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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르도농부 Oct 19. 2022

와인과 낙조, 사람이 아름다웠던 마을, 쌩-떼밀리옹

와인 인생 버킷리스트 샤또 오존 방문 달성

 양조장이 한가해져 무료해질 때쯤 한국에서 손님이 왔다. 동갑내기 친구인 지호는 다니던 와인 수입사를 그만두고 잠시간의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한 달 전쯤 기별을 줘 그간 와이너리 투어를 알아보고 있었다. 토요일에 와이너리 투어를 잡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알아볼 당시만 해도 쁘띠 마르키에서 한 달만 지내고 다시 보르도로 돌아가는 줄 알고 재택근무를 이때로 맞추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고선 금요일로 예약을 잡고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쁘띠 마르키에서 쭉 지내게 되었고 휴무를 신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쉽게 파비앙에게 말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대장 아흐노와 이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직접 말해주겠다고 했다. 잠시 라베고스에 다녀온 대장의 손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있었는데 특별 휴무신청서였다. 양조 업무가 거의 끝나 일이 많지 않으니 특별 휴가를 승인해준다고 했다. 그렇게 11월 말 어느 목요일 저녁에 보르도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둘이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베글르 쪽 널찍한 숙소를 예약했다. 친구보다 먼저 보르도에 들어와 먼저 숙소에 체크인하고 짐을 두고선 중심가인 깽꽁스로 향했다. 와인 샵을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친구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정육점으로 향했다. 2인분의 아주 작은 사이즈의 지고 다뇨[1] 고기를 사는 동안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인사를 나눴다. 먼 프랑스까지 와서 심지어 시골인 보르도까지 와주니 참 고마웠다. 근처 마트로 가 같이 곁들여 먹을 감자와 안주로 먹을 감자 칩, 올리브 등등 안줏거리를 사고서 와인 샵에 들러 와인 한 병을 집어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해 오븐에 지고 다뇨를 넣고 조리하는 동안 감자 칩과 올리브, 코르니숑, 잠봉 등을 꺼내놓고 샵에서 사 온 에르미따주 뒤 픽 생 루, 뀌베 쌩뜨 아녜스[2]를 먼저 따랐다.


"멀리 오느라 고생했어요. 자 이제부터는 말 편하게 합시다!"


 3년간 얼굴을 보고 술잔도 자주 기울이던 사이였지만 사회에서 만난 친구라 그런가 어색한 존댓말로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먼 곳까지 와 준 그에게 내적 친밀감을 느껴 이제는 말 편히 조금 더 가까워지자며 건배했다. 그 사이 오븐에서 충분히 구워진 지고 다뇨가 완성됐고 와이너리에서 사 온 샤또 마르키 달렘 2010년 빈티지도 따서 밤이 깊도록 와인을 마셨다.




 다음 날 아침 빵으로 대충 아침을 때우고선 분주히 준비를 마치고 숙소 1층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멀리 쌩-떼밀리옹[3] 마을까지 놀러 갈 예정이었고 워낙 좋은 와이너리들을 방문할 예정이라 엘리와 조니도 함께 하기로 했다. 다 함께 엘리 차를 타고서 처음 향한 곳은 쌩-떼밀리옹으로 가기 전, 시내에서 아주 가까운 뻬싹-레오냥[4] 마을의 샤또 오-브리옹[5]이었다. 이름만 수도 없이 들어봤지 높은 가격 때문에 사실 제대로 한 병을 따서 쭉 마셔본 적이 없는 와인이었다. 방문하고 싶다고 하니 흔쾌히 환영한다는 말과 함께 바로 옆에 붙어있는 샤또 라 미씨옹 오-브리옹[6]도 함께 방문하자고 오히려 더욱더 적극적이었다.


