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지와 사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니스 서 Mar 21. 2016

위대한 침묵

음악 에세이 5 - 경청은 지켜야 할 예술이다.

소리 높여 소통을 외치는 시대다. 지금 우리는 그 어떤 시대보다도 더 빠르고 밀착된 소통을 하며 산다고 한다. 그런데 왜 여전히 공허하고 예전보다 단절된 것 같다고 아우성일까. 소란한 세상이다. 떠들썩한 광장에 귀 기울여보지만 진심보다는 사심에 찬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소란을 넘어 수상하기까지 하다. 

   

키케로는 ‘침묵은 예술이다. 웅변도 예술이다. 그러나 경청은 잊혀져 가는 예술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고 하지만 고대 로마시대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질은 여전한가 보다.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도 다 하지 못하면서 하지 않아도 될 말, 하기 싫은 말에 더해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하며 사느라 입이 바쁜 세상에서 침묵은 과연 예술이라 할 것이다. 반드시 말해야 할 것을 설득력 있게 펼치는 웅변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경청이야말로 지켜가야 할 예술인 것이다. 

   

그런데 침묵과 웅변과 경청, 이 세 가지 예술이 일체를 이루는 공간이 있다. 공감이라는 가치가 핵을 이루는 연주회장이다. 종일 원치 않는 소음과 맘에 없는 빈말에 시달린 이들이 오직 듣기 위해 연주회장을 찾아간다. 누군가는 경건하게 듣기만 하는 클래식 연주회장의 모습을 일방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렇지만 연주회는 결코 일방통행의 장이 아니다. 듣는 것에 소홀한 대부분의 시간과 달리 매우 집중된 형태로 서로 소통하는 곳이다. 누군가는 청중들의 경직된 자세를 부자연스럽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특정한 소리를 듣고자 귀를 세울 때 우리는 자연스레 모든 움직임을 멈춘다.

   

사실 소리의 차원에서 실로 비인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도시에서의 우리네 삶이다. 일상생활에서 당하는 무차별적인 소음은 여전히 지나치게 많다.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것만도 몇 가지가 된다. 일단 버스든 택시든 타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기사분이 한껏 볼륨을 높인 음악을 공유해야 할 때, 많은 음식점과 커피숍에서 음악 소리와 경쟁하느라 이내 목이 다 쉴 때, 그리고 지하철 등에서 휴대폰을 통해 옆 사람의 삶을 생중계로 듣게 될 때 등등. 이제 공공장소라는 광장은 개인의 밀실과 그 경계가 흐려진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소설가 박민규가 ‘갑을고시원 체류기’에서 묘사한, 옆방의 모든 움직임이 소리로 그려지는 좁은 밀실에서 “결국 나는 소리가 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어느 순간인가 저절로 그런 능력이 몸에 배게 된 것이다.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 게 생활화되었고...”라는 태도는 처절하지만 그나마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밀실에서도 광장에서도 귀를 가진 존재로서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아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연주회장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연주 직전 연주회장의 불이 꺼지면 수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에 정적을 만든다. 한시도 끄지 못하는 휴대폰도 확실히 꺼져 있는지 다시 확인한다. 혹시 통제할 수 없는 기침이 연주 중에 터져 나올까 미리 기침까지 해두느라 잠시 주변이 소란해지기도 한다. 모이면 움직이고 소리 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만드는 그 잠시의 침묵에서는 응축된 힘이 느껴진다. 그 침묵은 단순히 소리가 제거된 침묵이 아니라 정적을 힘써 지키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상 함께 한없이 고요해질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내게 가장 인상 깊은 침묵 중 하나로 기억되는 것은 2011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내한 공연 시 말러 교향곡 9번 연주에서였다. 연주회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이 만든 연주 전의 고요와 악장 사이의 정적, 그리고 마지막 악장 후의 침묵. 청중들의 경청과 침묵이 없었다면 그날 연주는 결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9번째 교향곡은 곧 최후의 교향곡이라는 징크스를 유난히 의식하던 말러는 9번 교향곡을 작곡할 때 심각한 심장질환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느꼈다. 네 개의 악장에서 삶의 질풍노도가 지나고 마지막에 현악기들의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다가 결국에는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그 순간 모든 산 자들은 숨을 죽였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 삶이 있다. 마지막 음이 울림을 다하는 순간 음악은 끝이 나고, 들이쉰 숨을 다시 내쉬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지상에 속하지 않는다. ‘지금’을 강력하게 붙잡아 일순간 아득한 영원에 대한 감각을 체험하게 한 확장된 침묵. 그것은 적막한 진공상태가 아닌 수많은 의미의 울림을 간직하고 있는 충만한 침묵이었다. 나는 그대로 숨을 멈춘 상태에서 삶의 정수, 음악의 진수를 느꼈다. 음과 음 사이에 침묵이 있다. 그리고 음악은 소리를 넘어 침묵을 경청하게 한다. 때로는 귀만을 연 침묵이 가장 위대한 소통을 이룰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돈키호테를 위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