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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서 May 31. 2024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

음악과 음악가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 d단조 Op.47

D. Shostakovich | Symphony No.5 in d minor, Op.47     



지금은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을 연주회장에서 자유롭게 들을 수 있지만, 한때 우리 사회에서는 그의 음악을 듣는 것조차 불온하게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그가 공산주의 사회의 작곡가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음악은 언제나 음악 이상의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음악가 역시 마찬가지다. 불안정한 사회일수록 음악가의 정신과 예술적 표현은 날카로운 감시의 대상이 됐다. 



음악이, 예술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때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찾아지기도 한다. 음악과 음악가가 도대체 무엇을 하기에 이런 감시가 필요한 것인가.        



1942년 6월에 연합군이 나치의 눈을 피해 마이크로필름에 담아온 것은 군사작전 같은 기밀문서가 아닌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였다. 쇼스타코비치는 독일군이 포위한 페테르부르크에 남아 독일군의 폭탄 소리를 들으며 작품을 쓰고 있었다. 생각이 마비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교향곡을 쓰고 있는 작곡가라니. 스탈린과 연합군은 꺾일 수 없는 인간정신의 상징 같은 이 작품이 나치의 사기를 꺾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을 작곡하던 당시에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과 히틀러 모두에 대해서 비판적이었고 그들이 파괴한 삶과 잔혹성에 대해서 비통해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삶에도 스탈린은 복잡하고 위험하게 얽혀있었다. 1906년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쇼스타코비치는 13세에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했다.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1825년에 연주된 교향곡 제1번은 그를 단숨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음악원 졸업 후 작곡가로서 교향곡·영화음악·발레음악 등으로 창작 영역을 넓혀가던 시기에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점차 정치권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작곡가로 본격적으로 경력을 시작하는 시점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이념의 색안경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소련 당국과 피할 수 없는 갈등관계가 시작됐다.     


쇼스타코비치는 1932년에 치정과 살인이라는 충격적인 소재를 가진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으로 미국, 유럽 무대에서도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1936년에 스탈린이 이 작품을 관람하러 왔다. 그리고 작품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다음날 당의 기관지 ‘프라우다’에 “음악이 아닌 혼돈”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당시 이런 기사는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시작됐다. 한순간에 그는 소련 최고의 작곡가에서 오욕의 대명사가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침묵을 지켰다. 그는 그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 당의 비평이 아니라 자신이 써야 하는 음악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새로운 교향곡 작곡에 몰두해 1937년에 7월에 완성했다. 작품을 연주하려면 당의 허가가 필요했다. 작품 평가를 위해 당의 지도자들이 모였다. 쇼스타코비치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 작품은 비극적인 상황을 극복하려는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가 가득한 작품이라고. 작품에 들어있는 고뇌의 몸부림과 끊임없는 신음을 들을 수 없었던 그들은 만족하며 연주 허가를 내주었다.

      

1937년 11월 21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듣기 위해 당의 지도자를 비롯해서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시대의 진실을 처절하게 드러내는 이 위대한 작품 앞에서 청중은 말할 수 없는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교향곡은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고, 쇼스타코비치의 명예는 회복됐다. 그는 1938년 1월에 이 작품이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련 예술가의 실질적이고 창조적인 응답이라고들 하니 매우 기쁘다.”라고 말했다. 작품에 대해서 흔히 인용되는 작곡가의 이 말은 사실 냉소적이며 애매모호하다. 그러나 이 작품 덕분에 쇼스타코비치는 음악가로 살아남아 계속해서 시대를 증언할 수 있게 됐다.      



작품은 4악장 구성이며 장대하고 영웅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1악장은 강한 저항의 의지를 표출하듯 역동적인 동기로 시작하며 투쟁적으로 전개된다. 2악장은 스케르초풍으로 우스꽝스럽고 기묘한 음향으로 신랄한 풍자를 보여준다. 느린 3악장은 장송음악을 연상시킨다. 금관악기의 침묵 속에서 현악기가 애도를 표하고 목관악기는 처연히 노래한다. 마지막 악장은 타악기의 거친 타격과 금관악기의 포효로 시작해 현악기의 울부짖음이 합세한다. 현악기의 흐느낌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 알고 있다. 어떻게든 승리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을. 작품은 승리를 향해 끌려가듯 힘겹게 나아간다. 이 필사적인 투쟁의 여정은 어떤 승리의 피날레 보다도 먹먹한 감동을 준다. 




예술의전당 2021년 교향악축제 프로그램북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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