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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병우 Jan 25. 2019

3. 트레킹을 위한 준비물

준비물 목록 제1호, 체력

우리 딸이 ‘아빠의 애인’이라고 부르는 친구가 있다. 2015년 2월에 그 친구와 처음으로 아프리카 케냐를 여행한 이후로, 최근 수년간 필리핀 골프여행을 비롯해서 남미 5개국을 35박 36일 배낭여행 패키지로 함께 다녀왔고, 캄챠카반도, 모로코, 바이칼 호수, 남아공 등지를 매년 한두 차례 함께 여행했다. 사귀는 사이? 절대 아니다. 남들은 나에게 여행을 함께 할 좋은 친구가 있어서 좋겠다고 하지만, 나는 거꾸로 내가 그의 좋은 친구라고 주장한다.


남미에서 배낭여행 패키지 프로그램에 맞춰 다녀 보니까 저녁 늦게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지도 못하고 다음 날 새벽에 출발한다든지, 저녁 9시에 버스를 타서 밤새 이동하는 등 다른 사람이 짜 놓은 스케줄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그 후로는 패키지여행은 하지 않기로 했고, 예약 없이 그때그때 현지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자유배낭여행 스타일로 바꿨다. 우리의 여행 스타일이 그렇다 보니, 45l짜리 배낭, 3계절용 슬리핑백, 장거리 비행기 여행을 위한 욕창방지 방석까지 웬만한 배낭여행 물품은 거의 다 갖추고 있다.


하지만 겨울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은 낮 최고 22도 수준의 초여름 날씨에서 시작해서, 점점 고도를 높여 ABC에 가면 최저 영하 25도, 낮 최고 온도조차도 영하 10도인 완벽한 한 겨울 날씨 속에서, 비박이나 다름없는 난방도 없는 산속 롯지에서 잠을 자며 몇 날 며칠을 온전히 나의 두 다리 힘으로 걸어가야 하는 ‘트레킹’이다. 지금까지의 여행과는 급이 다르다.


걸어서 하는 도보여행이라면 2016년 여름, 625 때 아버지가 서울에서 고향 매곡까지 걸어간 피난길을 따라 걸어가 보겠노라고 호기롭게 출발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걷는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 그냥 평소 신던 운동화를 신고, 길을 따라 한 발짝씩 떼어 놓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매곡까지는 약 220여 km이다. 아버지와 같은 경로를 조금 천천히 걸어가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첫날 20여 km를 6시간 동안 걸었다. 하지만 출발 첫날부터 발바닥에서 이상 신호가 오기 시작했고, 급기야 2일 차부터는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서 한 발짝 옮기는 일이 너무나도 고통이었다.


결국 3일 차에는 병원 진료를 받고, 우체국으로 가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짐을 모두 싸서 집으로 보내고, 백화점 등산용품 코너에 가서 등산스틱을 한 세트 샀다. 그리고는, 하루 2~3번씩 발바닥에 거즈를 갈아 붙이면서 소위 '붙여도 갈비'이론을 동원하여 걷는 사이사이를 버스와 택시로 붙여서 도보여행을 마쳤다. 당시 10일간 실제로 걸어간 거리는 150km 이하로 추정된다. 오랫동안 잘 걸으려면 무엇보다도 좋은 신발과 발 관리가 중요하다는 값진 교훈을 얻었다.


우선 좋은 등산화가 하나 필요했다. 아버지와 북한산을 다녀올 때 신었던 등산화가 쓸만했었는데, 10년 전에 어머니가 사진을 모두 스캔해서 컴퓨터에 저장하고 종이 사진을 시골로 가져가서 태우자고 하셨을 때, 뜨거운 시골집 아궁이 앞에 너무 오래 서있는 바람에 등산화의 접착제가 다 녹아 고무 사이가 벌어져서 못 쓰게 되었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요즘 많이 쓰는 다이얼 달린 등산화 15만 원짜리를 260mm와 265mm 2개를 주문했다. 인터넷 쇼핑을 많이 했지만, 맞는 사이즈를 고르기 위해서 반품을 작정하고 계획적으로 2개를 주문해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태양의 고도가 가장 높다는 하지 즈음에, 필리핀에서 골프를 치면서 초록색 형광 골프공이 서너 시간 만에 노란색으로 변화되는 것을 봤다. 강한 자외선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고글, 모자, 버프, 래시가드, 팔토시, 선크림 등은 이미 준비되어 있고, 땀을 흡수하여 빨리 말려준다는 소위 ‘흡한속건’ 반팔 티셔츠도 있다. ‘속옷을 대체할 흡한속건 반팔 티셔츠를 하나쯤 더 사야겠군.’ 안나푸르나 쇼핑 리스트를 만들고 ‘흡한속건 반팔 티셔츠’를 첫 줄에 적었다.


2018년 1월에는 친구와 남아공 케이프타운과 가든루트를 골프여행으로 다녀왔다. 골프여행이라면 필리핀을 여러 차례 다녀 봤기 때문에 특별히 추가적인 준비물은 필요 없었지만, 드라이브 샷이 항상 다운 블로우에 맞아 공이 뜨지 않고 바로 앞에 꼬라박는 형편없는 상태였다. 이대로 가면 골프여행은 스트레스일 뿐이었다.