 양조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해서 그런지 몰라도 홍보 담당자인 튀리드는 첫 시작부터 양조와 포도 재배에 대해 꽤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특별히 고안된 스테인리스 양조통이 있다며 모형 단면을 보여주며 열심히 설명했다. 독특한 구조였는데 가운데가 대각선으로 나뉘어있었다.


"이 통은 저희가 특별히 제작을 의뢰한 디자인이에요. 최대 장점은 데뀌바주가 아주 편하다는 점이에요. 와인은 이 아래쪽 관을 통해서 액체만 다 빠지게 되고 남아있는 모든 찌꺼기는 이 대각선으로 설치되어있는 판에 남게 되겠죠. 그 끝에 연결된 양조통의 문을 열면 자동으로 껍질들이 쏟아져 내려와요. 마지막에 사람이 들어가 조금만 건드려주면 힘들이지 않고 깨끗하게 통을 비울 수 있죠. 다니엘은 해봐서 이게 얼마나 좋은지 아시죠?"


 보자마자 너무나 허탈했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비용은 간단하진 않겠지만)으로 가장 힘든 육체노동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바꾸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일이 이렇게 쉽게 해결되면 그만큼 사람을 덜 뽑으니 나 같은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곳이 없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모형을 지나 양조장 내부로 향했는데 여기서도 놀라운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펌핑 오버가 완전히 자동화가 되어있는 통이라고 알려주었고 덕분에 24시간 동안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알아서 펌핑 오버가 되는 시스템이라고 했다. 지금 시기에는 더욱 그렇겠지만 한창 양조할 때도 사람이 없어도 되게끔 만들어놓았다. 아직 마르키 달렘처럼 사람의 힘으로 돌아가는 곳들이 많았기에 내게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도 와이너리에 있었으므로 듣는 데 크게 문제가 없었는데 아직 학교에 입학 전인 조니나 시차 적응도 다 안 된 지호는 집중력이 떨어져 보였다. 그쯤 튀리드가 눈치 빠르게 다른 곳으로 가자고 우리를 이끌었다.


“저희는 다른 곳과는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이렇게 우리의 와인에 가장 적합한 고품질의 오크 배럴을 직접 만들어 숙성한다는 겁니다. 이곳을 보면 오크통을 어떻게 만드는지 자세히 나와 있어요. 오크 나무를 가져와서 적당한 크기로 잘라낸 뒤에 오크 나무 조각으로 불을 내서 통 안쪽을 그을리며 모양을 잡고 위아래 뚜껑을 덮은 뒤 철제로 오크통을 조여주면 완성이죠.”


 오크통 제작 아틀리에를 지나 숙성고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와이너리에서 실제로 볼 거라고는 상상 못했던 ‘것’이 놓여있었다.


“이 계란은 설마 청징한다고 가져다 놓은 건가요?”

“맞아요. 우리는 전통적인 방식을 선호하죠. 오크통 숙성 후 랙킹[7]할 때도 전통 방식 그대로 펌프를 사용하지 않고 청징[8]할때도 계란 흰자만을 사용하고 있어요. 오늘은 아쉽게도 청징 작업을 안 한다고 해서 보여드릴 순 없겠네요.”


