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준비하는 시간
12/4 와룡공원-숙정문-청운대-창의문 코스를 다녀온 후, 12/9에는 북악스카이웨이를 따라 집에서부터 팔각정-창의문 코스를 다녀왔다. 팔각정은 차로 다녀온 적은 있어도 걸어서 갔던 적은 없었다. 스카이웨이 코스는 차량 통행이 많은 아스팔트 길 옆으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서 등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싱거웠다.
12/12 훈련의 강도를 높여 북한산성입구-태고사-용암문-백운대-우이동 코스를 다녀왔다. 처음에는 북한산성입구에서 보국문을 거쳐 정릉 방향으로 넘어가려고 하다가, 체력도 남는 것 같고 시간도 넉넉해서 태고사 앞에서 백운대로 방향을 틀었다. 위문에서 마지막 백운대를 오르는 200여 m는 거의 암벽 등반 수준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야 ‘아.. 이 영화 봤던 거구나.’하고 생각이 난다. 네발로 기어오르다 보니 1987년에도 간신히 백운대까지 올라갔던 기억이 났다.
백운대를 지나 우이동으로 내려오는 내리막길은 다소 가파른 내리막이다. 여기서 새로 산 등산화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내리막길에서는 등산화 끈을 바짝 조여서 발목을 잡아주게 하여, 발가락 앞이 신발에 닿지 않도록 해주어야 발가락이 편하다. 다이얼 방식의 등산화이기 때문에 다이얼을 돌려 끈을 조였지만 발등과 발목이 동시에 조여져서 발등과 발목이 아프다. 그래서 약간 느슨하게 풀어주니 이번에는 발가락 끝이 닿아서 발이 아프다. 15만 원씩이나 주고 산 등산화가 이런 문제점이 있다니. ‘깔창을 하나 깔아 볼까? 망가진 등산화를 본드로 붙여서 그냥 써 볼까? 등산화를 새로 사야 할라나?’ 등산화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12/15은 북한산 둘레길을 따라 정릉 솔샘길 자연생태공원부터 우이동까지 14km를 걸었다. 솔샘길을 얼마 지나지 않은 곳은 응달이어서 눈이 녹지 않은 상태였다. 다행히 많은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 눈은 뽀드득 소리를 내며 밟혔다. 여기는 미끄럽지 않아서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었지만 안나푸르나에서 미끄러운 눈길을 만난다면? 쇼핑 리스트에 ‘아이젠’이 추가되었다. 거기는 계속 영하라서 녹지 않고 쌓여 있을 텐데 ‘스패츠’도 있어야 하나?
점심거리를 준비하지 못하고 출발했는데 12시쯤 화계사 근방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화계사의 점심공양 시간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어색한 발걸음으로 기웃거리다 눈치껏 사람들을 따라 식당으로 찾아들어 갔다. 눈치가 빠르면 절간에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줄 서서 나물비빔밥 한 그릇을 받아 순식간에 해 치웠다. 고기라고는 한점도 들어있지 않았지만 새콤한 초고추장에 비벼먹는 나물비빔밥은 말 그대로 별미였다. 다 먹고 나니 옆 자리에 있던 아주머니가 후식으로 먹으라며 망고 말린 것을 건네준다. 후식까지 잘 먹고 식기를 반납하려고 들고 가니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이 친절하게 반납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설명대로 식기를 잘 씻어 반납하고 식당 입구의 시주함에 점심값으로 만원을 넣고 나왔다. 이 정도 맛이면 그 값을 치르겠노라고 생각한 값이다. 내 평생 처음으로 절밥을 먹어 본 날이다.
이날은 14km 거리를 점심시간을 포함해서 5시간 반에 주파했다. 물론 둘레길은 백운대 코스에 비하면 높낮이 변화도 심하지 않았고, 나무 계단으로 잘 정비해 놓은 곳이 많아서 비교적 덜 힘들었다. 이 정도 길이라면 하루에 10여 km를 5~6시간에 걷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 안나푸르나가 별거겠어? 근거 없는 자신감이 마구 솟아오르며 마음이 조급해진다.
우선 언제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물론 안나푸르나 트레킹에 가장 좋은 계절은 9월부터 11월 사이의 가을이란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청명한 날씨 덕분에 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계절이란다. 단점은 트레킹 하기에 좋아서 세계 각지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온다는 것이다. 주말 북한산처럼 한국사람도 많단다. 자고로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 가면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기 어려운 법이라서, 나는 가급적 그런 시기는 피하고 싶다. 그다음은 3월부터 5월 사이의 봄으로, 이때는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계절이어서 눈이 호강한단다. 특히 네팔의 국화인 붉은만병초(일명 랄리구라스)가 지천으로 피어난다고 하며, 인도식당 나사장도 봄에 가라고 권했다. 하지만, 나는 학교 강의를 해야 하니까 아직 수년간은 봄과 가을에 긴 시간을 내기는 힘들다.
