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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서 Jun 19. 2024

차이콥스키 | 교향곡 제6번 b단조 Op.74 ‘비창’

만약 3악장과 4악장의 순서가 바뀌었다면



가혹한 운명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죽고 싶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았고, 다른 한 사람은 살고 싶지만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각각 ‘운명’을 주제로 한 교향곡을 남겼다. 전자는 베토벤의 제5번 교향곡 ‘운명’이고 후자는 차이콥스키의 제4번 교향곡이다. 그리고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교향곡이 된 ‘비창’은 무자비한 운명에 슬픔으로 굴복하는 음악적 유서가 되었다. 차이콥스키의 죽음을 둘러싸고 지금까지도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의 죽음이 자살이든 아니든 이 작품의 탄생과 작곡가의 죽음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1893년 10월 28일 작품의 초연 후 10일도 되지 않아 차이코프스키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결별은 차이콥스키를 괴롭힌 그의 인생의 부주제였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치며 곧잘 흥분 상태에 빠지는 과민한 아이였던 차이콥스키는 10살에 기숙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머니와 이별해야 했는데 이 이별이 그의 삶에서 가장 충격적인 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몇 년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그에게 다시 한 번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차이콥스키가 37살이 되던 해에 알게 된 9살 연상의 폰 메크 부인은 그의 음악을 사랑해 그에게 경제적·정신적·정서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차이콥스키는 삶의 여러 풍파 속에서도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다. 15년간이나 계속된 절대적 후원은 그러나 1890년에 갑작스럽게 중단됐다. 그때의 타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슬픔과 상실감을 어느 정도 극복한 차이콥스키는 다시 작곡에 몰두하는데 그것이 바로 마지막 대작이 된 ‘비창’ 교향곡이다.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악장 배치이다.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아다지오 서주로 시작되는 제1악장은 소나타 형식으로, 러시아정교의 레퀴엠(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음악)을 인용했다. 두 개의 주제는 모두 아래로 가라앉는 하행선율 패턴을 기반으로 하는데, 1주제는 다소 경쾌한 움직임을 보이는 반면 2주제는 망설임 속에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인상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유명한 선율이다. 2악장은 우아하고 경쾌한 춤곡이며 3악장은 승전가와도 같은 활기찬 행진곡이다. 2악장이 느린 악장이 아닌 것도 이례적이지만, 한층 더 놀라운 것은 마지막 악장이 승리의 피날레가 아닌 느린 악장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처절함과 비통함이 가득한 4악장은 그 음악적 내용과 더불어 쉽게 사라지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그런데 만약 3악장과 4악장의 순서가 바뀌었다면 어땠을까? 살자와 자살은 글자의 순서만 바꾸었을 뿐인데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이 작품을 들을 때면 종종 덧없는 상상을 해본다. 






예술의전당 2021년 교향악축제 프로그램북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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