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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서 Mar 18. 2016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음악 에세이 4 - 슬픔과 고독 속에서 길어낸 노래

누구에게나 상실의 계절이 있다. 이방인으로 사는 시간이 있다. 기존 세계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 새로운 길을 떠나야 하는 때가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잊는 것이 상책이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허술한 처방전이다. 어설픈 힐링은 그 순간만 무마하는 마취제일 뿐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그때 빨리 세상 다 산 노인이 되거나, 이내 무덤가에 자리하기를 소망했는지도 모른다.


여기 한 겨울밤에 자기 자신과 세계를 직시하며 길 떠나는 나그네가 있다. 실연은 그에게 떨쳐버려야 할 고통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찾는 매개체가 된다. 24개의 시와 노래에 그의 영혼의 여정이 낱낱이 담겨 있다. 잊고 있었다. 그때가 실은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 보던  때였음을, 태양이 지지 않는 때였음을. 사랑은 어두운 겨울밤에도 우리를 홀로 깨어있게 한다.


“나의 작품은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와 슬픔을 표현한 것이다. 슬픔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야말로 세상을 진정 행복하게 하리라고 생각한다. 슬픔은 이해를 돕고 정신을 강하게 한다.”


슈베르트는 그가 느낀 슬픔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슬픔의 힘으로만 만들 수 있는 작품이 있는 것이다. 그는 죽어가는 병상에서도 이 작품의 교정에 몰두했다. 그의 31년의 짧은 생애는 우리와 오래 함께 한다. 우리의 나그네 길에 깊은 위로를 주는 동반자가 된다.      



빌헬름 뮐러의 시     


“나는 악기를 연주할 줄도, 노래를 부를 줄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시를 짓는다면, 그것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면서 연주를 하는 것이다... 확신컨대, 나의 시어에서 음률을 찾아 그것을 내게 되돌려줄, 나와 비슷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21살의 뮐러는 일기에 이렇게 고백했다. 그리고 그 소망이 얼마 지나지 않아 슈베르트로 실현됐다.

   

가곡을 중요한 예술 장르로 격상시킨 슈베르트는 그의 진지한 음악적 열정을 가곡에 쏟아부었다. 시인들은 다양한 심상으로 슈베르트의 시상을 자극했다 “당신의 민요에서 내가 바라던 순수한 음향과 진정한 소박성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의 민요는 그지없이 순수하고 맑습니다.” 슈베르트의 노래를 설명하는 것과 같은 이 표현은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뮐러에게 보낸 편지의 구절이다. 과장되고 극적인 효과를 혐오했던 슈베르트는 진실하고 소박한 노래에 자연스럽게 끌렸다. 그리고 그는 뮐러의 시에 내재된 음향을 실현시켰다.


총 24곡으로 이루어진 ‘겨울 나그네’는 2부로 나뉘어서 작곡됐다. 슈베르트는 뮐러가 연작시의 1부와 2부를 함께 모아 새롭게 발표한 것을 모른 채 처음에 발견한 뮐러의 시 12편을 먼저 작곡했다. 그 후에 뮐러의 연작시가 완성본으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다시 새롭게 12편을 작곡했다. 그러나 이미 완성된 1부의 음악적, 극적 통일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뮐러의 시에 맞춰 새롭게 재구성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슈베르트 연가곡의 순서는 뮐러의 연작시의 순서와 차이를 보이게 된다.      



작품에 대해     


사랑하는 여인에게 버림받은 청년이 겨울밤에 연인의 집 앞에서 이별을 고하고 방랑의 길을 떠난다. 황량한 겨울 벌판을 걸으며 그는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헤맨다. 여행의 끝에 이르러 그는 거리에서 연주하는 늙은 악사에게 자신의 미래를 발견하고 그와 함께 또 다른 길을 떠나려 한다.


‘겨울 나그네’를 작곡할 당시에 슈베르트는 병세가 악화되고 있었다. 무너져 가는 육체와 정신을 가진 그는 이 어둡고 우울한 연작시에 깊이 공감했다. 친구 슈파운은 슈베르트의 인생에서 여름이 지나가고 겨울이 엄습했다고 말했다. 1827년 10월에 슈베르트는 슈파운에게 쇼버의 집으로 초대하면서 다음 같이 말했다.


“자네를 위해 소름 끼치는 가곡을 들려 겠네. 노래에 대해 자네가 뭐라고 말할지 무척 기대된다네. 그 곡들 어떤 곡보다도 나를 감동시켰다네. 