 와인이 완성될 때쯤에 와이너리 투어를 가보질 못해서 그런지 계란이 술 만드는 곳 안에 떡하니, 그것도 서른 알짜리 판이 스무 개 넘게 쌓여 있는 모습이 정말 특이했다. 그리고 그동안 갔던 와이너리에서는 계란도 오염 가능성이 있어 다른 재료를 사용해 청징하는 곳이 많아 이런 장면을 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1등급 와이너리라고 기대했던 탓인가, 샤또 마고에서 본 것과 같은 위용은 오-브리옹의 숙성고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약간의 실망을 하고선 바로 옆에 있는 라 미씨옹 오-브리옹으로 향했다. 이름 그대로 라벨에 성스러운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와인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조금 전 구경한 오브리옹보다는 더 역사가 깊이 깃든 건물들이었는데 어디선가 중창단이 성가를 부르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건물 앞의 정원에도 온통 가톨릭과 관련된 조각상들이 배치되어 있어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건물로 들어가니 작은 성당 같이 생긴 곳의 성전에 오크통이 열을 맞춰 서 있는 모습은 볼만한 풍경을 자아냈다. 제단이 있어야 할 곳에는 신부님과 복사들이 미사를 드릴 때 앉던 11개의 좌석이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건물 뒤편으로는 작은 연못과 또 다른 정원이 있었고 스무 명 남짓 들어갈 만한 정말 작은 성전에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상이 모셔져 있었다.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으며 한참 건물을 구경하다 테이스팅 룸으로 향했다. 고급 저택의 방에 들어온 듯 우드톤의 차분한 곳에 열 명의 자리가 마련된 디귿 형태의 테이블이 있었다. 네 개의 자리가 세팅되어있었고 테이스팅 매트에는 9개의 잔이 깔려 있었다.


"다니엘 오 씨를 맞이한

2014년 빈티지 테이스팅


샤또 라 미씨옹 오브리옹 2018년 11월 23일 금요일

도멘 클라렁스 딜롱"


 지금껏 받아왔던 어떤 환대보다도 감동적이었다. 그저 정해진 양식에 날짜와 이름만 바꿔서 출력하는 것이었겠지만 말이다. 벌써부터 눈에서 꿀이 흐르고 있었는데 와인이 맛이 없을 리가 없었다. 클라렁스 딜롱의 기본급 레드 와인인 클라렁델 보르도와 클라렁델 쌩-떼밀리옹을 시작으로 두 개의 세컨드 와인, 라 샤펠 드 라 미씨옹 오-브리옹, 르 클라렁스 드 오-브리옹을 테이스팅한 뒤 두 개의 그랑 방, 샤또 라 미씨옹 오-브리옹, 샤또 오-브리옹을 맛보고 마지막으로 세 개의 화이트 와인인 라 클라흐떼 드 오-브리옹 블랑, 샤또 라 미씨옹 오-브리옹 블랑, 샤또 오-브리옹 블랑으로 넘어갔다. 친구들은 친구들 나름대로 오-브리옹의 레드 와인도 접하기 힘들었는데 그 귀하다는 화이트 와인까지 테이스팅할 수 있어 와이너리에서 배려해준 부분들에 감동했고 모든 와인이 완벽했다. 9가지 와인들을 전부 테이스팅한 뒤에도 진하게 남아있는 감동에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돌아가며 사진을 열심히 찍고 다음 약속 시간에 늦겠다 싶을 때가 되어 튀리드의 손을 한참을 잡고 인사를 나눴다.




 다음 약속장소는 차로 꽤 떨어져 있는 쌩-떼밀리옹이라는 마을이었다. 여태껏 내가 근무하고 방문했던 와이너리들은 모두 지롱드강을 기준으로 왼쪽인 '메독' 지역에 있었다. 쌩-떼밀리옹은 강의 오른쪽에 있는 마을로 차가 없던 나는 쉽사리 가기 어려웠다. 지금 가는 샤또 꺙튀스[10]는 조금 전 방문했던 클라렁스 딜롱 그룹이 최근에 매입한 곳이었다. 원래부터 있던 와이너리를 그대로 매입한 것은 아니었고 세 개 와이너리를 매입해 하나로 통합했다고 한다. 이런 와이너리가 있다는 것에 대한 정보가 없었는데 처음 오-브리옹에 연락했을 때 쌩-떼밀리옹 지역은 가지 않냐며 연결해 준 것이다. 2011년에 매입해 얼마 되지 않아 와인 메이커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그 와중에 직접 우리를 맞아주었다.


