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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병우 Jul 05. 2024

가을이의 첫 번째 가출

옛 주인을 찾아 떠난 가을이

2022년 8월 15일 가을이와의 첫 만남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하나로마트에 장 보러 갔다가 경동건축 김사장님이 갑자기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다가 가을이를 데려오게 돼서, 농막에는 강아지 밥그릇도 개줄도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우선 영동읍내에 가서 적당한 크기의 켄넬을 사 왔다. 유튜브에서 영상을 충분히 봐왔기 때문에 켄넬 훈련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간식을 켄넬 안에 던져 넣어주니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들락거렸다. 서울에 갈 때는 이동장으로 쓰고 평소에는 집으로 쓰려고 생각했는데, 아직 자기 집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지 쉬거나 잠을 잘 때는 켄넬 보다는 농막 아래 틈새를 더 좋아했다.


첫날밤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맛비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농막 안에 재웠지만, 다음날부터는 땅바닥에 쇠말뚝을 박고 카페 여연에서 데리고 올 때 준 쇠사슬로 묶어놨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 작은 덩치에 쇠사슬은 너무 터무니없어 보였다. 그래서 쇠사슬 대신 비닐하우스 고정할 때 썼던 나일론 끈으로 묶었다.


이 쇠사슬 대신 사용한 나일론 끈이 문제였다. 가을이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똥오줌이 마려울 때는 정신없이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습성이 있다. 내 뇌피셜이지만 어린 시절 펫샵에서 오랜 시간 분양을 기다리며 좁은 공간을 빙빙 돌던 것이 습관이 된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가을이는 나일론 끈을 스프링처럼 꼬아놓다 못해, 꼬인 끈을 제 뒷다리에 칭칭 감아서 꼼짝 못 하기 일쑤였다.


나일론 끈으로 제 뒷다리를 칭칭 감은 가을이

가을이를 데리고 온 지 나흘째 되는 8월 19일 금요일 아침이었다. 돌아오는 일요일에는 서울에서 가족들이 모두 내려와서 새로 지은 농막 집들이를 하기로 했다. 우리 딸은 재택근무가 가능하니 선발대로 먼저 와서 내가 텃밭에서 키운 바질을 따서, 나랑 바질 페스토를 만들기로 했다. 아침 일찍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오면 8시 반쯤 내가 기차역으로 마중 나갈 계획이었다.


가을이와 가볍게 산책을 한 후 아침밥으로 사료 한 컵을 챙겨주고 농막 안으로 들어갔다. 딸을 마중 나가려면 아빠가 깔끔해 보여야 될 것 같아서 면도를 시작했다. 면도를 반쯤 했을 때 뭔가 허전함이 느껴졌다. 마치 그 옛날 파리 루삐갈을 걸어가는데 소매치기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반지갑을 빼냈을 때 갑자기 엉덩이가 허전해졌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을이 낑낑 거리는 소리, 그릇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바깥이 너무 조용했다. 서둘러 면도를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가봤다.


앗, 가을이가 안보였다!


목줄에 묶었던 나일론 끈의 매듭이 풀어져 있었다. 혹시나 여느 때처럼 농막 바닥 틈새에 들어갔는지 살펴봤지만 가을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 새 이름을 결정하기도 전이라서 옛 주인이 부르던 이름 '봄봄'이를 불러봐도 나타나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소리가 났었으니까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라 생각하고 크록스를 신은 채 가을이를 찾아 나섰다.


농막에서 150m쯤 떨어진 산길 진입로 입구에는 반듯하게 잘 정리된 산소가 있다. 그 산소까지 왔을 때 길 위에 싼 지 얼마 안 된 듯 한 개똥이 보였다. 똥의 크기와 색깔이 영락없는 가을이 똥이다.


'그새 여기까지 내려와서 똥을 쌌구나.'


50여 m를 더 내려가서 옥전공수로까지 내려갔다. 마침 큰 길가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상수도 공사를 하느라 도로를 파헤치고 있었다. 주변을 살펴봤지만 가을이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다면 상당히 멀리 갔다는 얘기다. 크록스를 신은 상태로 녀석을 따라잡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일단 기차로 오고 있는 딸에게 전화를 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지금 강아지가 없어져서 찾으러 나가야 하니 기차역에는 좀 늦을지도 모른다, 아빠가 강아지를 찾고 최대한 빨리 갈 테니 기차역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라고 하고, 서둘러 농막으로 돌아와서 신발을 갈아 신고, 사발이를 몰고 큰길로 나왔다. 사발이는 나의 2003년식 4륜구동 봉고프런티어 트럭의 애칭이다.


강아지가 150여 m를 나와서 똥을 싼 후에, 50여 m를 더 나와서 큰길 아스팔트 도로까지 나왔다. 이제 어디로 갔을까?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은 아랫동네 옥전리에 있는 길가 집이었다. 산으로 오려면 항상 지나게 되는 그 집에는 대문이 없어서 울타리 안쪽으로 커다란 솥이 걸린 화덕이 훤히 보였다. 그 화덕 옆에는 가을이와 비슷한 크기의 하얀색 몰티즈가 1년 365일 줄에 묶인 채로, 길에 차가 지나가든 말든 아랑곳 않고 태연히 낮잠을 자는 모습을 항상 볼 수 있었다. 혹시 그 강아지를 찾아갔나 싶어서 그 집으로 가봤지만, 가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 집 강아지만 한가롭게 널브러져 자고 있었다.


