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출발 날짜는 7월 22일로 정했다.
아버지는 서울 출발 날짜가 정확하지 않지만 7월 10일경이었다고 했다. 출발 4일 만에 매포에서 금강을 건너고, 금남면 인근의 하영환 사장님의 대고모님 댁에서 2~3일, 또다시 회덕 인근 하 사장님의 삼촌댁에서 4~5일을 머물렀다가, 미군의 대전전투가 끝나고 전선이 고향집 이남으로 진행되기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출발했다고 했으니 7월 10일이 거의 맞는 것 같다.
위키백과 대전전투에 따르면, 미8군 제24사단의 대전전투는 7월 14일부터 7월 21일까지 대전에서 진행되었고, 미8군 제24사단 19연대 2대대는 7월 21일경 영동을 지나 금산을 거쳐 전주로 내려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전전투에서 전투력을 대부분 상실한 미8군 제24사단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이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이야기를 고등학교 교련시간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가능하면 아버지와 같은 날 출발하고 싶었으나, 14일에는 선약이 있었고, 21일 오전에는 퇴행성 관절염으로 팔이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아산병원을 가기로 되어 있고, 같은 날 오후에는 치매가 진행 중인 장모님을 모시고 집사람과 함께 강남성모병원을 다녀오기로 한 약속이 있다.
현실적으로는 7월 15일이 출발 가능한 날짜였지만, 하루 8시간씩 시속 4km 정도의 속도로 걷는다고 할 때 하루에 30km 남짓 걸을 수 있을 것이고, 시골집까지는 약 220km라는 점을 감안할 때 중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7일 이상이 걸릴 길이다. 당시 아버지는 24살의 혈기왕성한 젊은이였고 2명의 친구와 함께 출발한 길이었으나, 지금의 나는 50대 후반의 중늙은이인 데다가 동반자도 없이 혼자 걸어가려는 것이기에 21일 이전에 여행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출발 날짜를 7월 22일로 정했다.
1950년 아버지는 서울공대 기계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수년전 할아버지는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에 복합 골절상을 입어 몇년째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고, 큰아버지는 각혈까지 하며 누워있던 폐결핵에서 막 회복되기 시작한 시점으로, 집안 형편이 나름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등록금과 하숙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입주 가정교사가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했다.
당시 각급학교의 개학은 6월 1일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회고록에 따르면 6월이 새학기 초인 것처럼 기술되어 있어서 서울대학교 역사에 대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본 결과 서울대학교 홈페이지에는 5월 12일에 제4회 졸업식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총동창회 홈페이지에는 '1950년 6월 개강 직후 문리대 국어국문학과는 충남 안면도로 방언조사를 떠났다.(사진1) 당시는 신년 새학기가 6월에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하여 주변의 도움으로 새학기가 시작되는 6월 초 가회동 이씨 댁에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입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월 보수는 5~6개월 모으면 용돈을 쓰고도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입주 가정교사로 채 한 달을 채우지도 못한 시점에 625를 맞아, 결국 약속한 보수를 한 번 받아 보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집주인 이씨는 한민당 경북 예천 군당 위원장으로 가회동 집은 이씨의 딸인 경기여중 2학년생의 서울 유학을 위해 마련한 집이었는데, 그 집에는 이씨의 딸 외에도 사촌 오빠인 중동중학교 5학년생, 중학교 재수생인 외사촌 여동생까지 있어서 학생 3명의 가정교사인 셈이었다고 한다. 또한 가회동 이씨 댁의 아랫채에는 평양에서 살다가 월남한 모자가 세 들어 있었고, 그 아들은 중동중학교 2학년이었다고 한다.
입주한 지 수일이 지난 후에 40대 초반인 집주인 이씨가 상경하여 아버지와 만난 자리에서 '모든 것을 선생님께 부탁한다'고 한 말에 대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 말 한마디가 어떤 무게로 자신을 괴롭히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한 채..
그 날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1950년 6월 25 일은 평범한 일요일이었다. 내가 가회동 이씨 댁에 가정교사로 입주한 지 세 번째 일요일 정도로 기억한다. 이씨 댁 가족들도 아직 나를 대하기 어려워했고, 나도 주로 중동중 5학년생에게 여러 집안 사정을 묻곤 하던 때였다. 또 나는 졸업반에 진급한지도 얼마 안 되어 1년만 잘 지나면 사회로 나간다는 생각으로 새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며 잔뜩 긴장하고 지내던 때라 스트레스도 풀고 재충전하리는 생각으로 상당히 기대하였던 일요일 아침이었다.
그 날 아침을 먹고 국방색 국민복 비슷한 옷차림에 비가 온 다음 날이라 장화를 신고 우산을 가지고 가회동 이씨 댁을 나와 천도교당 앞으로 해서 낙원동을 지나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심상치 않다. 잔뜩 긴장한 분위기인데, 파고다 공원 근처까지 나오니 공원 앞 담장에 벽보가 붙어있고 벽보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벽보를 보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틈에서 벽보를 읽는 순간 '아! 이거 드디어 시작되었구나!'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벽보를 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서려있고, 어느 누구도 말이 없었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벽보에는 '오늘 미명을 기하여 38선 전 지역에서 괴로군들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아군은 이를 맞이하여 격퇴 중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때는 정오 이전이었고 종로거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전차가 왕래하고 있었으나 일반차량은 드물었다. 때로 군인들이 타고 있는 트럭들이 동대문 쪽을 향하여 질주하는 것을 보면서 발길을 화신백화점 쪽으로 옮겼다. 거리의 표정은 점차 긴박감을 더하여 갔고, 광화문 네거리 쪽에서 달려오는 지프차의 스피커를 통해서 다급한 남녀의 목소리로 방송이 흘러나왔다. '외출 중이나 휴가로 귀가 중인 국군장병들은 즉시 귀대하라!' 나는 화신 네거리에서 안국동 쪽으로 향하여 가회동 이씨 댁으로 돌아왔다.
가회동으로 돌아오니 여중생과 그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고, 중동중 5학년생과 아랫방의 월남한 학생은 상당히 불안해하며 내게서 무슨 말이 나오나 궁금한 눈치였다. 나는 당장 급변사태는 없는 듯하고 충분히 대비할 시간의 여유가 있을 것이며, 내일 대학에 나가서 친구들과 의견을 교환해 보려고 하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있으라 하였다.
도보여행의 출발 날짜는 정했지만, 과연 그 날 출발할지, 집에서부터 걸을지 아니면 일단 서울시내를 벗어나서 걷기 시작할지, 여전히 이 여행이 어떤 모양으로 전개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