 아주 작은 규모의 건물로 메독에 삐까뻔쩍한 그랑 크뤼 클라쎄 샤또들의 건물에 비하면 검소해 보이는 그런 건물의 와이너리였다. 입구로 향하는 길에 큼지막한 용 한 마리가 와이너리를 지키는 듯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용은 와이너리와 포도밭을 수호하는 수호신이라고 한다. 최근에 만들어진 와이너리이다 보니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었는데 와이너리의 이름은 로마에서 5번째 자식을 의미하는 꺙튀스라고 지었으며 로마 숫자로 5를 의미하는 V가 굉장히 중요한 심벌이라고 알려주었다.


 양조장은 매우 작았는데 전체 구조가 원형으로, 가운데에는 오크 발효통들이, 그리고 바깥쪽으로 스테인리스 발효통들이 원을 이루며 서 있는 게 마치 루이 자도에서 봤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생산량이 많지 않은 이들의 숙성고도 아주 작았고 적은 빛과 완벽한 습도와 온도로 와인들이 잠들어있었다. 간단하게 양조와 숙성에 대한 설명을 한 뒤 테이스팅 룸으로 이동했다. 놀랍게도 또 다른 숙성고를 바라볼 수 있는 통유리로 된 방에 테이스팅이 준비되었다. 역시 같은 그룹 소속이라는 것을 보여주듯 이곳에서도 테이스팅 매트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독특한 시음이 진행됐는데 세컨드 와인인 르 드라공 드 꺙튀스[11] 와 그랑 방인 샤또 꺙튀스를 2014, 2015빈티지 그리고 여전히 숙성이 진행중인 2017 빈티지로 나눠 테이스팅했다. 다른 와이너리에 비해 조금 더 강한 추출 스타일의 꺙튀스는 그만큼 더 깊은 맛과 복합미가 느껴졌지만 2017은 아직 숙성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 조금은 덜 자리 잡힌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원래 잡혀있던 다른 약속들 사이에 급하게 껴 넣은 방문이었기에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구경하고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꺙튀스를 나선 뒤 꽤나 유명한, 쌩-떼밀리옹 그랑 크뤼 클라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샤또 앙젤뤼스[12]로 향했다. 마을이 크지 않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놀이기구 기다리듯 리셉션 공간에서 잠깐 기다리니 담당자가 나와 우리를 맞아주었다.


 앙젤뤼스는 명성에 비해 양조장이 깨끗해 보이진 않았다. 피숑 바롱과 같이 지하에 모든 와인을 블렌딩 하는 거대한 통이 있었고 스테인리스와 오크 발효통을 지나 콘크리트 발효조가 있는 곳으로 가보니 정말 예전에 만들어둔 것 같은 레트로 컬러들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오크통 안에서 와인이 익어가는 숙성고는 최근에 리노베이션을 마친 듯 깨끗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독특하게도 천장에 나무를 물결이 치는 것과 같이 넘실대는 형태로 설치하여 공기 순환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선 테이스팅 룸으로 향했는데 그랑 방 한 병, 그것도 오프 빈티지라고 얘기하는 2011년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적잖이 실망했다. 버티컬은 아니어도 세컨드 와인이라도 함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래도 유명세만큼이나 품질은 정말 좋았는데 오프 빈티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깊이감과 복합미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렇게 행복해하던 샤또 마고도 2004년 빈티지를 주지 않았는가. 샤또 말레스코 쌩택쥐페리 또한 오프 빈티지가 그레이트 빈티지보다 더 좋지 않았나.


 어쨌든 조금은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다시 먼 거리를 다시 돌아와 앙젤뤼스의 시그니처인 건물 중앙에 달린 종 앞으로 서서 인사를 하려 했지만, 담당자는 준비한 것이 있다고 들어보라고 하며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종이 울리며 알 수 없는 멜로디가 흘러나왔는데 내가 한국에서 왔기에 한국 국가를 틀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피커로 전혀 알 수 없는 멜로디가 계속 흘러나왔고 서로 민망한 상황이 이어지다가 악수를 나누고선 앙젤뤼스를 떠났다.




