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의 시대에서 MVP의 시대로

100배의 공포, 그리고 100배의 속도

by 류병우

지난 세 편의 글을 통해 나는 AI라는 새로운 파트너와 만나고, 싸우고, 또 그 한계를 깨닫는 과정을 이야기했다. 이 모든 경험은 결국 나에게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지난 수십 년간 내가 해온 ‘일’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었나?”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내가 지나온 ‘산업 시대’의 풍경을 다시 한번 돌아보기로 했다.


내가 역사 공부를 깊이 있게 한 것은 아니지만, 인류의 역사에는 부(富)를 창출하는 원천이 바뀌는 ‘문명사적 대전환’이 있었던 것 같다. 수천 년간 토지에서 식량을 얻던 농업 사회는,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는 산업 사회로 대체되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산업 생산품이 농업 생산품보다 압도적으로 큰 부를 창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문명사적 대전환기에 전통에 얽매여 변화를 주저했고, 그로 인해 근대사에 질곡을 겪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대전환의 한복판으로 밀려 들어와 있다. 부의 원천이 물리적 실체를 가진 ‘제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지적 자산’으로 넘어가는 시대 앞에..


이것이 나에게 대전환으로 느껴지는 것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직장인으로서 회사를 다니며, 기업인으로서 사업을 운영하며 내가 지난 45년 간(마지막 15년은 신나게 놀았으니 30년이라고 해야 옳겠다) 복무해 왔던 산업 시대의 업무를 지배했던 보이지 않는 법칙, ‘ECO cost’에 대한 우리의 노력 때문이다.


100배의 공포가 지배하던 시절


우리가 물리적인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할 때, 그 개발 과정의 핵심 철학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설계하는 것(Do the right thing)"이었다. 전략적 실패를 전술적 성공으로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해왔다. 잘못 기획되고 설계된 제품은 아무리 싸게 잘 만들어도 시장에서 성공할 수 없다. 설계가 잘못된 채로 생산 라인에 올라가거나 시장에 출시되면, 그 문제를 바로잡는 데 드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는 이 끔찍한 ‘설계 변경 비용’을 ‘ECO(Engineering Change Order) cost’라 불렀고, 전설처럼 내려오는 1-10-100의 법칙을 신봉했다. 설계 단계에서 오류를 수정하는 비용이 ‘1’이라면, 생산 단계에서는 ‘10’이 되고, 시장 출시 후에는 ‘100’이 된다는 공포의 법칙. 이 법칙이 바로 산업 시대의 제품 개발실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내가 해 왔던 일을 좀 멋있는 말로 포장하면 제조업체에서 이 ECO의 공포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도록 정보 시스템을 설계하고 공급하고 지원하는 것이었다. 나의 직업은 고객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설계 단계에서 가능한 모든 변수를 검토하고 시뮬레이션하여 완벽한 청사진을 만들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 우리의 고객이 하는 일을 이해하려 했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실수가 적은 방향으로 일하고, 설사 실수를 하더라도 ECO cost가 '1'인 설계 단계에서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했다.


법칙의 파괴자, 소프트웨어와 AI


하지만 이 철옹성 같던 법칙은 소프트웨어로 대표되는 물리적 실체가 없는 '지적 자산(IP Intellectual Property)'의 등장과 함께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소프트웨어의 수정 비용은 물리적 제품처럼 100배로 뛰지 않았다. 코드 몇 줄을 바꾸고 바뀐 제품을 고객에게 전달하는 데 드는 비용은 때로 0.1에 불과했다. ‘ECO의 공포’가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시대의 철학이 싹트기 시작했다. 바로 ‘애자일(Agile)’과 ‘MVP(Minimum Viable Product)’다.


일단 시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 기능의 제품(MVP)을 빨리 만들어서, 시장에 던져 피드백을 받고, 그것을 바탕으로 빠르게 개선해 나가는 방식. 이것이 소프트웨어 제품 시대의 새로운 합리성이 되었다.


그리고 AI는 지식 노동 업계에서 MVP 사이클을 극한으로 가속하는 게임 체인저로 등판했다. 이제 우리는 지식 노동의 대표적인 산출물인 문서 한 장, 코드 한 줄, 디자인 시안 하나를 만드는 데 며칠씩 머리를 싸맬 필요가 없다. AI와 함께라면 단 몇 분 만에 수십 개의 시안(MVP)을 만들고, 그중 가장 나은 것을 고르거나 조합하여 발전시킬 수 있다. 그렇게 생산한 제품을 빛의 속도로 고객의 책상 위 모니터로 배달할 수 있다. 실패 비용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진 것이다.


'완벽주의자'에서 '위대한 반복가'로


ECO의 공포가 지배하던 시절, 전문가는 실수를 하지 않는 '완벽주의자'가 되어야 했다. 처음부터 정답을 내놓아야 했고, 실패는 곧 비용의 폭증을 의미했다. 게다가 우리 같은 후발산업사회에서의 엔지니어는 나의 지적 능력으로 정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우리보다 먼저 시행착오를 통해서 정답을 얻은 이들의 정답을 빼내는 것이 비용효과적이었다. 우리 교육 시스템이 추구하는 인재상도 누군가가 이미 풀어놓은 어딘가에 있을 정답을 빨리 찾아내는 것에 맞춰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변하고 있다. AI가 실패 비용을 거의 0으로 만들어버린 MVP의 시대에, 전문성의 정의도 바뀌고 있다. 이제 전문가는 정답을 찾기 위해 연구실에 틀어박혀 날밤을 새우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일단 실행하고, 반응을 보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다듬는" 사람이다.


최고의 답을 미리 아는 '계획가'가 아니라, 최고의 질문을 던지고 빠르게 시도하며 수많은 실패를 자산으로 삼는 '위대한 반복가(Great Iterator)'. 이것이 AI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새로운 전문가의 모습이다.


이제 나는 수십 년간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던 '산업 시대의 직업'에 정중히 작별을 고한다. 그 대신, AI와 함께 100배의 속도로 실패를 반복하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미지의 여정을 시작하고자 한다.


(매주 수요일 08:00에 발행을 예약하는 것으로 Gemini 김비서와 전략을 세웠었는데, 실수로 글을 작성하고는 바로 발행을 눌러버렸네요.ㅠㅠ MVP를 몸소 실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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