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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르도농부 Oct 20. 2022

안녕 마르키 달렘, 안녕 라베고스

2018년 12월 14일, 샤또 마르키 달렘 양조 계약 종료

 어느새 마르키 달렘 옥상에서 바라보는 포도밭은 금빛으로 변해있었다. 열매를 전부 수확해버린 포도나무는 더 이상 쓰임새는 없었지만 모든 것을 초월한 듯 다음 챕터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것 같았다.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던 가지는 초록빛에서 갈색이 되어 딱딱하게 굳었고 햇빛을 막아 그늘을 만들어주고 광합성으로 양분을 전하던 잎사귀는 빨갛게, 노랗게 변해있었다.


가을은 각각의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다.

L'automne est un deuxième printemps où chaque feuille est une fleur.

- 알베르 까뮈


 하나하나 꽃이 된 잎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넘실대는 파도처럼 금빛 물결은 일렁였다. 바람은 차가워졌고 옷은 두꺼워졌으며 몸은 둔해졌다. 양조장의 속도도 현저히 떨어졌다. 대부분의 와인이 오크통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사람이 할 일은 기도 말고는 딱히 없었다. 세바스티앙은 며칠 전부터 포도밭으로 다시 나갔다. 겨울부터 3, 4월까지 지루한 작업이 이뤄진다. 다음 해의 포도 품질을 좌우할 전지 작업이었다. 내게 궁금하면 같이 가자고 했지만 추운 겨울에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맞아가며 고생하고 싶진 않았다.


 니꼴라는 자진해서 라베고스로 갔다. 그곳은 아직 사람이 할 일이 많았다. 파니와 나, 그리고 대장이 남아 마르키 달렘을 지키고 있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며 보내고 있었다. 한, 두 통을 빼놓고선 나머지 모든 와인이 오크통에서 젖산 발효를 거치고 있었다.


 그리고 오크통이란 놈들은 주린 배를 채우려 와인을 먹어 치우곤 했는데 갓 태어난 놈일수록 욕심이 넘쳐 먹어대는 양이 상당했다. 그러다 보니 아흐노가 욕지거리해가며 끝까지 채운 통에 공간이 생겨 산소가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때 나와 파니가 하던 작업이 오크통이 먹은 만큼 와인을 다시 채워주는 우이야주 작업이었다. 길쭉한 주둥이를 가진 스테인리스 소재의 주전자에 숙성되던 와인을 넣어 오크통에 먹혀 없어진 만큼 채워 다시 통을 가득 채웠다. 이때도 처음 엉또나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와인을 흘리면 안 됐기에 거의 다 채워졌을 때 손가락으로 주둥이를 막고서 구멍에서 치웠다. 2차 발효가 여전히 진행 중이었기에 오크통을 고무마개로 꽉 막지 않고 유리 마개를 덮어 가스가 빠져나갈 수 있게 해놨다.


 우이야주 작업 또한 정적이었고 느렸으며 바깥을 몇 번씩이나 왔다 갔다 해야 했으므로 비효율적이었고 추위에 오들오들 떨었다. 먼저 스테인리스 주전자에 숙성 중이던 와인을 채워야 했는데 흘리면 안 되었기에 배수 시설이 있는 야외로 나가야 했다. 추위를 참으려 두꺼운 패딩을 걸치고 나갔다 들어오면 발효 때문에 온도를 높인 숙성고에서 다시 옷을 벗어 재꼈다. 파니가 유리 마개를 치워두면 내가 오크통을 하나씩 채워갔다. 손가락으로 주전자의 긴 주둥이 끝을 분명히 틀어막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통으로 넘어갈 때 꼭 한두 방울 깨끗한 오크통 위에 흘렸다. 머쓱해하며 파니를 부르면 “또?”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흘린 통으로 와 이산화황을 희석한 액체로 열심히 닦아냈다.


“다니엘! 그만 흘려!”


 농담으로 뭐라고 하긴 했지만 흘리기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이야주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젖산 발효를 끝내야 할 때가 왔고 드디어 고체로 된 이산화황을 와인에 넣었다. 모든 활동을 멎게 하고 산소의 침입을 막는 방패였다. 오크통 위로 놓인 유리 마개를 빼고 이산화황을 와인에 담가 부글부글 기포가 일면 통에 그대로 빠뜨리고 고무마개로 단단히 잠그면 됐다. 그 뒤로도 한가한 일상은 지속되었다. 작년에 사용했던 배럴을 다시 사용하기 위해 이산화황을 태우고 뜨거운 물, 찬물, 증기로 세척하고 건조하여 새로운 와인을 담았다.


