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D-3

1950년 6월 26일 - 혼란의 하루

by 류병우

아버지는 경부선 철도를 따라가는 것이 고향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철길을 따라 걸으면서 우연만한 개울은 철교를 타고 건넜다고 했다.


나는 네이버 지도의 도보 길찾기 기능을 이용하여 최대한 경부선 철도에 가까운 길을 찾아, 우리집에서부터 조치원역까지의 경로를 8km 정도씩 끊어서 남하루트를 계획했다. 네이버 지도의 도보 길찾기 기능은 8km 이내로, 그것도 조치원 인근까지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조치원 이남은 길찾기 기능의 도움 없이도 591번 지방도, 17번 국도, 다시 4번 국도를 따라가면 경부선 철도와 거의 나란히 영동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영동에서 황간을 거쳐 매곡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도 차를 타고 자주 다녀봐서 잘 안다.


전쟁 발발 소식을 벽보로 확인한 아버지는 다음 날인 6월 26일 학교(현재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자리)로 가기 위해 청량리역으로 갔다. 하지만 유일한 통학 수단인 신공덕으로 가는 통학열차가 운행되지 않아 학교에 갈 수 없었고, 청량리역에서 친구를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보문동 경동중학 밑에 사는 사촌 관식이 형님댁에 들렀다가 오는 길에 정오가 지난 무렵부터는 먼데서 울리는 천둥소리 같은 포성이 들리기 시작했고, 아무런 소득 없이 원남동을 거쳐 다시 가회동 이씨 댁으로 돌아와 그 댁 할머니가 준비한 이른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계속 불안한 포성이 들려왔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대문 앞이 왁자지껄하고 사람들이 경기여중 쪽으로 달려가는 것 같았다. 모두 피난 보따리를 싸들고 내려가는 것이었다. 중동중 5학년인 이군과 경기여중 2학년인 이양이 사람들을 따라나갔다가 황급히 뛰어 들어오더니 '동네 전체가 피난을 떠나니 우리도 가야 한다'면서 짐을 싼다. 그리고는 할머니와 이양, 재수생 여학생까지 보따리를 들고 대문을 나가고, 뒤이어 이군도 배낭을 짊어지고 따라 나간다. 좀 기다리라는 내 소리에는 아무 대꾸도 없이 떠나갔다.


나도 별수 없이 서둘러 가방을 챙겨 대문을 뛰쳐나가 파출소 앞 큰길로 가보니, 남녀노소가 보따리를 이고 지고 낙원동 쪽으로 향하면서 서로 부르며 뛰어간다. 할머니, 이양, 이군을 찾아보았으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조금 늦게 나왔으니 빨리 앞서가서 찾아야겠다고 천도교당 앞까지 죽을힘을 다하여 뛰어 내려가면서 이씨 일가를 찾았으나 허사였다.


가방에 뭐를 챙겼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딱히 수중에 돈도 없고 귀중품이라고는 없었으니 속옷과 영어, 독어 사전을 챙겨 넣었던 것 같다.


가회동 쪽에서 내려오는 인파도 좀 거지반 하여 이제 더 기다려 봐야 허사일 것 같고, 그들은 앞서 갔을 것 같으나 어디 가서 찾을지 막연하였다. 계속 종로 2가 쪽으로 갔는지, 계동 쪽 또는 안국동 쪽으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서울역 쪽으로 갔을 것으로 생각하고 서울역 방향으로 가다 보니 이제 몇몇 사람들이 거꾸로 가회동 쪽으로 향해 뒤돌아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좀 생각을 정리할 요량으로 낙원동에서 경기여중 쪽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가는데 '선생님'하는 소리에 그쪽을 보니 이군이 배낭을 지고 다가온다. '할머니와 동생들은?'하고 물으니 자기도 뛰면서 찾아봤으나 찾을 수가 없고, 종로2가까지 갔으나 피난민이 쏟아져 나와 갈팡질팡하고 있어서 혼자 어디를 어떻게 갈지 몰라 집으로 되돌아오는 중이라고 하였다.


나는 집으로 가서 기다리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둘이서 집으로 왔다. 돌아와 보니 아랫채의 월남한 모자는 그대로 있었다. 그들은 피난한다고 서울을 떠나 봐야 자기들은 갈 데도 없다고 했다.


낮에 들었던 이야기로는 전선에서 괴뢰군은 격퇴되고 1사단 일부는 해주를 점령했다는 말도 있었는데, 갑자기 피난을 떠나야 한다고 사람들이 몰려 나가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으나 할머니와 이양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은 포탄이 떨어져 지붕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상 밑에 머리를 두고 잠을 청했으나, 할머니와 두 여학생의 안부가 걱정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포성은 그쳤다 들렸다 하며 점점 가까워졌다.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할머니와 이양은 그 길로 바로 서울역까지 가서 마지막 기차를 타고 한강을 건너 고생 끝에 무사히 예천 자택에 도착하였고, 인민군이 예천을 점령하였을 때는 다시 남하하여 인공 치하를 경험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할머니와 이양의 소식을 듣게 되기까지 수년동안 내 가슴 한편에는 내가 지켜줘야야 할 사람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응어리져 있었다.



아버지와 친구들은 출발 첫날 평택 인근 들판의 어느 농가에서 방을 빌려 잤다고 했다. 서울에서 평택까지의 거리는 거의 70km나 된다. 내가 그런 속도로 걷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과연 나는 며칠이나 걸릴까? 아니 포기하지 않고 시골집까지 갈 수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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