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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서 Mar 18. 2016

앓음다움에 대하여

음악 에세이 2 - 아름다움은 앓은 흔적이다.

연주자의 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본 적은 없다. 그녀의 발을 보기 전까지는. 한 연주회에서 연주자가 맨발을 드러냈다. 오보에가 포함된 피아노 트리오 연주를 하던 중이었다. 1악장을 마친 오보이스트는 피아노 뒤로 가더니 신발을 벗었다. 신을 신고는 더 이상 연주를 하지 못할 만큼 발이 아팠나보다. 다시 무대 앞으로 나온 연주자의 맨발이 도드라졌다. 그 상태로 2, 3악장을 연주했다. 연주를 마친 그녀는 인사를 하고 벗어둔 신발을 들고 퇴장했다. 커튼콜을 할 때 역시 맨발이었다. 일반적인 연주회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백조의 다리를 봐버린 기분이었다. 그 비밀스러운 고통을.

   

한편 토슈즈 속 발레리나의 발은 자주 부각된다. 아름다움을 위해 감내하는 그들의 흉하게 변형된 발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무대 위에서 그들은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듯 날아오른다. 그런 그들은 아침에 아픔과 함께 깨어나며, 일어날 때 발을 땅에 디디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그런 발을 다시 토슈즈에 숨기고 무대에 선다. 온 몸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면적이란 곧 집약된 고통일 것. 그런데 보기에도 괴로울 정도로 일그러진 한 발레리나의 발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며 많은 이들이 감동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름다움이란 말은 앓음다움에서 나왔다고 한다. 아름다움은 곧 앓은 흔적인 것이다. 아픔이란 존재를 가장 열렬하게 느끼는 방식중의 하나다. 어느 소설에서 한 여자를 만난 후에 남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그녀를 앓았다”라고. 그는 알았을 것이다. 앓은 이는 이 말의 의미를 안다는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우리를 가장 아프게 한다. 더 많이 아픈 이가 더 많이 사랑하는 이이다. 앓는 시간은 자신과 사랑하는 대상을 가장 치열하게 느끼는 시간이다.

   

시간의 흐름은 흔적을 남긴다. 그렇지만 나이가 든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이 미성숙한 성인아이를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얼이 큰 사람이 어른이라는 말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어른이란 아는 이이다. 사람을, 삶을 알려면 앓아야 한다. 얼굴의 주름이 아니라 정신의 나이테가 진정한 어른의 표징일 것이다. 아픔의 골이 깊을수록 영혼의 나이테는 짙어진다. 앓음다움은 대상을 호되게 겪는 시간 속에서 탄생한다.

   

서정주 시인은 시 ‘푸르른 날’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뜨거운 여름 볕을 앓는 초록은 지친 나머지 붉게 변한다. 여기에서 지친다는 표현은 단순한 시듦이 아니다. 그렇다면 눈부시게 푸르른 날에 그리운 사람을 향해 그렇게 뜨겁게 타오를 리가 없다.


지치다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하여 원하던 결과나 만족 등을 얻지 못하여 더 이상 그 상태를 지속하고 싶지 아니한 상태가 되다’이다. 지치는 시간은 지연되는 시간이다. 더 이상 같은 상태를 지속하고 싶지 않은 애타는 시간이다. 푸른 초록이 오래도록 뜨거움을 품다 끝내 붉어지는 시간이다.     

  

이러한 안타까운 앓음 속에서 승화가 이루어진다. 앓은 흔적이 아름다움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치욕스러운 주홍글자가 영광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 더 높아지지만 동시에 더 깊어진다.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이라고 노래한 또 다른 시인의 말처럼.


혹독한 앓음 없이 높은 곳에 이를 수 없다. 가장 낮은 곳에 닿을 수 없다. 영혼의 무용수인 음악가들은 흉터투성이의 발을 가지고 있다. 그 아름다운 발이 다른 이의 영혼을 춤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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