 11월에는 서울에서 그랑 크뤼 연합회가 여는 시음회가 있었고 마르키 달렘은 아니지만 라베고스가 참석했다. 가끔 라베고스 식당에서 마주치며 인사 나눴던 델핀이 간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애몬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당신이 평소에 그리 무시하던 기간직 근로자가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다. 퇴근하고서 시간을 내고 주말까지 2주 넘도록 자료조사에 번역에 열심히였다. 웹페이지를 만들고 qr을 만들어 설명서에 넣어 한국업체에 출력하고 아는 지인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지인은 연차까지 내가며 행사장에 전달해줬고 덕분에 그간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많은 방문객이 다녀갔고 아는 지인들이 라베고스 부스에 많이 들러준 덕분에 효과가 좋았다. 델핀이 다녀와서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고 애몬에게도 내 덕에 좋은 효과를 봤다고 전했지만, 애몬은 역시나 내게 아무 말도 없었다. 매번 무시하던 모습 어디 안 간다. 제레미 또한 애몬이라면 진저리를 쳤는데 평소에 인사하면 아는 척도 안 하다가 방문객들 투어 의전을 하다가 마주치면 생글거리며 인사하는 모습에 역겨워했다고 한다.

 왜 저런 사람이 이곳에 있느냐는 질문에 아무 경력도 없고 능력도 없었지만 사장인 마르졸렌의 친구여서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보다 더 투명하게 뽑을 줄 알았지만 사람 사는 모습 다 똑같나 보다. 라베고스 양조 대장인 브뤼노도 다른 곳에서 경험이 많아 이곳에 들어온 것이 아닌, 아버지가 라베고스 수석 와인메커였어서 그대로 세습했다고 말해주었다. 이쯤 되니 마르졸렌도 어떻게 그 자리에 앉아있는지 궁금해졌다. 일하며 제일 나를 힘들게 했던 이들 둘이 절친이라고 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엄청 막히네. 오늘 차 왜 이렇게 많아?"

"그러게 고작 마트 가는 길인데 왜 이러는 거야. 아 잠깐, 오늘 혹시.."


 다급하게 핸드폰을 찾아보던 제레미는 한숨을 길게 쉰다.


"이걸 먼저 봤어야 했는데, 오늘 까스뗄노 로터리 폐쇄했대. 빌어먹을 노란 조끼[1]."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었지만 먹을 것이 떨어져 제레미와 함께 까스뗄노 쪽의 앙떼르막쉐를 가던 길이었다. 이때는 프랑스 전 국토가 노랗게 물들던 때였다. 처음 시작은 단순한 유류세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 정도였다. 뉴스에서조차 잘 다루지 않았고 오가면서 쉽게 볼 수도 없었고 그저 노란 조끼를 입은 사람을 보면 근처에 공사가 있나 할 정도였다. 주간에는 마르키 달렘 안에서만 생활하다가 주말이 되어 보르도로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노란 조끼가 더 많이 보이고 있었다. 함께 일하는 이들에게 물어봐도 '그런 게 있다더라' 정도였지 그들도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던 중 시위대가 로터리를 장악하고 교통을 통제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시민들을 위한 시위인데 왜 다른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는가. 시위가 시작한 지 시간이 꽤 지났고 이제는 아주 작은 꼬뮌의 로터리까지 차량이 움직이지 못했다. 다들 어느 정도 동조하는 분위기였지만 직접 당하면 욕지거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월요일 - 화요일 - 수요일 - 목요일 - 금요일 - 노란 조끼 - 일요일'이라고 할 정도로 매주 토요일마다 모든 이들이 불편함을 견뎌내야 했다. 이대로는 장 보는 데 네다섯시간을 쓸 것 같아 제레미가 불법 유턴하여 점령 소식이 없는 마꼬에 있는 다른 작은 앙떼르막쉐로 향했다.


 장 보러 가는데 차가 막히는 정도에서 시간이 흐르며 시위는 한층 더 격해졌다. 보르도에 주말을 보내러 간 하루, 보르도 시청에서부터 쌩뜨 꺄트린 도로까지 노란 조끼 입은 사람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엘리와 중국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지나가는 시위대의 모습을 보고 마고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까 봐 불안감이 엄습했다. 처음 순수한 의미에서 모인 시위대에는 이상한 이들이 합류했는데 그중에는 인종차별주의자들도 많았기에 그들이 갑자기 식당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게 아닐까 걱정도 했다. 좀도둑들도 많았는데 특히 이날 오후에 최루탄이 터지며 격렬하게 경찰과 한바탕하던 시위는 저녁까지 이어졌고 시위대는 보르도 대극장 옆, 애플스토어를 습격해 모든 제품을 털어갔고 그 맞은편에 있는 금은방들도 피해를 보았다고 했다. 이런 정신 나간 이들은 보르도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 퍼져있었는데 샹젤리제에서도 고급 차량이 불타고 개선문에 있는 유물이 부서졌다.




