맛에 가장 잘 맞았고 멀리 언덕에 강을 넘고 넘어 찾아온 보람이 느껴졌다.


 투어에 마스터클래스, 테이스팅까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벌써 두 시간이 지나있었고 어디냐는 제레미의 문자에 다시 샤또 까이유로 향했다. 평소에 타지 않던 자전거에 엉덩이가 아파왔지만 쉽게 접하지 못했던 쏘떼른느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저녁 여섯 시쯤 까이유로 돌아가니 손님들이 거의 떠난 상태였고 제레미와 함께 가족분들께 인사한 뒤 누런 차를 타고 마르키 달렘으로 떠났다. 저물어가는 태양이 만들어내는 오렌지빛 하늘과 옆에서 함께 나누는 친구가 있는 포근한 하루였다.


[1] 라빵 아 무따흐드(Lapin à moutarde): 머스타드 소스에 조리한 토끼고기 요리로 프랑스 전통 요리

[2] 레 토와 망(Les Trois Mains): 3개의 손이라는 의미를 가진 와인이다.

[3] 르 블랑 뒤 샤또 프리우레-리쉰(Le Blanc du Château Prieuré-Lichine): 마고 그랑 크뤼 클라쎄 5등급 샤또 프리우레-리쉰에서 만드는 화이트 와인으로 엘리와 조니와 함께 방문했다가 구매한 와인이다.

[4] 문을 개방하는(portes ouvertes): 와인 생산 지역별로 열리는 행사로 주말 이틀동안 무료로 와이너리 방문이 가능한 행사이다.

[5] 샤또 까이유(Château Caillou)

[6] 레 제라블르 드 까이유(Les Erables de Caillou)

[7] 라 뀌베 드 썽뜨네흐 드 샤또 까이유(La Cuvée du Centenaire de Château Caillou)

[8] 샤또 라 뚜르 블랑슈(Château La Tour Blanche)

[9] 기사 [쏘떼른느 그랑 크뤼 1등급 와인 5개를 섞은 궁극의 와인, 5+ 출시] https://www.wine21.com/11_news/news_view.html?Idx=17078

[10] 에꼴 뒤 방 드 보르도(L'École du Vin de Bordeaux): 보르도 와인 교육 기관

[11] 그라브(Graves): 보르도 남부, 쏘떼른느와 겹치는 와인 생산지역으로 드라이한 화이트와 레드 와인을 만들어낸다.

[12] 레 자르당 드 라 뚜르 블랑슈 블랑(Les Jardins de La Tour Blanche Blanc), 듀오 드 라 뚜르 블랑슈(Duo de La Tour Blanche), 레 자르당 드 라 뚜르 블랑슈 루즈(Les Jardins de La Tour Blanche Rouge), 브륌 드 라 뚜르 블랑슈(Brumes de La Tour Blanche, 레 샤르미유 드 라 뚜르 블랑슈(Les Charmilles de La Tour Blanche): 모두 와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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