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
내 주민등록번호는 양력 생일 기준으로 590102로 시작한다. 1/1 바로 다음 날이고, 음력으로는 동짓달 스무사흘이다.
우리 집에서는 오래전부터 양력설에 차례를 지냈다. 차례에는 자손들이 모두 빠짐없이 참례하도록 아이들에게는 방학, 직장인에게 연휴가 주어지는 양력설에 지내야 한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뜻이었다. 설에 시골 큰댁에서 차례를 지낼 때면 사촌형제들, 당숙, 당고모, 6촌 형제까지 모두 합쳐서 차례 참석자가 항상 30명이 넘었다. 어렸을 때 나는 생일날 집에 있기보다는 많은 손자 손녀 중에 하나로 시골 큰댁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설날 그 많은 인원이 차례를 지내고, 그 상황이 다음 날도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상태에서 누구도 내 생일을 챙겨줄 겨를은 없었다. 그래서 가끔 어머니는 음력으로 동짓달 스무사흘에 미역국을 끓이고 내 생일상을 차려 주시곤 했다.
생일날 특별한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좀 한가한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철이 좀 들고 난 후부터는 생일이란 태어난 내가 축하받아야 하는 날이라기보다, 나를 낳느라 고생한 어머니에게 감사드리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 생일에는 꼭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밥도 먹고 케이크도 자르고 하려고 한다. “그날 차에서 너를 낳았으면 이름을 병차라고 지을 뻔했다.”는 그날의 얘기도 들으면서..
이번 내 생일은 특별한 이름이 붙은 생일이다. '환갑', 사전에는 육십갑자가 다시 갑으로 돌아온다는 예순한 살을 이르는 말이라고 나온다. 무술년에 태어난 아기가 육십갑자를 돌아 다시 무술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몇 년 전 필리핀 골프장에서 내 캐디를 했던 Domingo는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적었는데도, 이빨도 빠지고 주름살도 깊어서 환갑 노인티가 났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손자 손녀도 여럿 될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탈 때면 지하철 안에 온통 노인들밖에 없어서 나조차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사실은 그 사람들의 눈에는 나도 고리타분한 노인의 한 사람일 테지만, 그 노인들 틈에 끼어있다는 것이 별로 달갑지는 않다. 지금은 환갑이라고 해도 어디서 노인 축에 끼지도 못하지만, 불과 50년 전만 해도 한 인간이 60년을 살아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환갑은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큰 사건이었다.
아흔을 넘겨 사신 우리 할아버지도 환갑잔치를 크게 하셨다. 할아버지 환갑잔치 때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면 나를 포함한 손자 손녀들은 모두 때때옷을 입고 있다. 나는 어려서 기억이 없지만, 전해 들은 얘기로는 널따란 바깥 마당에 멍석을 깔고 차양을 치고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손님에게 음식 대접을 했으며, 할아버지 환갑잔치에 쓸 소를 잡으려고 백정이 소고삐를 잡아 끄는데 소가 큰 눈을 껌뻑거리며 눈물을 흘렸다느니, 백정이 소의 미간을 망치로 내려치니 소가 꼼짝 못 하고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더라느니, 동네 사람들 전체가 1주일 동안 자기 집에서는 밥을 안 하고 우리 집에 와서 먹었다느니, 할아버지 환갑잔치 소식을 듣고 전라도에서부터 거지 떼가 왔다는 등등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아버지는 환갑 때 잔치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환갑잔치란 장성한 아들 딸이 챙겨드려야 하는 것인데, 아버지 환갑에 외아들인 나는 미혼에 사회초년생이어서 아무것도 몰랐다. 두 분이 3박 4일 환갑 기념 여행을 다녀오시겠노라 출발하셨는데, 돈이 아깝다고 하룻밤만 자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머니 환갑에는 4남매가 모두 결혼을 해서, 나도 첫아들을 훈장처럼 달고 있었고, 막내도 결혼해서 군의관으로 복무 중이던 매제가 정복을 입고 참석해서 절을 올렸다. 그때는 제법 큰 음식점에서 손님을 청하고 환갑잔치를 했다.
한 동네 사는 내 ‘애인’은 1년 전부터 자기 육순이라고 노래를 부르더니, 금년에는 환갑 기념품으로 수건을 만들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씩 돌렸다. 어떤 모임이든지 첫 잔 건배사에 자기의 환갑을 축하한다는 얘기가 들어가면, 무조건 그 모임은 자기 환갑잔치라고 생각하기로 했단다. 그런 식으로 생일이 아니라 생월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생월 전후 몇 달 동안을 이 그룹 저 그룹과 환갑잔치를 했다.
나에게 환갑은 그저 매년 돌아오는 평범한 생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특별한 이름이 붙은 생일이어서, 이번에는 스스로에게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도 선물하고 생일날도 내가 챙겼다. 마침 음력 동짓달 스무사흘이 12/29 토요일이라서 어머니를 모시고 형제들만 오라고 해서 우리 식구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가 나에게 생일 선물을 주셨다.
“건강하고 즐겁게 살기를, 엄마가”
90을 바라보는 어머니가 환갑을 맞이한 아들에게 선물로 돈봉투를 주시며 써넣으신 글이다. 평소 등산을 1도 안 하다가 갑자기 히말라야에 가겠다고 나서는 아들이 어머니는 못 미더우신 모양이다. 집사람이랑 환갑 기념 여행이나 갈 것이지 동행도 없이 혼자서 산에 간다고 걱정하신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눈에는 이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괜찮은 놈으로 보이는지 대견해하시는 눈치다. 동생도 히말라야에 가려면 이것저것 등산용품을 장만해야 할 테니 보테쓰라며 제법 두툼한 봉투를 건네주었다. 돈 받으려고 불러낸 것 같아 미안했다. 동생은 산에 가려면 우선 아파트 16층을 계단으로 걸어 올라다니는 훈련을 하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아무튼 실탄이 생겼으니 더 적극적으로 온라인으로 장비 쇼핑을 할 수 있게 됐다. 내 돈 내고는 아까워서 망설이던 3-in-1 고어텍스 재킷이 1순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