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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서 Mar 18. 2016

돈키호테를 위하여

음악 에세이 3 - 무모한 돈키호테들의 도발

“연습 때만큼은 한 것 같다. 역도는 역시 정직한 운동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경기를 마친 장미란 선수가 처음 꺼낸 말이다. 역도는 사람이 들어 올릴 수 있는 무게의 극한에 도전하는 종목이다. 태릉선수촌 내에서도 연습벌레로 통한다는 그녀는 하루에 적게는 2만~3만kg, 많게는 4만~5만kg 정도를 들어 올린다고 한다. 1만kg이면 100kg의 무게를 100번 들어 올려야 하는 무게다. 

   

역도 감독의 말에 따르면, 역도 선수는 3일만 연습을 소홀히 해도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으며, 10일 정도 연습을 안 하면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도 선수는 은퇴 전까지는 결코 훈련을 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운동선수들은 선수로서 기량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곧이어 은퇴를 고려해야 한다. 운동선수들을 볼 때마다 나는 이러한 점이 내심 안타까웠다. 피겨 스케이팅 김연아 선수만 해도 스무 살에 올림픽 금메달을 딴 후 은퇴에 대한 이야기가 매스컴을 장식했다.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신예 연주자들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음악가들에게 콩쿠르 우승은 본격적인 활동을 위한 출사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연주자들 역시 사흘 연습을 안 하면 청중 앞에 설 수 없다는 점에서 운동선수들과 다를 바가 없다. 문제는 소리를 연마하는 것은 역도를 들어 올리는 것과는 달리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음악가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 역시 그의 작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연습에 몰입하거나, 연습하지 않을 때는 온통 연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인 음악가는 사실 기이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같이 음악을 전공하는 친구와 함께 바닷가에 사는 졸업반 선배의 집에 놀러 가기로 했다. 거의 한나절 걸려서 가야 할 정도의 거리였다. 당장 우리 앞에는 치러야 할 시험도, 임박한 연주도 없었다. 한가하고 즐거워야 할 방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함께 간 친구는 매일의 연습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도착하자마자 바로 집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습에 대한 강박증은 나도 그 친구 못잖았지만 그때만큼은 그 친구의 고집이 원망스러웠다. 억지로 친구와 함께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연습으로 채워야 할 나머지 방학이 한없이 길고 무료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많이 흘러 그때를 생각하면 애처롭기도 하고 꼭 그래야만 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지금 역시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날 때부터 연습 없이도 가능했던 호흡조차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특별히 훈련을 한다. 무대에서는 그 어느 것도 연습을 통하지 않고는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 것이다. 연습을 할 만한 여건이 안 될 때는 조급함에, 연습을 하지 않을 때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음악가들은 과연 불쌍한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연습이라는 강박관념과 싸우지 않는 음악가가 과연 진정한 음악가일까? 

   

국악을 하는 고(故) 성우향 명창에 따르면, 그녀는 판소리가 호랑이 꼬랑지를 잡는 것과 같기에 죽을힘을 다해서 잡고 있어야지, 놓는 순간 물려서 죽고 만다고 말했다. 여든의 그녀는 “소리는 꾀를 부리면 안 된다. 삼 분을 하면 바늘만큼 목이 조금 뚫리고 세 시간을 해야 펑펑 소리가 나온다. 지금도 산에 들어가서 백일 소리 공부하는 게 소원”이라고 고백했었다. 여든 소리 인생에 대한 비유가 가슴에 와 닿는다. 그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 캄캄한데 아무리 좋은 옷을 입은 들 누가 알아주겠냐만 아무도 몰라줘도 열심히 걸어야 하는 게 소리”인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이렇게 묘사된다. “똑바른 정신을 가진 정신 이상자로 보이기도 했고, 제정신을 찾아가는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말은 정통을 찔렀고 귀품이 있었으며 옳았지만, 행동은 엉뚱하고 위협적이었으며 바보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기사 이야기에 깊이 빠진 나머지 풍차를 거인이라고 생각하고 습격한 돈키호테이다. 아니, 산초의 눈에 풍차로 보인 거인을 습격한 돈키호테이다. 누군가는 소리를 놓는 순간 물려서 죽게 되는 호랑이의 꼬리로 본다. 죽을힘을 다해서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은 그것을 느끼는 것이다. 

   

한 해설이 있는 콘서트에서 성악가가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은 다 헛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몸무게가 100kg이 훨씬 넘는 그는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이 말을 했는데, 그 거대한 몸에서 울리는 둔탁한 울림 때문인지 그 말의 무게감이 남달랐다. 보이지 않는 소리의 길을 걷는 그에게는 그가 디딘 땅의 견고함은 더욱 실질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보이지도 않는 소리를 위해 분투하는 음악가들은 자주 돈키호테 같이 허공을 치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그들은 소득도 없어 보이는 싸움을 왜 멈추지 못할까? 

   

“산악인은 모든 힘을 다해 정상에 올라갔을 때 기쁨에 넘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 음악가들은 결코 정상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위로 올라가야만 한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지평선은 더 멀어진다. 그러한 순간은 우리에게 고마운 것인데,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은 풍족해질 것이다.”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의 말이다. 

   

음악가들은 그들의 산행을 통해 정상 궤도에서 잘 살고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가능한 꿈만 꾸는 것이 확실한 삶이고, 보이는 것만을 위해 사는 것이 현명한 삶인지. 세상을 다르게 보는 무모한 돈키호테들은 오늘도 우리의 영혼을 휘저으며 도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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