슈베르트는 모임에서 ‘겨울 나그네’를 감동적인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친구들은 작품에 담긴 한없는 비애에 당황했다. 그러나 곧 자신처럼 이 곡들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슈베르트의 장담대로 그들은 이 작품이 가진 호소력에 깊이 빠졌다.


이 작품은 시와 음악의 긴밀한 결합의 이상적인 예이다. 음악적인 표현은 절제된 가운데 결코 과장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시의 정서는 음악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잔잔한 감동을 이끌어낸다. 슈베르트는 과다한 장식음의 사용이나 지나친 악상 부호의 사용은 선율의 신선함을 어그러뜨리고 가사의 의미를 흐려놓는다고 생각하여 가사의 선율에 악상 부호를 붙이지 않았다. 그는 가사 자체가 표현의 방향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슈베르트와 동시대인인 존라이트너는 슈베르트의 연주와 리허설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진실된 표현, 깊은 감성은 선율에서 우러나서 반주에 의해 경탄할 만큼 고양되어진다. 그러므로 선율의 흐름을 저해하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반주를 혼탁하게 하는 모든 요인은 정확히 작곡가의 의도와 상반되는 것이고 음악적인 효과를 깨뜨리는 것이다.”


이처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간결한 표현 안에 심오한 내적인 정서를 담아내야 하는 것이 이 작품을 연주하는 음악가들의 어려운 임무이다.



겨울 나그네의 여정     

   

슈베르트는 나그네의 고립과 고통을 나타내는 쓸쓸한 겨울 풍경과 내면의 정경을 이 작품에 담았다. 고독한 한 인간이 겨울 여행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통일적인 줄거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내적으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방랑이라는 주제 자체도 그렇거니와, ‘겨울 나그네’의 방랑은 좀 더 내면적인 것인 까닭이다. 사랑의 상실과 그에 따른 슬픔의 정서는 전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난다.

   

이 작품의 극적인 통일성을 이해하는 것은 연주와 감상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시와 음악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나누기 위해서는 진지하게 음악적인 대화를 함께 나누어야 한다. 고도의 지적, 정서적인 교감이 있을 때 비로소 전 24곡의 노래는 하나의 필연적인 흐름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슬픔은 이렇게 길을 걷는다.


첫 곡 ‘밤 인사’(Gute nacht)에서 방랑자 신세로 온 나그네는 연인의 문 앞에 이별 인사를 적고 다시 방랑자 신세로 떠난다. 왼손 반주의 지속적인 리듬은 방랑의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발걸음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발걸음은 때로는 표면적으로, 때로는 내재돼서 계속적으로 나타난다. 각 작품에서 나그네가 걷는 속도는 그의 심리 상태를 암시한다.

   

그녀의 집 지붕 위에 있는 ‘풍향계’(Die Wetterfahne)는 떠나가는 나그네를 비웃는 듯, 바람의 방향을 종잡을 수 없다. 휘몰아치듯 변화 많은 선율에 갈피를 못 잡는 나그네의 심정이 나타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두 뺨에서 ‘얼어붙은 눈물’(Gefrorne Tränen)이 떨어진다. 그녀와 거닐던 푸른 들판은 하얀 눈밭이 되어서 그를 맞이한다. 그의 가슴은 차갑게 죽은 듯하고, 그녀 모습 역시 그의 가슴속에서 ‘얼어버렸다'

(Erstarrung).

   

성문 앞에 이른 나그네는 그에게 깊은 안식을 주던 ‘보리수’(Der Lindenbaum) 곁을 지난다. 보리수는 그곳에서 안식을 찾으라고 속삭이지만 나그네는 뒤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의 ‘넘쳐흐르는 눈물’(Wasserflut)이 눈 위에 떨어진다. 그는 눈물을 담은 눈이 냇물에 녹아 연인의 집에 가 닿기를 소망한다. 단단한 얼음판으로 뒤 덮인 ‘강 위에서’(Auf dem Flusse) 그는 연인의 이름을 새긴다.

   

마을의 탑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얼음과 눈을 밟으며 서둘러 도망치지만 마음은 여전히 행복했던 과거를 ‘회상’(Rückblick)한다. 서두르는 발걸음과 머무르려는 마음이 괴롭게 교차한다. 그는 그가 겪는 즐거움과 고통을 모두 ‘도깨비불’(Das Irrlicht)의 장난으로 치부하려고 한다. 매서운 추위 속을 뚫고 걸은 나그네는 어느 숯쟁이의 비좁은 오두막에서 잠시 ‘휴식’(Rast)을 취하려 한다. 하지만 잊으려 했던 몸과 마음의 아픔이 더욱 통렬하게 느껴질 뿐이다.