 시위대가 불 지르고 때려 부수는 사이에도 하루하루 시간이 흘렀고 양조장에서 할 일이 없어 핸드폰만 보고 있는 지루한 시간이 계속됐다. 낮에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시간이 천천히 갔지만 저녁엔 제레미와 보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아쉬움이 커지고 있었다. 연말 여행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되도록 같이 시간을 많이 보내려 했다.


 11월 셋째 주는 보졸레 누보가 출시되는 날이니 자기네 숙소 쪽으로 와서 한잔하자고 했다. 뭘 먹어야 하냐며 고민하기에 가스레인지도 있으니 간단하게 음식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장을 같이 보고 들어와 마늘을 썰기 위해 도마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쓸 일이 없어 버렸다고 한다. 봉다리 위로 대충 썰어 페페론치노와 함께 팬에 넣고 기름을 잔뜩 둘러 향을 뽑은 뒤 새우를 껍질째 우루루 집어넣어 간단하게 감바스를 만들었다. 맛있다며 허겁지겁 먹는 모습에 뿌듯해하며 보졸레 와인 한 잔을 입에 머금었다.


 도멘 지항 보졸레 누보[2] 2018 빈티지의 와인이었는데 내추럴 느낌의 와인이었다. 보졸레 누보는 그다지 좋아하는 와인은 아니었으나 그럭저럭 마실만했다. 며칠 전이 보졸레 누보 전 세계 동시 출시일이었으니 그 핑계로 이렇게 한 잔 하게 됐다. 한 병으로 끝날 리 없는 우리는 역시나 내가 준비해온 보졸레 지방의 플러리라고 하는 마을의 와인, 피에르-마리 쉐흐메트 플러리 “레 갸항”[3] 2015 한 병을 더 따서 먹고서야 만족했다. 술에 취한 제레미는 갑자기 기타를 가져오더니 노래를 틀고선 따라 연주하기 시작했다. 매번 장난 걸던 모습만 봐왔는데 곧잘 치는 모습이 꽤나 낯설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쁘띠 마르키에서 지내는 마지막 밤이 왔고 마지막으로 함께 잔을 기울이기 위해 제레미를 불렀다. 뒤포르-비방 맞은편에 있는 렁디고[4]에서 피자 두 판을 사들고선 방으로 왔다. 며칠 전부터 아방 갸르드 샵에서 보고 먹고 싶던 레 쁘띠뜨 빡셀 85아르 방 오항주[5]와 샤또 오네 레르미따주[6] 레드 와인을 나눠 마시며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내일 또 보르도로 이 많은 짐을 들고 가야 하니 오늘은 정말 딱 두 병만 마시자며 약속했다. 밤새 나눌 추억이 많았지만 언제 있을지 모르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제 앞으로는 뭐 할 거야?”

“글쎄, 내년에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 가고 싶다는 마음은 있어.”

“호주? 양조하러?”

 “응 프랑스에서는 몇 군데 일을 해봤으니 이제 호주도 한번 경험해보고 싶어서.”

“가고 싶은 와이너리는 있어?”

“뭐 아직 알아보진 않았는데 경력도 있고 하니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너는 이제 어떡할 거야. 프랑스 남고 싶다며.”

“남고 싶지. 남고 싶은데 비자가 어렵잖아? 양조 학위도 없고 유럽인도 아닌데 비싼 세금 내가면서 내 비자를 내줄 데가 있을까 싶어.”

“더 간단한 방법 알려줬잖아.”

“결혼하라고? 아직도 그 소리냐.”

“야 정말이라니까. 그냥 연애하고 결혼부터 해. 그럼 너 여기 합법적으로 있을 수 있어.”

“아냐. 나는 프랑스 여자랑 안 맞는 거 같아.”

“좀 힘들긴 해.”

“그리고 뭔가 끝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이것만 바라보고 오고 있었어서 잠깐 쉬고 싶어. 한국 들어가서 조금 더 생각해보려고.”

“언제 한국 들어간다고 했지?”

“1월 14일에.”