 앙젤뤼스에서의 투어는 생각보다도 훨씬 빨리 끝났고 바로 다음 약속으로 이동했다. 이번에 방문할 곳은 같은 알파벳으로 시작하지만 기대감이 너무나 달라 아까부터 계속 흥분상태였다. 처음 이메일을 쓸 때부터 어차피 까일 곳, 굳이 써야 하나? 그래도 못 먹어도 찔러나 보자 하고 메일을 보냈던 곳이었고 다음날 흔쾌히 오너인 안느-샤흘로뜨 보티에가 방문 예약을 잡아주겠다는 답변에 눈을 의심하고 몇 번이나 눈을 비벼가며 확인했던 곳이다. 그리고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뭔가 오류가 있다거나 메일 주소가 잘못되어 누군가 나를 골려 먹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불안감이 생겼었다.


 차로 가기에 매우 좁은 도로를 지나치다가 길을 잘못 들어 돌아 나오느라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처음 도착해 바라본 건물의 모습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라 원시적으로 보였다. 거대한 암석 아래에 돌을 깎아 만들어놓은 집이었다. 포도밭을 직접 나가보진 못했지만 와이너리 앞에서 포도밭을 바라보며 간단한 설명을 해주고 바로 숙성고로 향했다. 제대로 된 양조장은 다른 곳에 있었지만, 이곳에도 아주 작은 오크 발효통들이 늘어져 있었고 그 뒤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에 투박하게 오크통들이 자갈과 콘크리트 레일 위로 놓여있었다.


 숙성 중인 오크 통의 마개를 열더니 향을 맡아보고선 스포이드를 들고 우리 네 명과 본인의 와인 잔에 따라 테이스팅했다. 이제 갓 오크 통에 들어간 2018 빈티지였다. 확실히 메독보다 부드러운 곳인데다가 와인 명가여서 그런지 균형감이 아직 완전히 잡히지 않았는데도 입안에서 질감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테이스팅하는 우리를 안느-샤흘로뜨가 빤히 보고 있어서 속으로 배럴에 있는 와인을 한 잔씩 줬으니 그만 가보라는 것인가, 비싼 와인을 만드는 곳들은 다 이런 식인가 하고 실망하던 찰나였다. 하지만 잔을 정리하더니 이제 테이스팅하러 가자며 처음 봤던 건물로 향했다.


 일반 집 같은 응접실에 들어서니 가운데 거대한 테이블에 와인 네 병이 놓여있었다. 한 번만 먹어보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던 샤또 오존[14] 2008 빈티지가 그곳에 위풍당당하게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서 있었다. 그 옆으로는 보티에 가문이 소유한 다른 와이너리의 와인들도 있었는데 샤또 라 클로트 2015, 샤또 시마흐 2016, 샤또 드 퐁벨[15] 2016 까지, 조금 전에 오픈 한 듯 어깨까지 와인이 차 있는 채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세 가지의 와인들도 충분히 놀라웠다. 여기에 이렇게 모여있으니 그렇지 각각이 훌륭한 와이너리의 와인들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와인에 가려져 있었는데 프리미엄 중에서도 초특급이라고 불리는 오존 와인이었다.


 와인을 접한 아주 초창기 때부터 몇 가지 뇌리에 박힌 이름이 있었는데 이 와인이 그중 하나였다. 샤또 마고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진한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혀를 스쳐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루 표현하지도 못할 만큼 다양한 풍미들이 입안을 가득 감싸 안았다. 방문을 받아준 안느-샤흘로뜨가, 이 방문을 만들 수 있게 프랑스로 온 지호가, 흔쾌히 휴가를 내준 파비앙이, 함께 와준 엘리와 조니가,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이 감사했다.