   

어느새 깜박 잠이 든 나그네는 오월의 풍경과 연인과의 사랑을 담은 ‘봄날의 꿈’(Frühlingstraum)을 꾼다. 그러나 수탉들의 울음소리에 깬 현실은 춥고 어두울 뿐이다. 그는 다시 무거운 걸음걸이로 터벅터벅 걷는다. 바람은 고요하고 세상은 밝은데 오히려 그는 검은 구름 같은 ‘고독’(Einsamkeit)을 뼈저리게 느낀다. 다른 마을에 이른 나그네는 사랑하던 이가 살던 마을에서 오는 ‘우편마차’(Die Post) 소리에 가슴이 뛰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희망일 뿐.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진 그는 서리 내린 자신의 머리를 ‘백발’(Der greise Kopf)로 착각해 노인이 되었다고 잠시 기뻐하지만, 여전히 죽음까지는 먼 젊음에 괴로워한다. 그의 머리 위에서는 마을을 떠나올 때부터 따라온 ‘까마귀’(Die Krähe) 한 마리가 계속 불길하게 빙빙 돌고 있다. 그는 나무 앞에 서서 한 잎사귀를 바라보며 ‘마지막 희망’(Letzte Hoffnung)을 건다. 그가 지나가는 ‘마을에서’(Im Dorfe) 개들은 그를 향해 짖고 사람들은 꿈을 꾸며 잔다. 모든 꿈이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그는 마을을 뒤로 하고 쉼 없이 걷는다.

   

그는 이내 ‘폭풍우 치는 아침’(Der stürmische Morgen)을 맞이한다. 거칠게 폭풍우 몰아치는 겨울 하늘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던 아침 풍경이라고 그는 자조적으로 외친다. 절망과 피곤에 지친 나그네는 그를 현혹하는 빛을 따라 ‘환상’(Taüschung)에 빠진다. 그 빛이 사랑하는 이가 있는 밝고 따뜻한 집으로 이끌 것이라는 거짓 환상에. 그는 현실과 환상이 오가는 불안정한 상태에 처한다.

   

이윽고 나그네는 한 ‘이정표’(Der Wegweiser) 앞에 이른다. 길가마다 있던, 마을로 가는 이정표를 지나쳤던 그는 돌아온 이가 아무도 없는 이정표 앞에서 멈춘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로 한다. 그 길이 이른 곳은 공동묘지. 그렇지만 그곳 역시 그를 받아주지 않는 무정한 ‘여인숙’(Das Wirtshaus) 일뿐이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은 그는 탄식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나그네는 계속해서 살아갈 ‘용기’(Mut!)를 갖기 위해 얼굴로 날아드는 눈발도, 마음속 한탄도 애써 부정하려 한다. 그는 바람과 폭풍우에 맞서서 즐겁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자고 과장되게 외친다. 그러다 하늘 위에 ‘환상의 태양’(Die Nebensonnen)이 떠 있는 것을 보고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세 개의 태양을 바라보며 그는 그를 비추던 연인의 두 눈은 이미 져버렸으니 세 번째 태양 역시 져버리고 어둠이 덮치기를 바란다.

   

또다시 마을 끝에 이른 나그네는 저편 마을 변두리에 서 있는 ‘거리의 악사’(Der Leiermann)를 발견한다. 그 노인은 맨발로 얼음 위에 서서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손풍금을 돌린다. 듣는 이도, 보는 이도 아무도 없고, 그의 앞에 놓인 접시는 텅 비어있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연주를 멈추지 않는다. 나그네는 그에게서 자신이 갈 길을 발견하고 함께 연주하며 여행하기를 청한다.


“제가 당신과 함께 가드릴까요?”

   

고통은 나그네를 파멸에 이르도록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현실과 자신을 직시하고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회복의 자리로 나아간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길의 끝에서만 보이는 또 다른 길이 있다. 한편, 시인 김경주는 여행이란 하나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연인을 상실한 나그네는 겨울을 여행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게 된다. 결국 나그네의 정처 없는 방황은 또 하나의 방향을 찾는 여정이 되는 것이다.      


난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것이 단지 슈베르트만의 고백일까? 누구나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을 사는 때가 있다.  , 섣부른 위로는 나의 고통이 그저 타인의 고통일 뿐이라는 사실만을 확인시킬 뿐이다. 그 고립과 절망의 때에 비로소 동행하는 시와 음악이 있다. 슬픔과 고독 속에서 길어낸 노래로 누군가 함께 한다. 불멸의 예술가는 지금도 이렇게 우리와 같은 시간을 산다.




“그 생에도 내가 이루지 못한 사랑이 있을 테니, 내가 음악이 되어 너를 깨울 것이다.”


(김경주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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