이 여행의 준비물 목록 제1호는 드라이브 샷의 교정이었다. 알고 지내던 레슨 프로에게 1개월치 레슨비를 내면서 남아공 출발이 2주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2주 만에 내 드라이브 샷을 교정해 달라고 했다. 거의 매일 1시간씩 레슨을 받고 연습을 했고, 훌륭한 선생님 덕택으로 스윙이 어느 정도 교정되어 드라이브 샷 성공률은 드라마틱하게 높아졌다. 그 덕분에 인도양 해변을 따라 Lynx 코스로 조성된 화려한 Pinnacle Point Golf Resort 파 5홀에서 칩샷이 홀컵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생애 첫 이글을 기록하는 짜릿함을 맛보았다.


여행의 테마에 맞춘 철저한 준비가 여행의 즐거움을 극대화시키는 비결이다. 단, 남아공 여행은 골프여행이라서 현지에서 차를 렌트해서 운전을 하고 다녀야 했는데, 출발 몇 주 전에 “수동변속기 운전할 수 있지?”라고 묻는 친구에게 “물론 할 수 있지.”라고 당당하게 대답했지만, 그것이 국제운전면허를 준비하라는 뜻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덕분에 남아공과 두바이를 렌터카로 누비는 4주간 동안 조수석에 앉아서 운전하는 친구로부터 갖은 불평과 구박을 견뎌야 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은 극기 훈련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거대한 설산이 대가를 치른 자에게만 보여주는 비경을 감상하러 간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매일 10km에 달하는 거리를 5~8시간 동안 걸어야 하는데, 계속 땅바닥만 쳐다보면서 헉헉 거리고 가야 한다면, 그것은 내가 하려는 트레킹이 아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설산의 가슴 시린 풍광을 걸어서 즐기려면 가장 중요한 준비물 목록 제1호는 역시 체력이다.


등산화도 마련했으니 신발 길도 들일 겸해서 12월 4일 첫 시험 운행을 시작했다. 집에서 가까운 와룡공원-숙정문-청운대-창의문 코스를 잡았다. 북악스카이웨이를 산책하며 숙정문이라는 이름은 많이 봤는데,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었다. 아침 10시 반쯤 느긋하게 집을 나서서 김밥 한 줄을 사들고는 곧장 서울과학고 옆 한양도성길을 따라 와룡공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금방 숨이 차고 땀이 나기 시작한다. 입고 있던 경량 패딩을 벗었다. 무리하지 않기 위해 매 15분마다 쉬려고 타이머를 맞췄다. 알람이 울려 멈춰 서서 물을 마시고는 등산복 겉옷을 또 하나 벗었다.


출발한 지 2시간쯤 후 숙정문을 지나 청운대 근방에 도착했다. 예전 같으면 경로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않았겠지만, 가급적 많이 걸어야 하는 훈련이기 때문에 경로에서 다소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김밥을 챙겨 먹었다. 썰렁함에 벗었던 옷을 다시 꺼내 입으며 ‘이럴 때 플리스 재킷이 있으면 따뜻하고 좋겠네.’ 겨울 등산에 필요한 물건들이 생각났다. 쇼핑 리스트를 만들고 첫 줄에 플리스 재킷을 올렸다. 영하의 날씨라 바람에 손이 너무 시리다. ‘따뜻한 장갑이 필요해. 다음에는 손난로도 하나 챙겨 와야겠다.’ 장갑과 손난로를 쇼핑 리스트에 올렸다.


걷다가 물을 마시기 위해 배낭 옆주머니 넣어 놓은 500ml 페트병을 꺼내려고 팔을 뻗었다. 나이 탓인지 몸의 유연성이 떨어져서 물통이 손에 닿지 않는다. 억지로 몸을 돌리려니까 갈비뼈 사이의 근육에 경련이 일어난다. 하는 수 없이 멈춰 서서 배낭을 벗고 물통을 꺼내어 물을 마신 후 다시 넣고 또 걷는다. 물 한 모금 마시는 과정이 너무 번거롭다. 그래서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트레킹 중에 수낭 사용을 추천하고 있었다. 고산지대를 트레킹 할 때는 폐부종을 예방하기 위해서 이뇨제를 먹는데, 이뇨제를 먹으면 소변으로 수분이 많이 빠져나가므로 탈수 방지를 위해서 물을 많이 마셔 줘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수낭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물 주머니에 긴 관이 연결되어 있어서 물 주머니는 배낭 안에 넣고 꼭지는 입 가까이에 걸어 놓았다가 필요할 때마다 쪽쪽 빨아 마실 수 있는 구조다. 주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고산지대에 빨리 적응하려면 이것도 있어야겠다. ‘플래티푸스 수낭 2l짜리’가  쇼핑 리스트에 추가된다.


찬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니 콧물이 줄줄 흐른다. 또 멈춰 서서 배낭에서 휴지를 꺼내서 코를 풀고, 코 푼 휴지를 배낭 옆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것도 엄청 귀찮다. ‘휴지를 넣고 빼기 편리한 힙색이 하나 있으면 좋겠네. 힙색에 페트병도 넣을 수 있는 크기여야 겠다.’ 이렇게 나의 쇼핑 리스트에는 이것저것이 추가되고 있었다.


영하의 추운 겨울에 산행을 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최소한 1주일에 2번은 걸으면서 겨울 등산 경험도 쌓고 체력도 길러야겠다. 가장 중요한 준비물은 쇼핑 리스트에 없다. 준비물 목록 제1호, 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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