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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비 May 26. 2020

안녕, 큰 회사는 처음이지?

첫 큰 회사에서의 근무. 잘 살아남고 있다. 아직까지는.

정확히 2월 3일 오전 7시 50분경이었다. 새로운 오피스에 들뜬 마음으로 들어선 것이. 인터뷰 때 그저 신기하기만 했던 경험들이 꿈이 아니라니. 난 지금, 런던에 있다.



줄곧 런던에서 직장인으로 살아보는 것을 꿈꿔왔다. 영어 공부한답시고 십수 년 전 3-4개월 머물렀던 것이 거의 내 런던 생활의 다였던 터라 뭔가 런던에서 일하며 사는 것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공부하는 학생으로 부모님 용돈 받아 생활하는 것과, 지금의 독립한 나의 런던은 사뭇 그 시작이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싱가포르에 두고 오는 인연들과 눈물의 작별인사를 하고 비행기에 올랐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마냥 행복하지도, 좋지만도 않았던. 내가 과연 잘 버텨낼 수 있을까. 난 이제 혼자인데.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있는 시간도 잠시. 주말이 지나고 첫 출근하는 날이 왔고, 인터뷰 이후 처음으로 다시 보는 오피스 광경에 다시금 두려움이 밀려왔다. 북적대는 로비, 바삐 출근하는 사람들, 안내 대기하는 방문자들..

처음 회사에 들어서서는 같이 일하게 될 팀을 만나지도 못한 채, 새로 조인한 50여 명과 함께 오리엔테이션을 하기 위한 별도의 건물로 들어갔다. 56명? 나 말고 50명이 넘는 사람이 이번 주에만 함께 조인하다니. 새삼 스타트업에서 전전하다 큰 회사에서 처음 일해보는 쫄탱이 감성이 뭉근히 올라왔다.


오리엔테이션 때 받은 여러 가지 스티커로 맘을 진정시켰다.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라 함은 그게 무엇이든 가슴 벅찬 일이다. 수많은 새로운 시작과 끝맺음을 뒤로하고 여기까지 왔지만 이번에는 좀 더 특별했다. 뭔가 다른 차원의 처음이라고나 할까. 새로운 나라, 새로운 도시, 새로운 회사, 새로운 팀, 새로운 사람들.. 게다가 적응할 새도 없이 두 손에 나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수많은 과제가 주어졌다. 아직 집도 구하지 못해 회사가 마련해 준 임시거처에 머무르고 있는 처지였다. 싱가포르 적응에 힘들어하던 시기가 생각이 난다. 한 1년 동안은 힘들었는데.. 런던은 좀 나을까.


개인적인 태스크는 차치하고, 새롭게 시작하게 된 회사 일에만 정신을 집중해 보기로 한다. 이렇게 큰 팀과 함께 일하게 된다는 것도 두렵기도 하지만 사실 너무나 설레는 일이었다.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면서 멋진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의 교차..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묘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다시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화장실이 가고 싶어 지는 것 같다.

 

내가 속한 팀은 광고 팀 안에 속해있는 카탈로그 (줄여서 Cat) 플랫폼을 전담하는 팀이다.


걱정 마. 한 짧으면 6개월?
그래도 1년은 걸릴 거야.


동료들이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마다 해주는 이야기이다. 이제까지 근무했던 작은 스타트업에 비하면 이만한 규모의 큰 회사에서의 온보딩은 정말 내가 상상했던 그 이상의 것이었다. 전체 온보딩 프로세스는 장작 6개월 이상이 걸리는 데다가 소화해야 할 콘텐츠는 그야말로 처음 보는 스케일의 것들이었다. 온갖 비디오 교육자료들과 읽어야 할 아티클들, 회사 구조의 이해, 전체 제품군들에 관한 이해.. 지금 4개월 차로 일하고 있지만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 마치 이것들을 언젠가 다 이해하고 숙지하는 날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만 같은 느낌이랄까. 이전에 스타트업에서 일하던 시절 일주일 남짓으로 가능했던 온보딩은 이젠 언제 그랬나 싶은 일이 되어버렸다.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하지만 또 마음이 급한 나는, 내가 나 스스로에게 기대하는 페이스를 따라잡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없이 우울해지기도 했다. 회사차원에서 계속적으로 주의를 요하는 가면 증후군 (Imposter Syndrome)에 나 역시나 휘말리고 있다. 런던에서 이렇게 좋은 회사에 근무하게 되었다는 건 아무래도 여전히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래도 언제든 꼭 이루어 보고 싶었던 일이 아니었던가. 런던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격동의 코비드 안에서도 4개월이란 시간을 홀로 잘 버텨오고 있다. 아직까지는 버틴다는 표현이 더 적합한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완벽한 일상이 되기까지는 아직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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