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D-2

1950년 6월 27일 - 세상이 뒤집어진 날

by 류병우

사진 맨 앞 사람이 아버지이고 아버지 오른쪽이 나의 대학동기이고 충북대 기계과 교수인 주진원의 아버지이다. 2대에 걸쳐 대학 동기동창이다. 뒤편 건물은 공대 1호관으로 30년 뒤인 1978년에는 나도 저 건물에서 강의를 듣고 아버지처럼 그 앞에서 친구들과 사진도 찍었다.


이 사진 외에도 아버지는 신공덕이라고 부르고, 우리는 공릉동 캠퍼스라고 부르던 그 교정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여러 장 남아있었다. 2008년 11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회고록을 정리하면서 피난길을 함께 한 친구들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2013년 사진을 지금은 고인이 되신 유제운 사장님께 보내드리고, 언제 찍은 것이며 사진 속에 인물들이 누구인지 알려달라고 부탁드렸다.


유제운 사장님은 아버지 장례에 만장을 써 주시고, 장지까지 와서 하관을 지켜주신 시쳇말로 아버지의 '베프'다. 나는 대학 3학년 여름방학에 유제운 사장님이 대표이사로 있던 창원 미원중기에서 대학 동기 임승철, 전삼표, 최석환과 함께 3주간 현장실습을 한 적도 있고, 그분의 외아들은 나의 기설과 선배이고 현재 전북대 기계과 교수인 유범상이다.


유제운 사장님은 사진 속의 인물의 이름을 기억해 내는데 어려움이 있다며, 동기 모임인 '기우회'에 사진을 가져가서 의논한 끝에 사진과 함께 등장인물의 이름을 적어 우편으로 보내주셨다. 나는 동기생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상하여 여쭤 보았더니, 당시에 동기생들은 다양한 경로로 서울 공대 기계과에 합류하였고, 혼란기에 수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함께 강의를 들었던 시기가 매우 짧았으며 사진들은 분명히 1948년 또는 49년에 찍었을 것이라고 하셨다. 전쟁 이후 3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후반까지도 각자의 삶에 쫓기어 동기생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하셨다.


해방 후 격변기에 학제가 어떻게 된 것인지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데, 아버지의 중학교 시절에 대한 또 다른 회고록을 살펴보면, 아버지는 1945년 일제 말기에 전시비상조치로 중학교를 4년 만에 졸업하고, 1945년 3월 경성고등공업학교(약칭 경성고공, 경성공전의 전신) 기계과에 입학했다. 해방 후 이듬해인 1946년 미군정청은 경성대학(약칭 성대, 구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경성법전, 경성의전, 경성공전, 경성광전 등 관, 공, 사립학교를 통폐합하여 종합대학으로서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하는 법령, 소위 국대안을 발표하였고, 이에 따라 아버지는 통합된 서울공대 기계과 전문부로 자동 편입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아버지는 1946년에 2년제인 전문부를 수료하고, 1947년에는 신학제인 4년제 서울공대 기계과에 학부1년차로 진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서울공대 기계과 학생 40여 명 중에는 아버지처럼 경성공전 출신도 있었지만, 넷째 외삼촌처럼 경성제대 예과 이갑(지금의 이공계 교양과정부에 해당)을 거쳐 학부1년차로 진입한 사람도 있고, 경성광전, 평양공전 혹은 일본의 공전이나 대학전문부를 거친 사람이 있는 가 하면, 김일성대학 출신의 월남학생, 일본 육사 출신도 있었다고 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1946년 미군정청에서 국대안을 공포하자, 학계는 좌익과 우익, 미군정과 한국인, 경성제대 출신 교수와 전문학교 출신 교수 등이 복잡하고 다층적인 대립구조 속에서 동맹휴학, 집단 사직 등 극렬한 국대안 반대 투쟁을 벌렸으나, 1947년 일부 단과대학에서 동맹휴학을 중지하기로 결의하면서 진정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1950년 서울공대 기계과 4학년생으로 625를 맞은 동급생들은 해방 후 극심한 좌우 이념의 대립과 국대안 반대 투쟁의 소용돌이를 지나면서 중용의 이성을 지키고자 하는 묵시적인 합의를 이룬 그룹이라고 평가했다.


아버지는 회고록에서 전쟁 발발 이틀째인 1950년 6월 27일을 '세상이 뒤집어진 날'이라고 불렀다.



중동중 5년생 이군이 밖에 나갔다 오더니 파출소에 경관들이 하나도 없고, 집집마다 문이 닫혀있는 것이 좀 이상하다고 한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어도 할머니와 두 여학생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찾으러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길을 나섰다.


종로 2가를 지나 필동 입구까지 갔을 때, 갑자기 포성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초목으로 위장한 육중한 탱크 두대가 남산 쪽으로 올라가는 골목을 향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대포를 쏘고 있었다. 탱크 뒤에는 몇 명인지 알 수 없는 초목으로 위장한 군인들이 대포 발사 방향을 살피고 있었는데, 그들은 눈에 익은 국군의 복장이 아니었다.


'아뿔싸!'


나는 부지불식간에 전투의 한 복판에 들어선 것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되돌아서서 을지로 2가에서 시청 쪽으로 갔다. 나는 할머니와 여학생들의 소식을 얻으러 나온 것인데, 국군이 후퇴하고 인민군이 들어온 것이다. 세상이 뒤집어진 것이다.



뒤이어 아버지는 무교동 근방에서 좌익활동으로 투옥되었다가 그 날 감옥(서대문 형무소)이 터져 풀려나 온 중학교 동창과 마주치기도 하고, 이화동 인근에서는 따발총과 경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미아리 방면에서 오는 듯 한 인민군 행렬을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가회동 이씨 댁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동 입구쯤에서는 젊은 인민군 군관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어찌 된 영문인지 물어보고 있어서 슬그머니 그중에 끼어 얘기를 들어봤다고 한다. 당시 그 군관은 북한의 정치공작원이었던 것 같았으며, 그 때까지만 해도 남침을 솔직이 인정하면서 전쟁의 불가피성을 설명하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다리도 아프고 발바닥도 부르트기 시작한 출발 이틀째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오늘은 약국에 들러 일회용 밴드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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