“그래. 여행 잘하고. 행운을 비네 내 친구. 출국하기 전에 볼 수 있으면 또 보자.”

“그래 내가 여행 다녀오면 일주일 정도 여유 있으니 그때 시간 되면 보자.”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처음 대화를 나눴을 때가 생생히 기억난다. 자전거를 타고 라베고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으로 가던 나를 붙잡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던 그때. 첫 만남 이후 라베고스와 마르키 달렘 내내 제레미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다. 프랑스어 기피증이 생기던 때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돼주었고 다섯시간의 출퇴근에 퀭해져만 가는 나를 보며 보르도 시내에 사는 세조니에만 보면 나를 데려다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궁금한 게 있을 때마다 최대한 알려주려고 노력했고 지롱드강에서 피크닉을 하자며 끌고 가 술을 함께 마셨다. 쏘떼른느 행사 때 초대해주고 내 프랑스 인생 최대 빌런인 마르졸렌과 에몬을 함께 욕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대화에서 차츰 영어를 줄여나가 내 프랑스어 공포증도 치료해주었다. 함께 보냈던 수많은 저녁과 함께 나눈 셀 수도 없이 많은 와인 병들은 이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한두 번 먹어보더니 내게 한국 과자 더 없냐고 포도밭에서 징징대던, 그리고 매운 불닭볶음면이 너무 맛있다고 더 달라고 하던 그의 모습에 참 즐거워했었다. 추억을 곱씹으며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선 마지막으로 포옹을 나눴다.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와 함께.


 와이너리에서 만난 이들과도 작별 인사를 나눌 때가 왔다. 마지막 근무일에 나와 파니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오크통의 와인들은 이미 이산화황을 먹고 숙성에 들어갔고 더 이상 우이야주도 필요가 없었다. 일부 와인들은 오크통이 아닌 양조통에 있었는데 다른 통으로 옮겨주는 작업을 했다. 모든 일은 펌프가 다 하는 것이었고 작업이 끝난 뒤 통과 펌프만 닦아주면 업무가 끝이었다. 젖산 발효를 하던 통의 문을 여니 와인색의 끈적한 침전물들이 흘러나왔다. 대장 아흐노는 손가락으로 쓱 닦아내더니 와인 메이커들은 붉은 초콜릿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렇게 붉은 초콜릿까지 전부 닦아내고 오크 통을 정리하고 점심으로 와인 메이커들끼리 전부 근처 다른 마을로 가 피자를 먹으며 간단한 송별회를 했다. 라베고스의 대장 브뤼노, 우리 대장 아흐노, 라베고스에서 일하던 디디에와 아흐노, 막심, 그리고 나와 함께 일하던 세바스티앙과 파니, 니꼴라까지 한곳에 모여 함께 식사하고 그동안 고생했다며 악수로 마음을 전했다.


 차가 없던 나는 라베고스의 포도밭 식구들이나 사무직 직원들, 그리고 마르졸렌과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솔직히 마르졸렌은 덜 아쉬웠지만, 포도밭에서 함께 힘들게 일했던 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것은 좀 아쉬웠다. 모로코 출신으로 라마단 기간에 아무것도 먹지 못해 예민할 텐데도 내가 이해 못하는 부분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주며 짜증 한 번 안 낸 팀장 아메드, 뜬금없이 정색하며 짜증도 많이 냈지만 정작 정이 많아 이것저것 많이 챙겨줬던 부팀장 산드린, 가을에 새신부가 되었지만, 끝까지 마드모아젤[7]이라고 불러달라던, 팀 내 분위기 메이커였던 플로랑스까지.


 아쉬움이 짙었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마르키 달렘으로 돌아와 짐과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장화, 우의, 장갑, 손목 보호대, 외투를 가방에 쑤셔 넣고 사무실로 올라와 그동안 빠뜨린 출근 기록이 있나 살펴보고 있었다. 파비앙은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차를 타고 직접 인사를 나누러 왔다. 파니와 한참을 이야기하고 수고했다고 악수하더니 내 쪽으로 와 그동안 고마웠다고 악수를 청했다.


“제가 더 고맙죠. 파비앙이 연락 주지 않았으면 이 엄청난 경험은 시작도 못 했을 거에요. 그때 내게 연락해줘서 고마웠어요.”

“그래요.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요. 이제 뭘 할 건가요?”

“저 내일부터 2주 동안 캠핑카 타고 친구들이랑 프랑스 전국 와이너리 투어를 돌아요.”

“오! 정말 재밌겠는데요? 어디로 가요?”

