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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서 Mar 18. 2016

깨어라 부르는 소리

음악 에세이 1 - 음악은 내밀한 영혼의 공개된 비밀


튼튼한 심장으로 살고 싶었다. 나는 예민한 마음은 쉽게 깨진다는 것을 일찍 깨우친 영민한 아이였다. 음악은 나를 지나치게 간섭했다. 끊임없이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을 사로잡았다. 부대끼고 불편했다. 음악이 흐르는 식당에서는 음식조차 먹을 수 없었다. 나만 빼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결심했다. 마음을 단단히 동여매면 괜찮을 거라고. 마음을 열면 마음 쓰이는 일이 너무 많았다. 

   

조숙한 어린 시절을 거쳐 냉소적인 10대로 살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온통 검은 옷, 사람들 북적이는 낮을 피해 밤에만 연습실에 나타나는 대학 때 나의 별명은 ‘밤의 여왕’이었다. 마음을 닫으며 눈과 귀도 닫았다. 시선은 땅에 고정한 채 걸었다. 문득 고개를 들면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꽃다운 20대 초반, 나는 봄을 상실했다. 세상에서 받을 것도 없어 내가 줄 것도 없었다. 매일 장례식 복장을 한 나는 세상 다 산 사람 같았다.  


그런 날들 중 하루였다. 관 같은 침대에서 스르르 잠이 드는가 싶었다. 라디오에서 바흐가 마르첼로의 오보에 협주곡을 편곡한 BWV 974의 제2악장 선율이 흘러나왔다. 무방비 상태에서 굴드가 내게 스며들었다. 잘 갈무리된 슬픔과 아픔이 폐부를 찔렀다. 그를 직접 만난 다한들 결코 듣지 못했을 그의 육성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불현듯 귀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흠칫했다. 깨어나면서 내가 잠들었었다는 것과 감고 있던 두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 귀를 적시고 있음을 알았다. 세상과 담을 쌓은 그는 고독했다. 그 고립을 알아차렸던 나는 어떠했던가. 

   

음악은 내밀한 영혼의 공개된 비밀이다.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한다. 애써 감춘 지독히 민감한 그의 마음을 나는 그 순간 완전히 이해했다. 예민한 마음이야말로 은밀한 감동을 주고받을 수 있는 통로였다. 내 마음과 같은 또 한 사람이 있다. 그와 내가 메아리쳤다. 잊지 못할 울림을 내 안에 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린 마음으로 살기는 쉽지 않았다. 삶의 결은 거칠었으며 무장해제한 마음에 예리한 통증을 주었다. 마음을 차단하는 것은 가장 쉽고 빠른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아프니까 청춘이었던가? 젊어서 아프다는 것을 20대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아프면 안 된다는 강박증과 빨리 회복해야 한다는 조급증이 나를 더욱 힘겹게 했다. 얼마 전까지 발을 디디고 있던 땅이 눈앞에 있는데 나는 발이 닿지 않은 바다 위에 혼자 떠있었다. 다시 뭍으로 가려고 하는데 거센 물살이 나를 점점 바다 깊은 곳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먼 곳에서 무심한 얼굴로 있었다. 내 외침이 닿는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허우적거릴수록 가고자 했던 곳과 점점 멀어졌다. 위태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즈음 나는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나이, 서른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바흐의 B단조 미사를 주제로 대학원 논문을 쓰고 있었다. 진행은 더뎠고 심신은 지쳤다. 바흐의 음악은 지극히 옳고 완전했다. 온통 불안하고 불완전한 나와는 도무지 상관없었다. 그의 작품은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 도저히 정리되지 않는 내 삶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나는 깊은 회의와 허무감에 빠졌다. 나를 가장 많이 위로해주던 이도 그때는 더 이상 내 곁에 없었다. 모든 감각 중에서 오직 통점만이 남아있는 듯했다. 다시 마음을 닫았다. 사면의 희망도 없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 지냈다. 쓰고 있는 논문의 음악조차 듣지 않았다. 닫힌 방의 끝없는 정적만이 내가 대면하는 현실이었다. 삭막하고 황량한 나날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무슨 일이었을까? 새벽에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불현듯 오디오를 켰다. 잠이 완전히 달아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저 깨어나기 위해서 어떤 소리가 필요했던 것 같다. 오랜 침묵을 깨고 오디오에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무슨 음악인지 채 인식하기도 전에 나는 울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고여 있었는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살아라, 살아라. 반복해서 그가 말했다.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의식을 깨우고 심장을 두드렸다. 바흐의 B단조 미사의 크레도 악장 중에서 ‘Et expecto resurrectionem’이었다.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이 곡의 라틴어 가사의 내용이다. 힘찬 팡파르 동기와 굴곡 많은 멜리스마 동기는 하늘을 향해 상승하며 삶에 대한 긍정을 이끌어냈다. 집중된 반복을 통해 치밀하게 이어지는 대위법적 진행은 치열한 삶의 의지를 일깨웠다. 그 순간 나는 바흐를 만났다. 그는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도 아니었고, 오래전에 죽은 언어를 읊는 이도 아니었다. 내 주위의 어느 누구도 그같이 긴밀하게 마음을 나누지 못했다. 아, 살았으나 죽은 나는 영원에 이르도록 살고 싶다, 살고 싶다. 벅차게 내 마음이 울렸다. 

   

어떤 음악은 우리 내면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가져온다. 그 음악을 듣기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어짐은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듯 그동안 보지 못한 세계를 보게 한다. 그 돌연한 변화 속에서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빛과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가 드러난다. 

   

지금의 나는 여태까지의 세계에 갇혀있다. 문득 쨍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깨어라 부르는 소리 울린다. 그때 나는 갈라진 틈을 불안하게 바라보며 더욱 숨죽이며 움츠릴 것인가. 두려움을 떨치고 깨지더라도 결연히 나갈 것인가. 어느 날 음악이 나를 또다시 두드리면 어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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