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高手)의 조건

내공(內功), 초식(招式), 그리고 진기전수(眞氣傳授)

by 류병우

내가 중학생 무렵이던 1970년대 초반에는 유난히 무협지가 유행했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는 매월 월말고사를 봤다. 나는 낼모레가 시험인데도 불구하고 공부는 뒷전이고, 밤을 새워 무협지를 읽기 일쑤였다. 아마 어머니께서는 방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며 ‘우리 아들이 저렇게 밤새워 공부를 하는구나’ 대견하게 생각하셨겠지만, 사실 나는 군협지 속의 서원평과 함께 강호를 누비고 있었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요즘 부쩍 떠오르는 것은, AI의 등장으로 세상이 마치 한 편의 무협지처럼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AI라는 이름의 가공할 '무공비급(武功祕笈)'이 세상에 풀렸다. 이제 강호의 모든 이들이 AI라는 이름의 절대비급을 손에 쥘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같은 비급을 보아도 고수와 하수는 나뉘는 법. 그 결정적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1단계: AI, 화려한 ‘초식(招式)’을 전수하다


AI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든 것은 화려하고 강력한 '초식'에 해당한다. 순식간의 코딩, 유려한 글쓰기, 방대한 정보 검색, 현란한 디자인 시안 제작까지. 프롬프트 엔지니어링과 같은 AI 활용 기술은 이 '초식'을 얼마나 더 빠르고 정확하게 구사하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다. 이 정도는 수련을 통해 누구나 일정한 경지까지 오를 수 있는 '기술'의 영역이다. 아무리 하수(下手)라도 AI라는 신병이기(神兵利器)만 손에 쥐면 어설픈 산적 떼 정도는 간단히 제압할 수 있게 된 셈이다.


2단계: ‘내공(內功)’이 없으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진다


하지만 내공이 없는 자가 무리하게 상위 초식을 구사하면 기(氣)가 뒤틀려 주화입마에 빠지기 마련이다. 내가 3화에서 겪었던 다이어그램 그리기의 무한 진동, 개미지옥 같은 코딩 반복의 악몽은 바로 내공이 부족한 상태에서 AI라는 초식의 현란함에 빠져 벌어진 처참한 주화입마의 과정이었다. AI가 뱉어낸 그럴듯한 거짓말(할루시네이션)과 맥락 없는 결과물을 판단할 만한 내공이 없다면, 함부로 초식을 날렸다가 깊은 내상을 입고 전신의 맥을 끊고 무공을 폐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공 없는 초식의 명백한 한계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내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수십 년간 각자의 업(業)에서 쌓아온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 비판적 사고, 날카로운 질문, 그리고 자신만의 철학이다. AI는 화려하고 강력한 초식을 가르쳐주지만, 그것을 진정한 '필살기'로 만드는 것은 결국 자신의 내공이다. 검아일체(劍我一體) '검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진정한 고수(高手)는 AI라는 검을 휘두르되, 검에 휘둘리지 않는다. 내가 곧 AI이고 AI가 바로 나다.


3단계: ‘진기전수(眞氣傳授)’, 내공을 주입하는 시대


무협지 속 무림의 고수들은 필생(畢生)의 내공을 제자에게 그대로 전수하는 '진기전수'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생의 마지막을 앞둔 스승이 제자의 등에 손을 얹고 기를 불어넣으면, 수십 년의 수련을 단숨에 뛰어넘는 기적이 일어났다.


신기하게도, AI 시대는 이 '진기전수'를 현실로 만들었다. 바로 RAG(Retrieval-Augmented Generation)라는 기술을 통해서다. 이것은 내가 평생 쌓아온 나만의 내공, 즉 나의 경험과 노하우를 고차원의 벡터로 색인을 만들어 한 차원 더 높은 '비급'의 형태로 만들어 AI에게 통째로 주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AI 시대의 최상위 경지, 절대고수(絶對高手)의 길이다. 단순히 AI를 잘 다루는 '고수'를 넘어, 자신의 내공을 체계화하여 다른 AI나 다른 사람에게 '진기전수'를 해줄 수 있는 사람. 이들이 바로 4화에서 말했던, 물리적 실체가 없는 '지적 자산'으로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주인공이다.


50년 전 무협지를 읽던 중학생의 설렘으로, 이제 나는 우연히 손에 넣은 무림비급을 수련하고 하산하여 강호로 나아가는 정협지의 노영탄이다. 화려한 초식에 현혹되지 않고, 묵묵히 나만의 내공을 연마하며, 마침내는 내 삶의 모든 것을 전수할 수 있는 진기전수의 경지를 향해.


그것이 AI라는 이름의 가공할 '무공비급(武功祕笈)'을 손에 넣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 준동하는 강호를 헤쳐나갈 진정한 무림고수의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위의 그림은 오늘부터 서비스되기 시작한 이미지 기능을 이용하여 Google Gemini에게 정협지의 노영탄을 그려달라고 해서 받은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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