“샹빠뉴도 가고 부르고뉴, 론, 꼬냑, 아르마냑, 루아르까지 가요.”

“보르도는 안 와요?”

“보르도 주변에 올 때가 크리스마스 때라 다 안 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렇죠. 우리 프랑스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아주 중요해요.”

“그렇더라구요. 그리고 나선 어머니가 오셔서 1주일 여행하고서 한국으로 돌아가요.”

“프랑스에 남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남고 싶죠. 근데 비자가 너무 어려워서 우선 한국 가서 생각해보게요.”

“생산 일은 계속하고 싶어요?”

“그럼요. 프랑스에 남아서 와인 만드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아쉬워요.”

“꼭 와인이어야 해요? 제 친척이 꼬냑 쪽에서 작은 규모로 증류하고 있어요. 근데 말하지만 정말 정말 작고 안 알려진 곳이에요.”

“와인을 하고 싶어요.”

“그래요. 건승을 빌어요. 언제든 프랑스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파비앙과 악수를 나누고 사무실로 들어온 나는 파니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 할까?'라고 눈치를 주더니 가방에서 준비한 선물을 서프라이즈로 대장에게 건네줬다. 며칠 전, 점심을 함께 먹던 니꼴라가 그래도 대장한테 선물 하나 해주고 싶다며 말을 꺼냈다. 대단한 걸 사주자는 것도 아니었고 아흐노에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이런저런 글을 담은 티셔츠를 만들어주자는 것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니꼴라에게 줬고 글은 둘이 알아서 쓰라고 맡겼다. 파니가 꺼내든 파란색 티셔츠엔 평소 대장의 습관, 말버릇이 쓰여 있었다.


'샐러드, 토마토, 양파

내 예쁜 궁뎅이를 위해서 깨끗한 화장실이 필요해

12:52, 낮잠에서 일어날 시간

고장 난 난방, 고맙네! 피카소

일요일에 하는 1시간 근무, 이게 바로 인생이지.

청소기 돌리고 마감해야지 / 콘치타

간식은 참아야 해

매일 과일과 채소 5개씩.'


 파란색 티셔츠를 받아 든 아흐노는 글을 읽으며 피식거리며 웃고선 눈시울이 빨개졌다. 올해 유난히 팀워크가 좋은 직원들이 와서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는데 이런 선물은 처음 받아본다며 눈물을 보였다. 니꼴라와 파니 모두 성격이 서글서글했고 특히 파니는 여자였지만 육체적인 일에서도 남자들과 똑같이 일하고 똑 부러지게 일을 잘했다. 아흐노 또한 친절하게 잘 알려주었고 덕분에 큰 소리 나지 않고 모두 각자 자리에서 일을 잘 할 수 있었다. 특히 아흐노는 내가 하나라도 더 경험할 수 있게 엉또나주를 제외한 모든 일들은 다 할 수 있게 배려해줬다. 그리고 기사를 쓰는 데 필요하다고 하나씩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하니 왜 이런 작업을 하는지까지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고마움을 담아 악수를 나누고 이제는 꺼지라는 장난스러운 아흐노의 말에 와이너리 문을 나섰다. 그렇게 프랑스 생활의 2막인 포도밭과 3막, 양조장에서의 모든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제 짐을 모두 싣고 보르도로 가 하루를 보내곤 마지막 4막인 캠핑카 투어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마지막이라고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여태껏 쁘띠 마르키에서 봤던 중 가장 아름다운 낙조를 보여줬다. 그동안 많은 가르침과 값진 경험을 안겨준 라베고스와 마르키 달렘이여, 고마웠어, 안녕.


[1] 노란 조끼 시위(movement gilet jaune): 2018년 10월 21일 프랑스에서 처음 시작된 후 11월 17일 대규모로 퍼지며 주변국으로 번진 시위다. 주로 로터리를 점거하고 교통을 방해했다.

[2] 도멘 지항 보졸레 누보(Domaine Girin Beaujolais Nouveau)

[3] 피에르-마리 쉐흐메트 플러리 “레 갸항”(Pierre-Marie Chermette Fleurie “Les Garants”)

[4] 렁디고(L’Indigo): 마고에 위치한 피자집

[5] 레 쁘띠뜨 빡셀 85아르 방 오항주(Les Petites Parcelles 85 ares Vin Orange)

[6] 샤또 오네 레르미따주(Château Auney l’Hermitage)

[7] 마드모아젤(mademoiselle): '숙녀' 정도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부르는 말이지만 오늘날 잘 사용하지 않는 프랑스어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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