 다들 진한 감동을 하였고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선 안느-샤흘로뜨는 잠깐 기다리라며 서재로 갔다. 다시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책 네 권이 들려있었다. 선물이라며 오존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한 권씩 나눠주었다. 먼발치에서만 봤어도 좋았을, 직접 만나만 봤어도 영광이었을, 테이스팅만 했어도 행복했을 그런 곳이었지만 모든 걸 다 누리고 기대도 못 한 선물까지 받아들었다. 문득 왜 우리를 받아줬냐는 궁금함이 생겨 물어봤다.


"신기하다고 생각했어요. 와인 기자인데 보르도에 와서 포도 재배와 양조를 하고, 그리고 여기 친구는 또 인섹과 꺄파를 나와서 와이너리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그동안 한국인 방문객을 안 받아봐서 너무 궁금했었어요. 호호."


 더욱 영광이었다.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가는 길, 쌩-떼밀리옹 마을에는 온종일 껴있는 회색빛 먹구름이 걷히고 지평선으로 완벽한 아치를 만들고 영롱하게 선명한 색을 그려 넣은 무지개가 눈이 부시게 떴다. 오존을 떠나 마을 중심부에 들어가니 해가 잠에 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전에 마리옹과 함께 퇴근하며 내일 세상이 멸망하는데 단 한 곳을 가야 한다면 어딜 갈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마리옹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쌩-떼밀리옹이라고 말했었다. 낙조로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마을을 보니 왜 보르도 사람들이 이곳을 그리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


[1] 지고 다뇨(Gigot d'Agneau): 새끼 양 넓적다리 요리

[2] 에르미따주 뒤 픽 생 루, 뀌베 쌩뜨 아녜스(Ermitage du Pic Saint Loup Cuvée Sainte Agnès): 와인 이름

[3] 쌩-떼밀리옹(Saint-Émilion): 보르도 우안에 있는 와인 생산 지역으로 메를로와 까베르네 프랑 품종 비율이 높아 부드러운 미감을 가진 와인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4] 뻬싹-레오냥(Pessac-Léognan): 그라브에 속하는 세부 지역으로 화이트 와인이 아주 유명하다.

[5] 샤또 오-브리옹(Château Haut-Brion): 보르도 그랑 크뤼 클라쎄 5개 1등급 와이너리 중 한 곳

[6] 샤또 라 미씨옹 오-브리옹(Château La Mission Haut-Brion): 와이너리 이름[7] 랙킹(Racking???): 와인 양조 용어로 침전물을 가라앉히고 윗부분의 깨끗한 와인만 걸러내는 작업이다.

[8] 청징(finning): 와인 양조 용어로 단백질을 활용해 침전물을 바닥으로 가라앉히는 작업이다.

[9] 클라렁델 보르도(Clarendelle Bordeaux), 클라렁델 쌩-떼밀리옹(Clarendelle Saint-Émilion), 라 샤펠 드 라 미씨옹 오-브리옹(La Chapelle de La Mission Haut-Brion), 르 클라렁스 드 오-브리옹(Le Clarence de Haut-Brion), 라 클라흐떼 드 오-브리옹 블랑(La Clarté de Haut-Brion Blanc), 샤또 라 미씨옹 오-브리옹 블랑(Château La Mission Haut-Brion Blanc), 샤또 오-브리옹 블랑(Château Haut-Brion Blanc)

[10] 샤또 꺙튀스(Château Quintus)

[11] 르 드라공 드 꺙튀스(Le Dragon de Quintus)

[12] 샤또 앙젤뤼스(Château Angelus): 쌩떼밀리옹 그랑 크뤼 클라쎄 A등급의 와이너리

[13] 안느-샤흘로뜨 보티에(Anne-Charlotte Vauthier)

[14] 샤또 오존(Château Ausone): 쌩떼밀리옹 그랑 크뤼 클라쎄 A등급의 와이너리

[15] 샤또 라 클로트(Château La Clotte), 샤또 시마흐(Château Simard), 샤또 드 퐁벨(Château de Fonbel): 와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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