다음 후보는 맞은편 다리 건너 언덕 위 비닐하우스와 멀리 보이는 농가였다. 그쪽은 큰길에서 훤히 다 보이기 때문에 둘러보기도 쉬웠다. 언덕 위 높은 곳까지 가봤지만 가을이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큰길로 왔을 때 상수도 공사장에서 작업 중인 한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인사를 건네며 강아지가 집을 나가서 찾으러 나왔는데 혹시 하얀 강아지를 보셨냐고 물었다. 봤단다. 불과 몇 분 전에 평밭 쪽으로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가더라고 했다. 평밭 쪽으로? 그쪽으로는 차를 타고도 간 적이 없는데.. 그쪽으로 갔다면 혹시 이 녀석이 옛 주인을 찾아서 화북 쪽으로 간 게 아닐까? 설마? 마음이 급해졌다.


급히 사발이를 몰고 평밭 마을 입구까지 갔다. 평밭 마을 입구까지만 해도 농막에서부터 거의 1km 가까이 되는 거리다. 마을 입구를 지나면 괘방령 쪽으로 산을 넘어가는 오르막 길인데 이렇게나 멀리 갔을까 싶었다.


만약 이 녀석이 옛 주인을 찾아가겠다고 나온 거라면 이 길을 계속 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평밭 마을 입구를 지나 계속 길을 따라갔다. 이슬농장을 지나서 천천히 길 양옆을 살피며 300m쯤 갔을 때, 오르막 길에서 굽어진 도로의 코너를 돌자, 가드레일을 따라 터덜터덜 가고 있는 하얀 강아지가 보였다.


'와.. 이놈이 진짜로 옛 주인을 찾아가고 있구나' 싶었다.


일단 먼발치에 사발이를 세우고 차에서 내려 간식을 던져주면서 이리 오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안타깝지만 가을이는 아직 나를 자기의 보호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공연히 섣불리 접근했다가 뛰어서 도망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영영 놓칠지도 모르니, 살금살금 뒤에서 가을이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이 녀석이 느끼는 안전거리는 2m 정도인가 보다. 간식을 가을이 앞에 던져줬지만 처음에는 쳐다보지도 않다가, 조심스럽게 나한테서 멀리 있는 것만 먹고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요 며칠 자기한테 밥 주던 낯선 아저씨가 2m 이내로 접근하니까 가만히 서 있다가도 거리를 벌린다. 이렇게 10여 m를 따라가다 보니 차를 세워놓은 곳에서 자꾸 멀어졌다.


안 되겠다 싶어서 작전을 바꿨다. 차로 돌아가서 사발이를 타고 가을이를 지나쳐 앞으로 가서 길막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중앙선을 넘어 가드레일 반대편 축대 쪽으로 가서 반대방향으로 나를 피한다. 조심스럽게 쪼그리고 앉아서 간식을 던져주며 천천히 오리걸음으로 다가갔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가까이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발짝씩 가을이와의 거리를 좁혀 갔다. 녀석과의 거리가 1m 이하로 좁혀졌을 때, 나는 용수철처럼 몸을 날려 녀석을 덮쳤다.


하지만 놈은 더 빨랐다. 내가 쪼그려 앉아있다가 튀어 오르는 순간 녀석은 내 손을 피해 달아났고, 녀석을 잡으려고 쭉 뻗은 손은 허공을 날아가 아스팔트 바닥에 착지하면서 손바닥을 아스팔트 바닥에 주~욱하고 갈아버렸다. 손바닥은 흙먼지와 시뻘건 피가 섞여 떡이 되었고, 녀석과 나의 거리는 다시 4~5m로 벌어졌다. 더 멀리 달아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제 녀석은 더욱 경계하는 눈치다.


다른 작전이 필요했다. 이제는 너를 잡을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뒤로 돌아 쪼그려 앉은 채로 녀석과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뒷짐 진 손에 간식을 들고 오리걸음 뒷걸음질로 접근했다. 멈췄다 서기를 반복하며 한걸음 한걸음..


2m...

멈춤...

1m...

또 한참을 멈춤...

50cm...

또 덮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꾹꾹 참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녀석이 내 손의 간식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녀석의 입이 나의 손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살포시 턱밑을 쓰다듬으며 목줄을 잡고, 녀석을 반짝 들어 올렸다. 가을이를 품에 안아 차에 태우고 무사히 농막으로 돌아왔다. 더운 여름날 아스팔트 도로에서 가을이와 밀땅을 하다 보니 온몸은 땀범벅이 되고, 손바닥은 상처 때문에 쓰라렸다. 약속시간에 30분 늦기는 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딸아이의 마중을 나갈 수 있었다.


가을이의 추정 이동경로

지도에서 확인해 보니 가을이의 옛 집 화북은 우리 농막에서 북쪽 방향이고 가을이가 이동한 방향은 동쪽 방향이었기 때문에 가을이가 옛 주인을 찾아나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간에 있는 평밭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도로를 따라 오르막 길로 간 것으로 볼 때 나는 가을이가 옛 주인을 찾아 떠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가을이의 첫 가출 시도는 1시간 여만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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