안나푸르나의 여름은 몬순 때문에 흐린 날이 많고 비가 많이 오는 날엔 길이 끊겨 고립되기도 하고, 산거머리가 기승을 부려서 나무 위에 매달려 있다가 다이빙으로 목덜미를 물기도 한다고 한다. 다녀온 후기를 보면 여름이라고 가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닌 듯 하지만, 트레킹에 적합하지 않다고 부정적인 의견이 대부분이다.
결국 겨울방학 1, 2월이 나에게 남는다. 1월 중순까지는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궤도에 오르기 전이라서 자리를 비우기 어려울 것 같고, 1월 말은 지나야 자리를 비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2월 초에는 설날이 있고, 2월에는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할 진료예약이 4건이나 있다. 최소한 열흘 이상을 확보해야 힘들거나 날씨가 나쁠 때 하루 이틀 쉬었다가 갈 수 있는 정도의 느긋한 일정이 가능하다. 현지 여행사 Anup 씨는 1월보다는 2월이 트레킹 하기에 더 좋다고 했다.
비행기표를 싸게 사는 요령을 얘기하는 사이트에 의하면 출발 7주 전 화요일에 가장 싸게 살 수 있다고 한다. 2월에 가려면 비행기표는 지금 사는 게 유리하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에 카트만두 직항이 있지만 120만 원대의 고가이다. 남아공 갈 때도 110만 원에 다녀왔는데, 네팔을 그 값 주고는 못 가겠다. KAYAK, Skyscanner를 통해서 네팔 카트만두행 비행기표를 찾아봤다. 중국동방항공이 가장 싸기는 하지만 경유지 2군데고 경유지에서의 대기시간도 길어서 피곤할 것 같다. 방콕을 경유하는 타이항공이 1회 경유에 가격도 그런대로 경쟁력이 있어 보인다.
설 지나 2/7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갔다 온 후 2/8 출발해서, 2/9 카트만두에 도착하고, 2/10부터 트레킹을 시작하면 2/20까지는 카트만두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그러면 2/21에 방콕으로 가서 며칠간 타이마사지나 받으며 트레킹의 피로를 완전히 풀고 2월 말 서울로 돌아온다. 이게 그럴듯하다. 아직 체력이 충분히 준비된 것 같지는 않지만 퇴행성 관절염의 조짐을 보이는 왼쪽 무릎은 시간이 갈수록 나빠질 것이기 때문에, 오늘이 남은 내 인생에서 가장 젊고 컨디션 좋은 날이다. 하루라도 빨리 갔다 와야 한다. ‘여행은 다리가 떨릴 때가 아니라, 가슴이 떨릴 때 가야 한다’고 하던 후배의 말도 생각났다.
내가 나에게 선물하는 크리스마스 선물 겸 환갑 선물로 2/8 출발하는 네팔행 비행기표를 질렀다.
여행이란 막상 출발하고 나면 ‘개고생’이다. 물론 기대 이상의 가슴 시린 풍광과 마주하는 시간이 있겠지만, 그 시간은 보통 짧다. 나에게 있어서 여행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은 여행을 준비할 때다. 여행을 준비하며 상상하는 동안에는 고생 고생하며 걸어 다닐 일도 없고, 추운 바깥에서 떨 필요도 없다. 따뜻한 방 안에서 인터넷을 뒤져서 다른 사람의 후기를 읽으며 여행을 시뮬레이션할 때.. 그때가 제일 행복하다.
핸드폰으로 필요해 보이는 물건 들을 골라 담고 주문하면, 며칠 후 내 앞으로 보내진 상자들이 현관문 앞에 쌓인다. 내가 주문했다는 기억은 희미해지고 마치 누군가 나에게 선물을 보내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반가운 마음으로 포장을 풀어 선물을 확인한다.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것은 한 달 뒤의 일이니 지금의 행복은 전혀 방해받지 않는다. 온라인 쇼핑은 여행을 앞둔 나에게 내가 보내는 선물이다.
네팔에서는 구글 지도보다 오프라인 상태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maps.me가 더 편리하다고 한다. ‘음.. Ulleri에서 Ghorepani까지의 거리는 7.5km에 고도가 780m 상승하는군. 780m면 백운대와 같은 높이네.. Ghorepani는 해발 2820m니까 거기부터는 고산 증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 그렇다면 Ulleri에서 출발하기 전날부터 고산병 예방약을 먹어야겠지. Ulleri는 해발 2000m라서 많이 춥지는 않을 거야. 출발할 때는 약간 춥다는 느낌으로 입는 게 좋다고 했는데, 옷은 뭘 입지? 비상시를 대비해서 고어텍스 방수 재킷이 하나 있어야 되는데, 이 참에 하나 장만할까? 가는 길에 점심은 어디에서 먹지? Nangethanti를 지나면 깔딱 고개가 있는 거 같네.. 고개를 넘기 전에 점심을 먹어야 하나? 그러면 점심 먹기에 너무 이르지 않을까? 고개를 넘어가서 점심을 먹을까? 아니야, 늦는 것보다는 빠른 게 나아.. 점심 먹고 고개를 넘어야지.. Ghorepani에서는 어느 롯지에서 자는 게 좋을까? Poon Hill에 한 발자국이라도 가까운 데가 좋겠지?
머릿속에서는 벌써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여러 차례 올라갔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